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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식의 서평을 쓰고 싶었다. 생각 끝에 여러 명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수다를 떨어보기로 했다.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의견이 가지를 치면서 끊임없이 확장되는, 내용의 새로움까지 담기는 기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책수다'를 시작한다. 김경훈·박현진·이규정 시민기자가 함께 쓰는 이 기사는 2주에 하나씩 연재된다. - 기자말

 <제국의 위안부> 표지
 <제국의 위안부> 표지
ⓒ 뿌리와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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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정(아래 이) : "오늘 이야기 나눌 책은 <제국의 위안부>.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역사인식 등의 문제로 양국 국민들의 감정도 크게 상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감한 문제인 위안부에 대한 복합적인 면을 한번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이 책을 선정했다. 저자인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제자리인 이유를 위안부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찾는다. 우리가 위안부의 실체를 보려하지 않고 '피해자로서의 위안부'만을 보길 바랐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일본 문학을 가르치는 박유하 교수는 동아시아의 역사 화해를 위한 연구와 활동에 적극 참여해왔다. 그에 따르면 조선인 위안부를 낳은 것은 제국의 식민지배, 가난과 가부장제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처럼 단순히 '강제로 끌려간 소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위안부를 꾀어낸 건 대체로 조선인 업자들이었고 상당수 위안부들은 일본 군인과 동지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는데 어떻게 읽었나?"

제국·군대·가부장제가 낳은 '위안부'

김경훈(이하 김) : "의외로 일본 군인의 절망적인 감정이 슬프게 느껴졌다. 위안부의 증언에 따르면 일부 일본 장교들은 위안부와 육체관계 맺는 걸 꺼려했다고 한다. 고향의 부인들 때문에 다른 여자를 품지 않으려 했고, 때로는 부인을 생각하며 울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원래 전쟁터가 아닌 고향에서 가족들과 단란한 일상을 보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군도 제국의 피해자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위안부가 피해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일제의 협력자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현지인들은 조선 위안부들을 일제의 일원으로 간주해 그들을 적대시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일부 위안부들은 전범들이 모인 곳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이외에도 위안부가 전쟁에 협력했다는 직간접적인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쩌면 위안부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아니었을까."

: "일본 군인과 동침한 뒤 위안부가 '멋지게 죽으세요'라고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제국이 동원한 일본군은 생명을, 위안부는 성을 일제에 맡겨야만 했다. 일제가 위안부에게 맡긴 역할은 성적인 위안과 더불어 이런 정신적인 위안까지 포함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 위안부는 준-일본인의 대접을 받았다. 일본군은 조선 위안부들이 비밀을 잘 누설하지 않는다고도 했고 조선 위안부들 자신도 '2등 시민'의 지위에 어느 정도 만족했다.

그런데 그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위안부들은 제국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도 일본은 공창과 사창을 두고 있었고 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300만 명에 가까운 주둔군을 해외에 뒀고 위안부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를 간파한 조선인 업자들은 공장 등에 취업시켜주겠다는 거짓말로 조선 여성들을 일본군 앞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박현진(이하 박) : "가부장적인 사회,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구조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위안부를 등장시킨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가능할 것이다. 조선 여성들은 아버지 혹은 삼촌 등 집안 남성으로부터 떠밀렸다. 떠밀린 여성들을 일본군에게 데려간 것도 조선의 남성 업자들이다. 조선의 가부장제가 여성들을 도와주지 못한 셈이다. 일제가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지만 우리 안의 협력자에 대한 이야기 없이 제대로 된 성찰은 불가능하다."

정대협보다 일본이 합리적이라고?

'눈물' 고인 '위안부 소녀상' 제67주년 광복절인 15일 낮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제1,035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을 형상화한 '위안부 소녀상'에 빗물이 '눈물'처럼 고여 있다.
▲ '눈물' 고인 '위안부 소녀상' 제67주년 광복절인 지난해 8월 15일 낮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제1035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을 형상화한 '위안부 소녀상'에 빗물이 '눈물'처럼 고여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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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위안부 문제는 제국·군대·식민지 그리고 가부장제가 얽혀있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피해자 측면에서만 이해해 왔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아래 정대협)가 과도하게 정치화했고 일본의 성실한 사죄도 외면해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 모두 진실을 볼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순수한 피해자로서 위안부를 기억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혐한류·재특회 등으로까지 이어졌다고도 주장한다."

