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가 좀 전에 돌아가셨어"
"……."
"너무 마음 아파하지마. 오래 고생 안하시고 편히 임종하셨어."

그렇게 동생의 전화를 통해 전해 온 엄마의 임종, 그것이 엄마와 나의 영원한 헤어짐이라니, 아내는 일산에서만도 3년째 병원생활, 엄마는 울산에서 5년째 병원생활, 내가 사랑하는 두 여자들의 병원생활이 일상이 되어 살아가던 어느 날 일어난 이별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 발만 동동 구를 뿐...

나는 경상도 남자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엄마가 어머니로 바뀌어 불러지지 않는 고지식한 각인. 비단 호칭만이 쇠판에 새겨진 고정이 아니라 엄마와 내가 공유한 삶의 파편들도 깊이 새겨진 불변이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하도 엄마를 힘들게 하던 아버지는 잘나가던 마을의 도련님에서 몰락한, 전쟁 후 내리막을 달린 가장이었다. 아주 오래 전 인천경찰전문학교를 나오고, 6·25때는 장교로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가 되어 우리에게 명예와 보상을 남겨주셨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말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잘 나갔던 남정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큰소리만 남은 백수였다.

집안 사정으로 살던 집도 한쪽 방에 세 들어 살던 사람에게 거져 줘버리고, 막내가 불과 태어난지 100일도 안 된 시기에 서울행 고속버스에 모두 몸을 실었다. 이후 계획과 어긋난 꿈은 그냥 몰락하는 집안들의 흔한 코스 그대로였다. 빈 손, 덜그럭거리는 양푼 몇 개씩만 들고 도로 귀향을 했다. 금의환양이 아닌 양푼환양.

그날부터 엄마는 아버지를 먹이고 아직 학생이던 동생들 셋을 거두는 가장이 되어 추우나 더우나 시장에서 좌판으로 한 가정을 끌고 가야 했다. 내 위 형은 힘든 공장생활로 번 돈을 꼬박꼬박 송금하는 효자 맏아들이 되어 야금야금 세월을 까먹고, 나는 공부 바람이 들어 2, 3년씩 소식 두절이 되는 불효 둘째 아들이 되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효자였지만 내 인생이 시들어가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선언을 해버렸다.

명절이면 가끔 들르는 집에서 보내는 며칠은 괴로웠다. 밤새 엄마를 괴롭히는 아버지 소리가 듣기 싫어 이불로 귀를 막고 밤이 새도록 기다리는 그 시간들이 악몽이었다. 너무 긴 시간이었다. 마치 한밤이 삼사일 같은. 한 번은 같이 도망 가자고 보따리를 들고 엄마와 기차역에 나가 하루 종일 앉아만 있다 들어왔다. 기차는 번번히 보내버리면서. 엄마는 남은 3명의 동생이 불쌍해서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이유 외에 아버지가 찾아낼까 무섭기도 했고, 아버지 없이 살아야 할 삶도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도 모진 것은 사람이고, 사람보다 무서운 건 일초도 늦어지는 법 없이 흐르는 시간이다. 시간이 모여 세월이 되고, 아버지는 직장암으로 투병하다가 서울로 옮긴 임대아파트 15층에서 끝내 몸을 던져 한많던 인생을 마감지어 버리셨다. 내가 집에 들르고 떠난 이틀  뒤에.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 하신 엄마... 마침내 초기 치매 증상까지

엄마는 아버지가 그렇게 떠나신 후 몸살만으로 끝나지 않고 온갖 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작 장례기간 내내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시던 엄마는 나중에 산소에 가서야 자기를 데려가지 않은 아버지를 울면서 부르기도 했다. 많이 외롭고 서러웠던 사후 생활이셨나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지겨워 죽을 것처럼 사셨는데도, 그건 고스란히 몸이 말해주었다. 처음에는 영양실조로 인한 결핵, 나중에는 당뇨, 파킨슨에 위암 진단이 나오고 마침내는 초기 치매까지.

