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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한참을 앉아있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으면 이성도 제대로 작동하는 않는 것이 우리 인간 두뇌의 원리라고 나는 배웠다. 역시 한참을 앉아 있어도 머릿속이 먹먹해지는 것은 지금 나에게 밀려오는 분노와 슬픔을 가만히 밀쳐두지 못한 탓인가.

4년 전 노무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매우 비현실적인 슬픔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그는 나에게 너무 갑작스럽다. 매년 그의 기일이 되면 노무현은 넘쳐나지만 여전히 가슴 한 켠의 아릿함이 새삼스러운 것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갑작스러움 때문인가. 아니면 갑작스러움 이전에 우리에게 깊이 다가왔던 자전거와 밀짚모자와 막걸리와 논두렁, 그리고 봉하마을 초승달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노무현은 죽은 지 4년 만에 다시 정쟁의 한복판으로 매우 저질의 정치쇼를 위해 불려나왔다. 아니 끌려나왔다. 국정원이 뽑아준 대통령과 국정원이 살려낸 정당은 국가기관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행위를 애써 감추고 호도하기 위해, 노무현을 이용하여 '물타기' 하면서 국민들을 '물 먹이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아직 노무현을 버릴 수 없는 이유
▲ 유현의 <노무현의 머릿속> 우리가 아직 노무현을 버릴 수 없는 이유
ⓒ 두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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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그들은 노무현을 '소비'할 때 참으로 당당하다. 불법과 탈법 속에서도 노무현을 들먹이면 당당해지는가 보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마치 노무현을 끌고 들어오면 어떠한 범죄행위도 용납이 된다는 듯이.

나는 이미 고인이 되어 모두의 가슴 속에 젖어든 노무현이 또다시 끌려나온 이유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유현이 쓴 <노무현의 머릿속>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고 정립하고 싶었다. 길을 잃으면 처음 출발한 그곳으로 돌아가라 했으므로.

<노무현의 머릿속>은 2008년 대통령직을 퇴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때부터 생을 마감했던 2009년 봄까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국민들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했던 노무현의 생각이 담겨 있는 <진보의 미래>(2009년)를 통해 노무현이 남긴 사상의 궤적을 추적한 책이다.

경쟁이 공정한 사회를 위하여

노무현은 '경쟁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승자독식사회의 폐해를 막고자 승자도 패자도 없는 사회를 구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았다. 다만 과도한 경쟁이 삶을 메마르게 한다고 생각했다. 경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패자를 완전히 버리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목표들이 인정되는 사회를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노무현은 개탄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노력하느냐보다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가 더 중요해 보인다.(본문 27쪽)

이 말은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기득권과 특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에게 대항하여 틈을 내려 했던 노무현의 의중이 엿보이는 말이다. 그래서 '부모와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경쟁, 성공할 수 있는 교육, 패자에게도 가혹하지 않은 사회, 승자와 패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노무현은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구상은 결코 과격하지 않으며 실용적이고 유연하다. 이는 그가 희망과 불안을 함께 품고 있었기에 가능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희망만 있는 자는 과격하기 마련이고, 불안만 있는 자는 포기하기 마련이다.

노무현이 바라는 나라는 '다수를 위한 국가'였다. 따라서 노무현은 자본주의냐 수정주의냐, 사회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체제 논쟁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경제는 다른 가치들과 공존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자유경제만능주의에 감염되면 경제만 생각하게 된다고. 그래서 경제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고. 정치도 사회도 인간도 모조리 경제적 합리성만으로 설명하고 작동시키려 한다고.

노무현도 경제가 다른 모든 가치들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들과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은 결코 경제적 이익과 손해만 따지고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합리와 이성뿐만 아니라 울분, 욕망, 의지로 움직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경제적 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은 매우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가 가장 활짝 피어나는 순간은 시민의 결단이 독재를 물리치는 순간이다.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은 민주주의에 적합하지 않다. 민주주의자는 때때로 경제적 합리성과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절차적 정의와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돈과 경제에'만' 쏠리면 민주주의는 시들어버린다.(본문 46쪽)

아울러 자유와 평등의 관계에 대한 노무현의 생각은 확고했다. 즉, 지배는 극심한 불평등을 먹고 자란다. 지배가 있으면 자유가 속박된다. 그러므로 평등하여야 지배로부터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에서 자유가 나온다. 평등이 기본이고 우선이다.