: "1994년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면서 위안부 보상 문제도 급물살을 탔다. 1995년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처음으로 정부가 공식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됐다. 뒤이어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아래 아시아여성기금)도 발족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상한 적이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금을 받은 한국인이 61명으로 거부한 사람 60명과 거의 동률이라는 게 놀라웠다. 그 사과와 보상이 적절했는지는 따져야 할 문제다. 그러나 독도·위안부 등 일본과 관련된 문제에 우리가 분노로만 대응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 "기금이 90%가 정부자금이라는 점도 놀랍다.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로부터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형태로 보상이 이뤄진 과정도 합리적인 데가 있었다. 1965년 한일협정회담에서 개인청구권이 빠져 있었다. 당시 무라야마 총리는 자민당이 다수인 의회에서 일종의 차선으로 민간기금을 통해 한국에 보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민간기금의 외연을 취하고 있지만 90%가 정부자금이라는 건 실체는 정부보상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중요 요인이 1965년의 회담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개인청구권을 소멸시켰고 그 덕에 거의 모든 개인배상판결에서 위안부들은 패소했다."

: "1965년 한일협정에서 개인청구권이 소멸된 과정을 봐도 일본이 무책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 피해자에게 직접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은 한국 정부였다. 정부가 받을 금액을 높이고 한편으로는 이북지역의 청구권 문제를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이 아예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는 듯 대응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일본이 극우화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예를 들면 한 위안부는 자신이 일본군에 끌려간 과정을 두고 자꾸 말을 바꾼다. 나이는 어려지고 강압적 상황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증언이 바뀌는 거다. 일본 입장에서는 충분히 반발심이 들 만하다."

: "하지만 저자의 설명대로 우리의 대응이 일본의 극우화를 야기했다는 설명은 좀 부족하지 않나.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 스스로도 과거사 청산이 잘 안 됐다. 패전 후 바로 소련-중국-북한에 대응하는 한국-미국-일본 공조라는 냉전체제에 편입되면서 과거사 정리는 뒤로 밀렸던 것이다.

저자는 정대협의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적 성향이 강해진 것도 위안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요인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 들어 정대협은 위안부를 민족문제로 간주하고 북한과 연대를 시도하기도 했다. 당사자 문제에서 사회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들이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다는 이유로 진정성을 비판하고 나선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이 정당한지는 의문이다. 마치 한국 경찰에게 시리아 사태를 책임지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위안부에서 미군부대 기지촌 여성까지

 1944년 중국 윈난성에서 미군이 촬영한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들 모습
 1944년 중국 윈난성에서 미군이 촬영한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들 모습
ⓒ US SIGNAL COR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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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를 낳은 제국-식민지 구조와 정대협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종합적인 평가를 내려 보자.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상당 부분 수정됐음을 느꼈다. 또 위안부가 미군기지의 기지촌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다."

: "불편하긴 했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넓어진 것 같다. 또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분노로 표출하는 게 올바른 대응 방식인지 고민하게 됐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후반부에 집중되는 정대협에 대한 비판이다. 정대협은 저자의 주장에 대해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확실하게 논박을 해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 "비슷한 맥락에서 정대협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저자는 '정대협의 활동에 어린 학생들이 대거 동원되는 상황은 극히 우려스럽다'고까지 하는데 정대협이 그렇게 문제점만 있는 조직일까.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준 공도 있지 않을까. 정대협 비판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는 하지만, 정대협의 공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어 균형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위안부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 이를테면 제국의 일원으로서 전쟁의 협력자의 모습을 보여준 전반부는 인상적이었다. 책을 보면서 제국의 가장 무서운 점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는 점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제국주의는 일본군이 피해자로, 위안부가 가해자가 되는 역설과 혼란을 만든다. 하지만 민족 감정의 과잉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하기 어렵다."

: "민족 감정은 일관성 없이 작용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미국 기지촌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그녀들이 기지촌 여성이 되는 과정은 제국의 위안부가 되는 과정과 대동소이했다. 그녀들은 제국의 위안부들과 마찬가지로 가난 때문에 기지촌 여성이 됐고 '성적 위안'이라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지촌 여성을 기리지 않는다. '해방되자마자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된 냉전체제에 편입되면서 한국은 미국의 횡포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는 필리핀·페루 여성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대체했다고 한다. 더 가난한 상황에 놓인 여성들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군대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구조가 남아있는 셈이다. 이렇듯 위안부는 제국주의와 함께 시작됐지만 냉전체제를 지나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있다. 그렇다면 위안부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여성 문제가 아닐까. 만만치 않고 민감한 주제지만 현재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서 얻을 교훈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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