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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독일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
 독일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
ⓒ 위키피디아 공용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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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19세기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다. 1871년 독일통일을 무력에 의한 통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독일통일을 이룬 견인차는 '독일판 개성공단'이었다.

독일통일을 무력 통일로 오해하게 되는 첫 번째 이유는, 통일의 주역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년)의 별명이 철혈재상이라는 점에 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 9년 전인 1862년 독일연방의 일원인 프로이센왕국의 총리가 된 직후에 가진 의회 연설에서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한 것이 아닌 철(鐵)과 혈(血)로써만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철' 즉 강철 무기와 '혈' 즉 전쟁으로 시대의 주요 문제 즉 통일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는 발언을 근거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비스마르크를 철혈재상이라고 부르고, 독일통일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총리 취임 당시까지만 해도 비스마르크가 말을 함부로 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전의 외교관 생활 때도 그랬다. 그는 일단 입으로 내뱉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이 점은 그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민족 외부에 대해서만 사용된 '철혈정책'

962년 이래 독일 땅에는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이 존재했고, 그 아래에 수많은 제후국이 존재했다.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 1806년 해체됐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 독일 땅에는 독일연방이 등장했다. 독일연방은 35개의 제후국과 4개의 자유도시로 구성된, 매우 느슨한 연합체였다. 연방정부 없이 연방의회만으로 구성됐으니, 통일의 전(前) 단계라 할 수 있겠다.

이 독일연방의 소속 국가 중 하나가 바덴 대공국이었다. 공(公) 급의 제후가 다스리는 국가라 하여 그렇게 불렸다. 이 바덴 대공국의 정치인 중 하나가 로겐바흐(1825~1907년)라는 자유주의자였다.

로겐바흐는 비스마르크가 총리가 되기 2년 전인 1860년 프로이센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인 막시밀리언 볼프강 둥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교관 비스마르크는) 무례함으로 정치 경력을 쌓으려는 원칙 없는 융커(지주)"라고 비판했다.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는 비스마르크의 습관을 비판하는 편지였다. 

로겐바흐의 편지에서도 드러나듯이, 총리 취임 당시까지만 해도 비스마르크는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스타일이었다. 따라서 총리 취임 당시의 철혈정책 발언만으로 그의 독일 통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의 통일 과정에서 철혈정책이 전혀 동원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20세기 독일 재통일의 주역인 헬무트 콜이 총리에 취임할 때 그랬던 것처럼, 비스마르크가 취임할 때도 프로이센이나 독일연방 내부의 대체적인 반응은 '얼마 못 갈 거야'였다. 말을 함부로 하는 정치인이 총리 자리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그가 그로부터 30년간이나 그 자리를 지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통일독일인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 즉위식. 황제로 추대되는 빌헬름 1세(연단의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와 비스마르크(연단 밑에서 흰 옷).
 통일독일인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 즉위식. 황제로 추대되는 빌헬름 1세(연단의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와 비스마르크(연단 밑에서 흰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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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을 무력 통일로 오해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비스마르크가 통일 과정에서 세 차례나 전쟁을 치렀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그가 전쟁을 치른 상대방은 통일의 파트너가 아니라 통일의 장애물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 독일연방의 북쪽에 있는 덴마크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을 통해 그는 독일연방과 덴마크의 접경지대에 있는 슐레스비히 및 홀슈타인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해결하고, 북쪽에서 독일 통일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덴마크를 사전에 제압했다.

2년 뒤인 1866년,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의 남부에 있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더불어 독일연방을 주도하는 국가였지만, 오늘날과 달리 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였다. 주로 게르만족으로 구성된 독일연방의 여타 국가에 비하면, 오스트리아는 독일적 색채가 비교적 약한 나라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연방 내에서는 오스트리아를 통일독일에 포함시키자는 '대(大)독일주의'보다 오스트리아를 빼고 통일하자는 '소독일주의'가 훨씬 더 강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고 독일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그는 남쪽에서 독일 통일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고, 독일연방 북부에 있는 국가들을 끌어들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했다.

1870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는 독일 통일을 가장 싫어하는 나라였다. 이로써 비스마르크는 서쪽에서 독일 통일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를 꺾은 그는 1871년 독일연방 남부에 있었던 국가들까지 끌어들여 독일제국을 결성했다. 독일 통일은 이로써 완성됐다.

이런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벌인 상대방은 통일의 파트너가 아닌 통일의 잠재적 적들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군사력으로 동족을 합친다는 발상이 들어 있지 않았다.

참고로,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위해 북쪽·남쪽·서쪽만 제압하고 동쪽을 제압하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쪽의 폴란드는 이미 1795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기 때문에, 비스마르크 당시에는 동쪽 국가가 독일 통일을 방해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위에서, '철혈정책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스마르크는 민족 외부에 대해서는 이 정책을 구사했다. 그의 철혈정책은 최신식 무기인 강철 대포에 의한 전쟁 수행으로 가장 극명하게 표출됐고, 이것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만 사용됐다.

당시까지 유럽에서는 청동 대포를 사용했다. 강철 대포가 첫 선을 보인 것은 1851년 런던 박람회 때였다. 비스마르크는 이 기술을 신속히 도입하여, 청동제 대포가 주력인 프랑스군을 제압했다. 이렇듯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은 독일민족 외부와의 관계에서만 사용됐다. 

민족 내부에서 활용된 '경제협력정책'

개성공단 출입차단 127일째인 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들이 개성공단 정상화를 염원하며 서명하고 있다.
▲ 개성공단 정상화를 염원하며 개성공단 출입차단 127일째인 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들이 개성공단 정상화를 염원하며 서명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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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족 내부에 대해 비스마르크가 구사한 통일정책은 경제협력정책이었다. 오늘날의 남북한 사이에 경제협력을 상징하는 개성공단이 있다면, 당시 독일에서는 그것을 상징하는 관세동맹이 있었다.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로 형성된 관세동맹을 계기로, 독일연방 안에서는 수출입 관세가 폐지되면서 경제적 일체성이 강화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관세동맹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통일정책을 추진했다. 독일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독일 외부에서 어떤 충격이 가해져도, 그는 '관세동맹' 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고자 했다.

'개성공단'과 유사했던 관세동맹은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강대국들이 은근히 통일을 방해하는 속에서도 독일연방 국가들이 비스마르크와 함께 통일로 달려간 것은 관세동맹이 주는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연방에서는 상공업자나 지식인들은 통일을 지지했지만, 봉건제후나 지주를 비롯한 구세력은 통일을 꺼려했다. 하지만 봉건제후나 지주들까지도 비스마르크의 통일 작업에 제동을 걸지 못한 것은 그 자신들도 관세동맹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사람이었다. 총리 취임 당시 "얼마 못 갈 거야"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치적으로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가 가진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라면, 프로이센왕인 빌헬름 1세의 신임뿐이었다.

그러나 빌헬름 1세의 신임은 항상 불안정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툭 하면 사표 제출을 통해 왕의 신임을 재확인해야만 했다. 이 불안한 관계가 30년간이나 유지되고 그 기간 내에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독일연방 내의 경제협력을 보호함으로써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만약 비스마르크가 관세동맹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그렇게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별다른 기반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구설수에 시달리던 그가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관세동맹'을 지켜내고 이것을 중심으로 통일을 추진함으로써 독일 국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독일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가 철혈정책으로 통일을 성취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독일민족 외부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민족 내부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관세동맹으로 표현되는 경제협력의 강화를 통해, 전 독일인들이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는 진정한 식구가 되도록 만들었다.


태그:#개성공단, #독일 통일, #비스마르크, #독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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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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