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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치 서울신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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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1일 서울신문은 '위기의 한국사 교육'이라는 기획기사에서 고교생 응답자 69%가 한국전쟁은 '북침'이라고 답했다는 결과를 발표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수석비서관 회의 자리에서 청소년의 역사 인식이 한탄스럽다면서 "교육현장에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교육의 잘못이라고 못 박았다.

대통령이 한 말은 곧바로 언론들이 받아 적으면서 정말 우리 청소년의 역사 인식이 갈 데까지 간 것처럼 한껏 부풀려졌다. 교사들은 역사 왜곡의 주범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북침'을 '북으로 쳐들어간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북한이 침략했다'고 헛갈린 때문이지 6·25전쟁이 북한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역사 사실을 몰랐기 때문은 아니다. 결국 역사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말의 문제였던 것.(관련기사 : 대통령님, 역사가 아니라 말이 문제랍니다)

'북한의 남침'을 마치 한 낱말처럼 외우듯 역사를 배운 어른들이야 헷갈릴 일이 드물겠지만 요즘 청소년이야 어디 그런가. 버스 카드 충전은 '버카충'이라고 하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열공'으로, '행복하십시오'는 '행쇼'라고 줄여 쓰는 세대다. 심지어 외국어까지도 줄인다. 일테면, 집안이고 학벌이고 능력이고 뭐하나 빠질 게 없지만 외모가 기대하고 다른 여자를 '버터페이스(but her face)'라고 한다.

일상이 줄임말이고 저희끼리는 크게 막힘없이 소통한다. 얼마 전 국방부는 '남침' 말고 '북한의 남침'을 공식용어로 쓰자고 했다. 하지만 '남침'을 꼭 써야 했을까? '남침'보다는 '침략'이 쉬운 말이고, '침략'보다는 '쳐들어왔다'가 훨씬 또렷하고 쉬운 말이다.

그러면, 한자교육을 해야 한다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불똥이 초·중학교 한자교육으로 튀었다.
26일치 몇몇 신문을 보면, "'天壤之差' 初等生 漢字 實力"(동아일보), '어휘력과 한자 교육'(조선일보) 같은 기사로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동아일보(2013년 6월 26일치 사회 14면 '天壤之差' 初等生 漢字 實力)는 아예 제목을 한자로 달았다. '천양지차 초등생 한자 실력'이라고 바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게 걱정된 때문일까? 친절하게도 조그만 글씨로 토를 달아놓았다.

기사를 보면, 서울 강북구 한 초등학교 3·4학년 100명한테 '大韓民國', '讀書' 같은 한자를 보여주고 읽어보라고 했더니, 대한민국은 48명, 독서는 23명만 제대로 읽었단다. '학생(學生)', '명암(明暗)'을 써보라고 했더니 각각 13명, 5명만 제대로 썼단다. 그런데 강남구 대치동 한자학원에 다니는 초등학교 학생은 중학교 수준 한자까지 읽고 써서 '한자 디바이드(격차)'가 심각한 양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초등학생 한자 실력이 떨어지는 까닭은 '현행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 시간 부족'과 '온라인 언어의 남발'을 들고, 거꾸로 대치동 초등학생처럼 뛰어난 건 '사교육' 덕분이라고 했다. 기자는 "최근 일부 특수목적고, 대학 등에선 한자시험 자격증이 있으면 가산점을 주기" 때문에 한자 선행교육이 유행처럼 퍼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한자교육을 해야만 할 까닭인가? 오히려 특목고나 대학 갈 때 가산점이라도 붙일 요량이라면 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만 같다. 사실, 한자능력자격은 적어도 3급쯤은 되어야 자격으로 인정해서 가산점을 준다. 자연스런 귀결로 높은 급수 자격을 따려면 아무래도 만만치 않은 시간과 돈이 든다. 응시료만 해도 적게는 1만2000원부터 5만5000원까지 다양하다. 초등학생 응시자가 전체의 60%로 초등학생 응시가 높지만, 대개 4~8급에 쏠려 있다.

국어사전에 실린 우리말의 70%가 한자말이라고?

한자교육을 해야 하는 까닭을 찾다가 <조선일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국어사전에 실린 우리말 어휘 가운데 70%가 한자어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교과서에서는 한자로 된 단어·용어가 90%나 된다. 한자어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간편한 우리말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 어문 현실은 그러지 못하다. 그러니 한자를 모르는 어린 세대가 한글로만 쓰인 한자 단어투성이 교과서를 배우기란 암호 해독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공부에 재미를 못 붙일 뿐 아니라 아예 이해를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2013년 6월 26일치 오피니언 34면 '어휘력과 한자 교육')

정말 그런가. 국어사전에 실린 우리말 가운데 70%가 한자어이고 한자로 된 단어·용어가 90%라는 말은 거짓이다. 맞다. 국어사전을 한번 펴보시라. 햐아, 한자어가 많긴 진짜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말이 얼마나 되는가? 책상에 놓인 국어사전을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보았다. 