엄마와 아내, 그리고 딸, 아버지 떠나신 후 시골 산 아래 집에서 모시며 살던 시절 세 사람은 이렇게 운동복 바지 입고, 커피포트에 음료수 넣고 산으로 도라지 더덕, 둥굴레 고사리 캐러 다녔다. 다시는 한 장의 사진 안에 함께 찍을 수 없게 된 그 시절.
▲ 내가 사랑한 세 여자 엄마와 아내, 그리고 딸, 아버지 떠나신 후 시골 산 아래 집에서 모시며 살던 시절 세 사람은 이렇게 운동복 바지 입고, 커피포트에 음료수 넣고 산으로 도라지 더덕, 둥굴레 고사리 캐러 다녔다. 다시는 한 장의 사진 안에 함께 찍을 수 없게 된 그 시절.
ⓒ 김재식

관련사진보기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게 하고, 병도 회복이 되기를 바라며 한때는 충주에서 한 집에 살며 나물 캐고 채소 키우며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시골집에서 엄마의 당뇨와 결핵을 치료하며 모시는 것이었다. 여러 며느리 중 가장 편하다고 하시던 며느리인 아내와 늘 특별한 애정을 더 주시던 둘째 아들인 나와 살겠다고. 그러나 병은 집에서는 감당 못할 만큼 악화되어 울산시립병원에 보내드려야만 했다.

불과 몇 년 안 계셨지만 엄마가 계시던 자리는 이후 나를 참 슬프게 하는 빈 자리가 되었다. 일을 다녀오면 대문 앞 텃밭에서 모자를 쓰고 일하다가 나를 반겨주시던 자리도 비었고, 맛있는 과일이나 음료수를 놓고 웃으며 티비를 보던 자리도 비어 침묵만 남았다. 같이 차를 타고 구경을 가던 박달재와 다슬기를 잡던 큰 냇가에도 더 이상 엄마는 없었고, 같이 있던 조카 아이들을 말로 혼내시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안 지나 이번에는 아내의 난치병으로 나는 또 병원에서 24시간 간병에 붙들리면서부터는 엄마는 전화로밖에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병원 복도에서, 치료실에서 전화로 간간히 하는 말은 '미안해 엄마, 좀만 더 버티고 기다려줘' 그게 전부였다.

그날 아침, 군무원으로 멀리 강원도에서 근무하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아무래도 어머니가 안 좋아지셔서 울산으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못 갈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혹시나 싶어 연락했어, 갈 수 있으면 들러서 가려고, 가기 힘들지?"
"아무래도, 바로 사람 구하고, 집사람을 맡기고 내려가긴 너무 복잡하고 중증이라…."
"그럼 가서 연락할게."

그렇게 전화는 끊고 종일 불에 데인 사람처럼, 심한 위궤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동동 구르고 안절부절 하며 보내던 중 오후 3시에 마침내 소식이 온 것이다. 갑자기 몰려오는 숱한 미안함들, 비닐하우스에서 땀을 쏟으며 일해주고 모은 돈을 고무줄로 묶어서 형제들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쥐어주던 엄마의 무기한 무이자 대출. 난 그걸 같이 살 때 오래 사시라고 한 달에 만 원씩 갚아드렸다. 일부러 월급날이면 손에다 꼭꼭 쥐어드렸다. 이달치 빚 상환이라며, 나중에 병원에 가실 때 잔금을 일시불로 드려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 영원한 빚이 되고 말았다.

마음은 미어지는데 눈물은 한 방울도 안 나오고. 어쩌면 운다는 것조차 할 자격이 없는 아들이다 싶었다. 무슨 아들이 엄마가 그 마지막 몇 년을 병상에서 힘들게 보내는데 명절에도, 생일에도 얼굴 한 번 안 보여주었다는 말인가. 임종 연락이 와도 가보지도 못하는 그게 무슨 아들이라고.

전화 몇 통으로 형제들에게 대신 "미안하다, 미안하다" 엄마에게 못한 말 대신하고 병원 근처 공원으로 숨어들어갔다. 위로하겠다고 밤 열두 시에 친구 둘이 찾아왔다. 고맙게도, 그 친구들과 새벽 두 시가 되도록 산길을 걷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보며 커피만 마시고.그렇게 고마운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다시 또 밤 길거리로 나가서 텅 빈 도시의 아스팔트를 마냥 걸었다.