노무현의 이러한 인식과 견해는 참으로 탁월하다. 나아가 그는 이런 평등한 사회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 사회를 대대적으로 뒤집기보다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관점에서 개혁과 복지정책을 탐구했다. 이것이 노무현이 복지를 강조한 까닭이다.

무지와 증오의 배설물, '빨갱이'

우리 사회의 빨갱이 병은 참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지난 2012년 대선 때 그 '점잖은' 문재인도 지독한 빨갱이였다. 노무현의 NLL 포기 발언 논란도 이런 빨갱이 병이 도진 것이었다. 그 탁월한 효과는 알다시피 입증되지 않았는가. 그 끈질긴 생명력은 분단을 극복하기 전에, 분단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이 있는 한, 또한 저열한 방법으로 정치를 오염시키면서 기득권을 지키려고 암약하는 세력들이 있는 한,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주의자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물론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공산주의와 진보의 차이는 무엇일까? 노무현은 버스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 혁명 이론이 뭐냐면, 버스 딱 세워놓고 몽둥이 들고 올라가서 '차주 내려와' 하면서 패고, '기사 내려' 하면서 패고, 확 끌어내버리고, '우리가 몰고 가자' 하고 빵 가버리는 거거든요. 진보라는 건 그게 아니고, '차가 좀 비좁나? 그래도 뭐 다 같이 가야 되는 사람들인데 타야 될 거 아이가? 우리도 좀 타자'(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근데 못 타게 하니까 '왜 못 타 인마, 김해 사람은 손님 아니냐?' 이러면서 올라타거든요. '김해 사람은 손님 아니야?' 그렇게 하고 막 밀고 가는 게 진보죠. 우리 진보. 요새 진보는 그 정도 얘기거든요. '나도 좀 타자' 이거죠. 그리고 나중에 운전평의회 할 때 '나도 운전평의회에 한 자리 끼자. 왜 니들끼리 코스를 마음대로 정하고 그래?' 이 얘기거든.(본문 74-75쪽)

이러할진대, '진보'나 '복지'를 빨갱이라고 덮어씌우는 행위는 무지와 증오심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정치적 배설물을 세상에 뿌리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래서 노무현은 '투표하는 순간에만 주인이었다가 투표가 끝나면 곧 노예로 돌아가는 국민(루소)'이 아니라 진실로 건강하게 깨어있는 주권자 시민의 성장을 갈구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시민의 생각만큼만' 가는 것이므로.

시민의 성장은 승자독식사회의 해체, 경제만능주의의 불평등 해소, 빨갱이 병의 해결로 이어질 것이기에, 이런 부당한 사회 속에서 잇속을 챙기던 세력이 노무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이런 두려움이 바로 '노무현 죽이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어떠한 사상적 도그마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다수가 행복한 사회를 염원하며, 철저한 민주주의로 남고자 했던 노무현에게 우리 사회가 정녕 이래도 되는 것인가, 되묻고 싶었다. 노무현이 정녕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인가. 알량한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무현을 이토록 함부로 조리돌림 해도 되는 것인가. 도대체 '그들'의 '새 누리(새로운 세상)'가 어떤 세상이기에 어쩌면 이토록 금도가 없을 수 있는 것인가. 거듭 묻고 싶었다.

노무현의 NLL 포기라는 질 낮은 소설을 배포하여 국민들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하고서 다시금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는 '그들'은 행복하겠지. 죽은 노무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덮고, 지역주의에 붙어 생명 연장을 꾀하면서, 낡고 후진 정치를 지키는 '그들'은 안도하겠지.

그러나 '그들'이 있기에,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하며 몸을 던졌던 노무현을 버리지 못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자는 누구라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자는 아무라도 극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자를 모멸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귀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덧붙이는 글 | <노무현의 머릿속>, 유현, 두더지, 2013년 4월 5일, 1만 원



노무현의 머릿속 - 우리가 아직 노무현을 버릴 수 없는 이유

유현 지음, 두더지(2013)


태그:#공정한 경쟁, #민주주의자, #평등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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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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