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는 가운데, 시국선언을 준비하는 중·고등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중고생 시국선언 "민주주의 무너지는 것 방관할 수 없다"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는 가운데, 시국선언을 준비하는 중·고등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입장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국정원 대선 개입 관련 '나는 분노한다' 한 번 써보라는 제안을 받고 별 고민 없이 수락했다. 계속 국정원 사태를 지켜봤기에 글쓰기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마감 직전까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나의 분노가 생각만큼, 혹은 기대만큼 크지 않다는 걸 알고 혼란스러웠다. 기자지망생으로서 꽤 당황스런 일이었다. 

이 글이 참회록이 될 줄은 몰랐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교수, 농부, 시민단체 등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과 집회가 이어져도 나는 촛불집회도 안 나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아직은 저항의 나이" 정도가 아니라 한창 저항할 20대인데도 말이다. 부당한 일에 항거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반성문 쓸 줄이야

졸업을 유예하고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는 나는 '언론사 취업 스터디 그룹'을 꾸려 친구 5명과 함께 공부중이다. 날마다 신문 6개를 검토하고, 쟁점을 가지고 친구들과 토론하고 논술을 쓴다. 그래서 누구보다(?) 국정원 사태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정치, 언론, 사회 등 여러 사안을 꼼꼼히 살피고 분석한다. 이어 사안의 원인과 해법을 두고 각자 의견을 개진한다. 모두 '언론고시'를 위한 일이다. 세상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아무리 복잡한 사안도 A4 한 장 이내로 요약할 줄 아는 능력. 기자에게 요구되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모든 세상일이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건 아니다. 논란이 이어지는 국정원의 대선개입 같은 일이 그렇다. 불법을 저지르고 뻔한 거짓말로 책임을 모면하려는 행태가 상상을 초월한다. 상식에 기초해 살아가는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국정원 사태를 외면하는 주요 방송사 등 언론사의 행태는 또 어떤가. 본질을 흐리고 사람들 시선을 분산시키려 NLL 등을 들고 나온 정부와 정치권을 바라보는 심정 역시 참담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얼만큼 분노하는지 글로 쓰려니 도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당혹감 속에서 '도대체 왜 이럴까?'를 생각해봤다.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니, 인정하기 싫은 위선이 보였다.

주변 기자 지망생들에게 국정원 사태에 대한 여러 의견을 물었다. 일단, 촛불집회에 나갔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신 나름대로 냉철하게(?) 현실을 판단하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알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여야가 국정조사에 합의한 시점에서 촛불을 드는 건 근본적 사태 해결에 방해만 되는 게 아닐까?"
"집회에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고 고맙지만... 내 할 일이 너무 많아."

이야기하면서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비슷한 처지, 같은 심정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내 가슴에 와 닿았던 말은 이거였다.

"막말로 '쪽 팔리지'... 하지만 쪽 팔린 시간 빨리 끝내고 직업적으로 나서고 싶어."

불의를 용납하겠다는 게 아니다. 기자가 되면 무언가 할 수 있으리라고 각자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국정원 이야기가 나오면 나와 친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고 말한다. 소속이 없고, 돌아갈 곳 없는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닥치고 공부나 한다.

핑계보다 참여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취업이라는 과제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 부와 권력, 명예를 바라는 건 아니다. 내 일과 글로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구경꾼일 뿐이고, 그래서 서글프다. 

13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20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정보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 3차 범국민대회'에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참여하고 있다.
▲ 서울광장 수놓은 수만개 촛불 13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20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정보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 3차 범국민대회'에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참여하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최근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에 나가봤다. 서울 광화문에서 '국정원 규탄, 민주주의 수호 촛불문화제'가 열린 지 꽤 되는 날이었다. 여름 장마가 시작돼 비바람이 세게 분 탓인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학생, 일을 마친 직장인,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 등 시민 100여 명이 모였다. 사람들은 강풍에 우산이 뒤집히고 폭우로 옷이 다 젖어도 광장을 지켰다. 

성남에서 왔다는 31세 남성이 자유발언을 하러 앞으로 나왔다. 그는 "광장을 지켜주는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나 역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내 가슴을 두드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줘서 말이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알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외치는 시민이 없었다면 세상은 좋아지지 않았을 거다. 

그날 현장 이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훗날 기자가 되어 기사만 잘 쓰면 내 책임을 다 하는 것이라며 나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닐까?'
'언제든 광장에 나서 줄 시민들 뒤에 숨어 고상하게 책과 글로만 민주주의 수호를 되뇌고 있는 게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닐까?'
'기자가 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로운 언론 환경이 보장되지 않으면 '좋은 기자'의 활약에는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MB정부 시대의 언론인 해직 사태가 그걸 증명한다.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건 나와 친구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다.

"바쁘다"는 핑계를 찾기에 앞서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려는 노력해야 겠다. 어쩌면 그곳에서 동기들과의 '책상 토론'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깔끔한 논리와 사회를 바라보는 정확한 시선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태그:#국정원, #촛불집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