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한민국 학생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멘붕'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사망률 중에서 1위는 자살이다. 2013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 지수 국제 비교에서 우리나라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3개 회원국 중 수 년째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

무서울 것 없는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모습은 더욱 '극적(?)'이다. 국제교육협의회(IEA)가 2009년에 실시한 국제 시민의식 교육 연구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사회적 상호작용(관계 지향성, 사회적 협력 부문)은 0점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꼴등이었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은 정부나 학교를 신뢰하는 비율 항목에서도 국제 평균 수치보다 30~40% 낮게 나타났다.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지금 한창 배움으로부터, 그리고 학교로부터 '도주'하는 중이다. 2011 교육 통계 분석 자료집을 보면, 고등학교 학업 중단자는 4만여 명에 가까운 3만8887명에 이른다. 하루 평균 100여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이 교실로부터 뛰쳐나가고 있는 셈이다. 주요 원인은 교과에 대한 흥미 상실과 친구·교사·학교와의 갈등 등이었다. 학교 교육의 문제가 그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 교육이 그리고 학교가 이런 지경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나는 한국 교육의 철학 부재를 손꼽고 싶다. 우리나라의 교육 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교육부 누리집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는 "꿈과 끼를 키우는 행복교육"일까.

아닌게 아니라 교육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한 자유학기제를 시범적으로 도입한 이후로 "꿈과 끼"라는 말이 부쩍 자주 쓰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꿈과 끼"는 어딘가 모르게 빈약해(?) 보인다. 확언컨대, 우리나라 교육 수장인 서남수 교육부 장관조차도 대한민국 교육의 핵심 철학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대한민국 교육의 '헌장'이자, 그 중심 철학을 담고 있는(있다고 짐작될 뿐인) 국가교육과정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종잇장이나 피디에프(PDF) 파일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국가교육과정은 핵심적이고 실질적인 교육 철학의 부재 속에서 수시로 개정되는 천덕꾸러기가 된 지 오래다. 그나마 국가교육과정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는 이가 교과서 집필자들이나 교육학과 대학원생들뿐이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교육 이민'의 대상국으로, "한국 엄마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이상적인 나라로 꼽았다는 캐나다"(7쪽)를 선택한 <캐나다 교육 이야기>의 저자는 캐나다 교육의 기본 철학을 '공평교육(Equity Education)'으로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공평교육은, 흔히 핀란드의 교육철학으로 소개되기도 하는 '평등교육'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저자의 논지에 따르면, 핀란드의 교육 철학도 실상은 '공평교육'으로 하는 것이 맞다). 저자는 한국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온타리오 주 정부의 교육부에서 발간한 "온타리오의 공평과 포괄 수용 교육 전략(Ontario's Equity and Inclusive Education Strategy)"이라는 자료를 인용해 '공평'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EQUITY: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고 포괄적으로 존중하여 대우하는 상태나 조건. 개인 차이에 관계 없이 사람들을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의미가 아님. (157쪽)

저자에 따르면, 평등교육은 수준이 서로 다른 세 아이를 한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이 같은 교과서로 가르치고 같은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주 확실하게 평등교육을 실시해오고 있는 셈이다. 반면 공평교육은 서로 다른 수준의 세 아이를 각자의 수준에 맞게 다르게 가르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세 아이들은 시험(평가)도 달라진다. 그래서 저자는 캐나다식 공평교육을 '맞춤형 교육'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 각자의 수준에 맞게 가르친다고 하니, 한국식의 수준별 우열반이 바로 공평교육이 아니냐며 반색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우열반은 절대 공평교육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우열반은 그 말 속에 이미 동일한 시험으로 평가를 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우열반 또는 고교 비평준화에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모든 학생들이 종국에 가서 수능이라는 동일한 잣대로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혀 공정하지 못한 방법이고 꼴찌를 해도 무조건 우수 학교나 우수반에 들어가기 위해 죽기 살기 경쟁을 하도록 만드는 비열한 제도다.(159쪽)

이런 '비열함'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서열화한 지금의 대학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수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수능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대체하는 또 다른 평가 시스템(그것이 내신이 되었든 대학별 본고사가 되었든)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 교육의 혁신은 흔히 말하듯 초·중등 공교육이 아니라 대학 교육을 통해 좌우된다. 철저한 서열화 시스템에서 '머리 좋은' 아이들을 싹쓸이 하다시피 하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영문 머릿글자)'의 '성적표'를 보라.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2011~2012년도 세계 대학 순위(조사 기관: 영국의 Times Higher Education; www.timeshighereducation.co.uk)를 보면, 포항공대는 53위, 서울대는 124위이다. 고려대와 연세대는 185위까지 나와 있는 표에 나와 있지도 않다.