공락(攻落), 공란(空欄), 공람(供覽), 공랑(公廊), 공랭(空冷), 공랭식(空冷式), 공략(攻略), 공략(攻掠), 공량(貢糧), 공력(工力), 공력(公力), 공력(空力), 공력근(共力筋), 공렬(孔裂), 공렬(功烈), 공로(公路), 공로(功勞), 공로(空老), 공로(空路), 공로주(功勞株), 공론(公論), 공론(空論), 공론공담(空論空談), 공론가(空論家), 공룡(恐龍)….

우리가 평생 가야 한번도 쓰지 않을 말이 태반이다. 거꾸로 지역에서 쓰는 말(방언)은 내쳐진 게 얼마나 많은가. 논고기, 농구다. 내그랍다, 말똥굴레, 비실꽃, 홍구래비, 땅개비, 껍디기, 까르레기, 뿍띠기, 꼬바리, 새구랍다, 호다리꽃… 같은 말들은 우리 어머니한테 일상으로 듣던 말이지만 눈을 까뒤집고 봐도 없는 말이다. 더러 운 좋게 국어사전 올림말이 되었다 해도 '○○의 방언'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놓았다. 그래 놓고 국어사전 올림말 가운데 70%라고 떠벌려서야 될 말인가. 말만 국어사전이지 우리말 사전도 아니다.

6월 26일치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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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단어투성이 교과서 배우기가 암호 해독만큼 힘들다고?

그 다음, "한자를 모르는 어린 세대가 한글로만 쓰인 한자 단어투성이 교과서를 배우기란 암호 해독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공부에 재미를 못 붙일 뿐 아니라 아예 이해를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한글로 쓴 한자말 투성이 교과서라서 배우기란 암호 해독만큼이나 힘든 일이라고 한 건 지나친 비약이다.

같은 신문에서 '가분수, 대분수, 교집합, 인수분해, 파충류, 양서류, 갑각류, 화성암, 변성암, 퇴적암' 따위를 보기로 들었는데, 우리가 한자말을 낱낱으로 풀어서 배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분수는 '분자가 분모보다 큰 분수'로 알 뿐이다. 왜 '가짜' 분수인지까지 알면 좋겠지만 그걸 모른다고 해서 '가분수'의 개념을 모르진 않는다. 오히려 '가분수'를 '가(假)+분(分)+수(數)'라는 뜻이 더해져 만든 말이라고 배우는 게 '암호 해독만큼이나 더 힘든 일'이 아닐까.

대분수(帶分數)를 '띠를 두룬 분수'로 기억할 때 '분수'보다 큰 '자연수'가 오히려 '띠'가 된다. 그게 더 혼란스럽다. 교과 이름만 봐도 그렇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도덕, 미술, 체육' 같은 말을 낱글자로 풀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국어는 그냥 국어이고 사회는 그냥 사회로 기억할 뿐이다.

한자를 몰라서 초등학교 교실에서 공부에 재미를 못 붙일 뿐 아니라 아예 이해를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교과서에 쓴 한자말을 쉬운 말로 고치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교과서 속 한자말이 어려우니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자면 한자 교육을 해야 한다고 떠벌린다. 한자 교육을 한다고 치자. 얼만큼 아이들을 잡아야 입 속의 혀처럼 한자말을 마음껏 부려쓸 수 있을까?

어른 세대와 언어 장벽을 허물기 위해 한자교육이 필요하다?

더욱이 학생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야 할 서울시교육청의 결정은 실망스럽다. 25일 서울시교육청은 '한자교육 추진단'을 조직하고 올 가을부터 초·중학교에서 교과서 속 낱말을 중심으로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 실린 서울시교육청 장학관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어린 학생들이 정확한 어휘를 구사하고 어른 세대와의 언어 장벽을 허물려면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 또 학부모들의 한자교육 요구를 수용하고 사교육비도 낮추는 차원에서 추진단을 구성했다."

어른 세대와의 언어 장벽이 정말 '한자'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학부모 요구'를 핑계로 들었다. 비겁하다. 방과후 희망 학생을 모아 가르치겠다고 했다. 잘 되라고 뭐도 가르치고 뭐도 가르치고 뭐도 가르치지만, 아이들한테는 골치 아픈 공부거리가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다. 정말 아이와 어른 사이 언어 장벽을 허물고 싶으면 아이 말을 들어줘라. 숨통이 트일 여유를 줘라.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을 줘라. 그러면 저절로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할 것이다.

한자말이 많아서 교과서가 이해하기 어렵다면 아이들이 알아먹기 쉽게 쓸 일이다. 어렵게 쓴 교과서 집필자들을 나무라야 한다. 사교육이 선발이나 입학 과정에서 힘을 발휘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어른이 할 일이고 교육자가 할 일이다.

에잇, 이러면 어떨까?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신문부터 한자말로 기사를 써서 펴내시라. 교육청도 공문이고 가정통신문이고 죄다 한자말로만 써보내시라. 그러면 독자들이고 학부모가 슬기롭게 판단할 것이다. 악착같이 한자 공부를 해서 신문을 읽을 것인지, 아니면 냄비 받침으로나 쓸 것인지 말이다. 여러분도 뒷일이 참 궁금하지 않은가?


태그:#한자교육, #역사교육, #남침, #북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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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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