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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많은 절터가 있는데 답사객들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한 번 이상은 찾는 절터가 바로 남한강 유역의 넓은 절터들이다. 그 중 가장 알려진 곳이 바로 고달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 등이다.

고달사지는 넓은 절터에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를 대표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석조대좌(보물 제8호) 등이 있다. 입구에는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으며, 가장 먼저 만나는 석조(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는 물을 담아 두기 위한 시설이며, 석조의 중앙에 있는 배수구가 남아있다.

고달사지는 넓은 절터가 잘 정비되어 있다.
▲ 고달사지 전경 고달사지는 넓은 절터가 잘 정비되어 있다.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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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대좌(보물 제8호)는 불상은 없어지고 대좌만이 자리에 휑하니 남아 옛 법당을 지키고 있다.

석조대좌
▲ 석조 대좌 석조대좌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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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는 이수의 제액부에 주인공이 음각되어 있고 비문이 전하고 있어 건립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비좌는 면석부에 구름무늬가 가득 조각되었으며 상부에는 연화문이 배치되었다. 제액부는 앞면에 구름문을 사각형으로 구획하여 마련하고 그 안에 탑비 주인공을 음각하였다.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 원종대사혜진탑비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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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액 좌우에는 각각 1마리의 용이 받치는 모습이다. 인근에는 또 다른 귀부가 있는데 머리가 없어졌으나 조각 수법은 다소 우수한 편이다.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 원종대사혜진탑비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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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은 거리를 조금 멀리 하고 떨어져 있는데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전형적인 8각 원당형 부도로, 꼭대기의 일부 장식 조각을 제외하면 잘 남아 있다.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 고달사지 승탑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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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몸돌)에는 감실의 열쇠, 창문, 사천왕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수법이 아주 우수하다.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은 탑신은 4면에는 문(門) 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이 새겨져 있다. 이제 여주를 벗어나 강원도 원주시로 간다.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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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돈사지는 잘 정비된 넓은 절터인데 그 규모가 어마하다. 도로변에서 돌계단을 오르니 넓은 터에 사찰터가 펼쳐진다. 입구에는 수령이 1000년은 넘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입구에는 예전 폐교된 곳에 당간지주 한 구가 남아 있으나 수풀에 가려 잘 알아보기 어렵게 방치되어 있다.

폐교된 곳에 당간지주 한구가 남아 있다.
▲ 거돈사지 당간지주 폐교된 곳에 당간지주 한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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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 북쪽의 보물 제750호인 삼층석탑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 앞에는 배례석 있고 법당터에는 파손이 심한 불상대좌가 남아있다.

 삼층석탑은 잘 남아 있다.
▲ 거돈사지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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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동쪽으로는 보물 제78호인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는 귀부 위로 비몸을 이수를 얹은 모습으로, 귀부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귀갑 무늬는 정육각형에, 육각형 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 하였다.

 원공국사승묘탑비
▲ 원공국사승묘탑비 원공국사승묘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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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탑비와 함께 국보 제190호 원공국사승묘탑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야외 뜰 안에 옮겨져 있고 원 위치에는 그 모형이 세워져 있다.

거돈사지를 나와 부론면 법천리에 법천사지를 찾아갔다. 법천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한 곳이다. 대표적인 석조물로는 1085년(고려 선종 2)에 건립된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호)가 있다. 탑비 옆에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이 있었으나 현재는 경복궁 뜰로 옮겨져 있다. 이외에도 불상 광배, 배례석・연꽃무늬 대석・석탑재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석조물들이 터에 남아 있다.

법천사지
▲ 법천사지 법천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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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터는 2001년에서 2005년에 걸쳐 실시한 발굴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 터 19동과 우물 터 3곳, 석축 및 담장 유구, 계단 터를 발굴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당간지주(강원 문화재자료 20호)가 남아 있어 오랜 세월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이제 걸어서가는 길도 조성된 듯 한 흥법사지로 간다.

당간지주(강원 문화재자료 20호)
▲ 법천사지당간지주 당간지주(강원 문화재자료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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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법사는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는 염거화상탑(국보 제 104호)과 석관(보물 제 365호)이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흥법사지 삼층석탑
▲ 흥법사지 삼층석탑 흥법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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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는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제 464호). 진공대사탑비(보물 제 463호)만이 남아 있다. 석탑은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 있다. 진공대사탑비는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 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진공대사탑비
▲ 진공대사탑비 진공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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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정된 비석 표지석은 인근 살구나무 예술촌에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우연히 둘러본 이곳에서 예전 표지석을 찾은 셈이다. 넓은 절터들에서 그 당시의 건물도 상상해 보고 예전의 역사 사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워낙 알려진 절터들이라 표지판 등 이정표도 잘 되어 있으며 정보도 넘쳐난다. 현장에서의 감흥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나 언제 찾아도 무한한 상상을 자극 할 수 있는 그런 장소들이다.


태그:#고달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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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구석진 곳에 우리문화를 찾아서 알리고 문화관련 행사를 좀 더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하며 앞으로 우리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나아가려고 합니다. 괌심분야는 역사유적, 석조조형물과 민속,고건축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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