걸핏하면 '붕괴'니 '막장'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서 동네북 신세가 된 지 오래지만, 초·중등 공교육(학교)은 그나마 학교 현장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최근 2, 3년 사이에 경기도와 전라북도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는 혁신 학교 정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나마 진보적인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과 김승환 전라북도 교육감이 나름대로의 확고한 철학과 리더십으로 예의 정책을 추진한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대학들은 어떤가. 그들은 스스로를 냉혹한 시장의 정글에 던져 놓은 채 기업체에 쓸 만한 졸업생을 공급하는 '인력 사무소'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그들은 또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도 좋고 진리 탐구도 좋지만 이것들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하겠느냐는 '개똥 철학'의 노예가 돼 버렸다. 기업이 아니라 기업 할아버지가 와도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당당한 '갑'이어야 할 대학들이 기업에게 간과 쓸개를 다 빼주는 '을'이 돼버린 것이다.

저자가 "함 드라봐!"로 부르는, 세칭(!) 캐나다 최고 명문인 토론토 대학교의 학사 시스템을 보자. 토론토 대학교에서 4년 만에 학위를 받고 졸업하는 학생의 비율은 남자 17%, 여자 45% 정도로 평균 30%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통계를 보면 7년 안에 졸업하는 학생이 약 80% 정도 된다. 또 1, 2학년에서 약 50%의 학생들이 전공 과목을 수강 중에 취소하거나 낙제 점수를 받아 중도에 포기한다. 이는 토론토 대학뿐만 아니라 그 인근의 주요 대학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처럼 학위를 따기 어렵고 학생들이 중도 탈락을 하게 되는 상황은 강제적이거나 등수를 매기는 상대 평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저자의 분석을 보면, 토론토 대학교는 모든 과목 성적을 절대 평가로 60점대에 맞추어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을 걸러내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를 "자신 있으면 한번 들어와봐!", 곧 "함 드라봐" 시스템으로 부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토론토 대학교를 포함하여 캐나다의 대학은 입학하는 게 아주 쉽다. 캐나다에서는 고등학교에서 공부에 조금만 성의를 보여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캐나다의 대입은 피를 말리는 게임처럼 당사자들의 간을 졸이게 만드는 한국의 대입과는 많이 다르다. 반면 캐나다 대학생들은 대학 입학 후 자신의 적성과 수준에 맞는 전공을 찾을 때까지 아주 치열하게 공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북미(캐나다와 미국) 대학생들은 평균적으로 세 번 정도 전공을 바꾼다고 한다. 그 주요 이유가 대학에서 하는 공부가 어렵고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서임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학생들의 취직을 돕는다는 핑계로 학점을 퍼주기 시작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졸업 학년인 4학년만 되면 전공 강의는 거의 뒷전으로 제쳐두고 취직에 도움이 되는 특별 교양 강좌를 열어 온통 취업 전선에 매진하는 모습도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다. 우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가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점수가 좀 더 높은 신입생을 뽑기 위한 선발 경쟁이나 졸업생의 취업 경쟁에 사활을 거는 대학의 모습은 우리나라 교육의 암담한 미래를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런 대학의 현실은 대한민국 학교 전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아이들 자신만 빼면 그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편리한 제도인 '경쟁 교육'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은 무엇일까. 여기 저자가 제시하는 방안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좋겠다.

학부모가 할 일은 단 한 가지다. 비경쟁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다. 엄마들이 만나서 좋은 학원, 훌륭한 과외 선생, 명문대 입학 정보만 나누지 말고, 아이들에게 등수를 붙이지 말자는 공감을 나누는 것이 일의 시작이다. 많은 학부모와 시민들이 성적표에서 석차를 없애고 수능을 없애거나 점수 분포(등수)를 공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일을 나서서 하겠다는 정치인과 교육감 후보가 등장할 것이다. 구체적인 일들은 선출된 정치인과 교육감의 지도력 속에 교육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다. '등수가 없으면 대학에서 신입생 선발을 어떻게 할까?' 하는 것도 학부모가 고민할 일이 아니라 대학이 고민할 일이다. (310쪽)

덧붙이는 글 | - <캐나다 교육 이야기 -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박진동 ․ 김수정 지음 | 양철북 | 2013. 5. 16 | 312쪽 | 1만 3천 원)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교육 이야기 -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박진동.김수정 지음, 양철북(2013)


태그:#캐나다, #공평교육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