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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청소년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청소년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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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쇠고기, MB 너나 드세요."

5년 전 고3 때, 내가 촛불집회에서 들었던 플래카드 내용이다. 당시 광우병 미 쇠고기 수입 논란으로 전국적으로 촛불 시위가 일어났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점심시간에 관련 플래카드를 만들었고,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면 야자(야간 자율학습) 수업은 빼먹고 부산 서면 시위 현장으로 나가기를 반복하며 그 해 여름을 보냈다.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5년 전의 기억

처음에는 친구들과 가면을 만들고 촛불집회에 나가는 자체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차츰 집회에 참여하며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어른들은 고등학생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이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공부 안 하고 시위하러 다니는 나 때문에 부모님은 걱정을 하셨지만, 한편으론 소신껏 행동한다고 기특해 하셨다.

물론 기분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소 가면을 들고 교문 밖을 나가던 중에 학교 주임 선생님께 걸리면 교무실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호된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교육청에서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고교생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했다. 야자 빼먹는 것도 죄였지만,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건 더한 죄였다.

"야, 꼴통. 닌 커서 뭐가 될라꼬 그라노. 으잉?"
"신문기자 할 건데요."
"니 그라다가 좋은 대학 못 가면 기자고 뭐고 없데이."

그로부터 5년 뒤, 선생님 말씀대로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건가 좋은 대학에 못 갔다. 현재 백수다. 촛불과는 멀어졌지만 취업 준비와 가깝게 지내는 중이다. 지금도 기자가 꿈이라 시사 이슈는 항상 가까이 두고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나의 하루는 '국정원'으로 시작해서, '국정원'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구독하고 있는 <한겨레>를 펼치면 1면부터 국정원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1면 톱이 아니더라도 대개 국정원 관련 기사가 꼭 있다. 필사할만한 칼럼을 찾아보면 또 국정원 이야기다. 7월 한 달 동안 필사한 칼럼 절반이 국정원에 대한 글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잠 자기 전에 듣는 시사 팟캐스트가 남아 있다(내가 주로 듣는 건 <오마이뉴스> 팝캐스트 '김종배의 이슈 털어주는 남자'다). 여기에도 국정원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하루종일 국정원을 잡고 사는데도 아직 촛불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책상에만 앉아 있을 뿐이다. 집회가 있을 때면 놀러가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했던 내가 변한 것일까?  동네 아줌마들한테도 촛불을 건네며 시위 동참을 권하던 내가 말이다. 고등학교 선생님 말씀대로 이제야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우리는 더 화낼 필요가 있다 

7월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진상규명 촛불문화제'에 수많은 참가자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시청광장 가득 메운 촛불시민 7월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진상규명 촛불문화제'에 수많은 참가자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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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난 대선부터 이야기가 나온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책을 반복하는 민주당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피로감은 더 쌓인다. 대선 패배 뒤에도 민주당은 그대로였다. 야성을 잃은 무능한 야당에 불과했다. 그 사이 새누리당은 NLL과 대선 불복을 무기로 삼아 역공에 나섰고, 오히려 새누리당의 공격이 사건을 속속들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먹히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계속 60%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조중동 등 보수신문은 물론이고, 공중파 방송사들조차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에 대해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보다는 '물타기' 보도를 하거나 촛불집회에 수만명이 모여도 뉴스로 다루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에 분노했던 나도 점점 지치고 화가 났던 것 같다. 민주당의 무능함은 곧 나의 무능함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상황에서 촛불을 든다 해도 뭐가 바뀔 게 있을까 싶었다.

"아저씨. 요새도 손님들 정치 얘기 많이 해요?"
"많이 하죠."
"국정원 말 많던데. 어때요?"
"그게 우리랑 상관이 있나."

나는 택시기사 아저씨랑 대화 나누는 걸 즐긴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세상 이야기에 밝다. (새누리당 지지가 강한 부산인 점을 감안해도) 택시기사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슈화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 일에도 바쁜데 국정원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둘까. 언론의 보도가 2008년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때보다 뜨겁지 않다.

사람들의 관심이 꺼져가고 있는 동안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작업으로 의심 받는 글들은 지워지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일, 유신헌법 초안을 만들었고 1992년 민자당 김영삼 후보 당선을 위해 지역 기관장이 모인 '초원복집' 사건의 장본인인 김기춘 전 의원을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지난 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3만여 명의 시민이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의혹 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에 참가해 촛불을 들었다. 깨어있는 시민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30-40년 전으로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일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태그:#국정원,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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