"엄마, 내가 얼마나 미안하고, 빨리 엄마에게 가봐야지 하며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알지? 나 울면 감당 못해서 안 울래."

국가유공자인 아버지를 따라 대전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3일째 안장 시간, 아내를 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잠시 맡기고 일산에서 현충원으로 달려갔다. 겨우 영정 사진 보고 무릎 꿇고 기도 한번 올리고 서둘러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엄마, 같이 기억하는 어려웠던 시절, 난 모르는 엄마 혼자의 기억들 다 잊고 편히 쉬세요!"

며칠이 지나도 몽롱한 침묵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이러다간 눈물도 없는 3년상 치르겠다 속으로 염려하며 엄마에게 편지하나 썼다.

참 많이 울었던 엄마, 내가 어른이 되면 꼭 행복하게 해드릴 거라고 아버지에게 혼나는 밤마다 베게로 귀 막고 속으로 다짐했지만, 정작 어른이 되니 왜 그리 할 일이 많아지는지. 지키지 못한 약속에도 내 생일날 마다 아내보다 더 미역국 먹었냐? 물으시며 챙기던 엄마.
 참 많이 울었던 엄마, 내가 어른이 되면 꼭 행복하게 해드릴 거라고 아버지에게 혼나는 밤마다 베게로 귀 막고 속으로 다짐했지만, 정작 어른이 되니 왜 그리 할 일이 많아지는지. 지키지 못한 약속에도 내 생일날 마다 아내보다 더 미역국 먹었냐? 물으시며 챙기던 엄마.
ⓒ 김재식

관련사진보기


두 번째 탯줄을 끊고 소천하신 엄마에게.

나 태어날 때 기다리며 들여다보시며 몸의 탯줄을 끊으신 어머니, 이 세상에 온 생명을 홀로 반겨주신 어머니가 오늘은 떠나셨습니다. 나 태어난 후 50여년을 마음 졸이시며 늘 주시기만 하다가 이제 마음의 탯줄도 끊으셨습니다.

누구의 한이 내게로 왔는지 무슨 잘못이 내게 많았는지 발이 묶여 임종 소식을 듣고도 못갑니다. 올 때는 어머니가 반겨주셨으니 가실 때는 내가 배웅 해드리는 게 도리인데 그리 못합니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못 가고 임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도 못 갑니다. 사람 구실을 못하고 아픈 중입니다.

또 한 명의 사랑하는 여인 아내가 난치병으로 침대에서 몇 년을 등을 붙이고 두시간 이상을 벗어나기 힘들게 하는 중이라 나보다 더 슬피 우는 아내를 보기만 합니다. 오고 가는 생명 내 힘으로 안 되는 거 벌써 경험하고 이미 받아들였지만 도리가 아님에 가슴 찢으며 피 흘립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내일 밤도 지나고 그 다음 날도 지나면 흘러간 강물처럼 모든 게 지나가겠지요? 지금도 세상은 꿈쩍도 않고 하늘 어디 새는 곳도 없고 주위 사람들 얼굴색 변한 사람 하나 없이 웃고 먹고 끔찍하도록 아무 일 없는데.

고개 들어 올려 본 하늘 저 어디쯤 이승의 질기던 고통 벗어놓고 휘적거리며 가시는 어머니 보일라나 해보지만 하늘은 흐린 채 듬성 구름만 무심하게 흐릅니다.

어머니 부디 평안하소서 사랑할 줄 몰라서 못해드리고 알만하니 형편 안 되어 못해드린 불효자식 용서하시고요. 정말 어머니 사랑했어요. 아시지요?

이천십일년 삼월 스물아홉날에 어머니 보내드립니다.
- 2011.3.31. 아들

한때는 내가 사랑을 받기만 했던 여자, 어머니. 마지막은 내가 사랑해주고 돌려주리라 마음먹어도 기다려주지도, 돌려받지도 않는 여자. 빈 자리만 남기신 어머니. 보고싶다.

덧붙이는 글 | [공모] '있다 없으니까'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태그:#엄마, #빈자리, #불효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