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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은 원래 이름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하 '정문연')이다. 1978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창달을 명분으로 세운 기관이다. 현재 누리집의 '연구원 소개'란에 들어가 보면, 그 설립 목표를 한국문화의 심층연구 및 교육을 통한 한국학 진흥으로 제시해놓고 있다. 누리집 초기 화면에서는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학의 본산'이라는 거창한 문구가 우리를 맞는다.

한중연의 최초 설립 과정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아다니고 있다. 박정희는 연구원 설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풍수지리를 따져서 좋은 터에 연구원을 자리잡게 하고 싶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당시 전국 최고의 풍수인을 불러 풍수상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을 물색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선정된 곳이 현재의 성남시 운중동에 있는 청계산 자락이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한중연은 고적한 연구원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다. 동서로 10여km 이내에 최첨단의 도시 이미지를 자랑하는 성남 분당과 안양 인덕원이 있었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성남-안양 간 국도 및 지방도가 연구원 앞뒤 산자락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아마도 연구원이 청계산의 굵은 산자락 사이에 터를 잡은 덕분일 것이다. 단정한 한옥 양식의 연구원 건물들도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최근에는 정체 불명의 '신식' 건물이 들어서서 그런 분위기가 많이 퇴색돼 버렸다).

이런 연구원답게 한중연은 대개 공부 좋아하고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세속적인 의미로 출세하여 부귀공명을 탐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찌 보면 고루한 선비들의 집합소와도 같았다. 나는 1999년에 그 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내 전공은 국어학이었다. 그때 전공 선배로 만난 배아무개 선생은 내 학문적 여정에서 '멘토'와 같은 이가 되어 지금까지도 교유를 이어가고 있다. 그와 함께 청계산을 오르고,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나눈 전공 대화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중연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은 거의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래서 같은 전공을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 분야를 공부하는 대학원생들과의 교류도 무척 활발했다. 나 같은 경우는 역사학과 종교학, 민속학 전공자들과의 만남이 특히 많았다. 연구원 도서관인 장서각과 대학원 강의동 사이의 정자는 우리들의 변함 없는 '학문적 아지트'였다. 그런 한중연은 내게 늘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하는 곳이다.

'경기도 현대사'에도 연루돼 있는 양동안 교수

그런데 한중연의 전신인 정문연의 탄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 정권이 출범시킨 태생적인 운명 탓일까. 정문연은 정치적인 외풍에 휘둘릴 때가 많았다. 국가가 강제한 주류 이념과 사상을 연구하던 어용 기관이라는 오명으로 구설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연구원이 바라는 학문적인 요구나 권위와 무관하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친정권적인 인사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던 연구원 원장 인사의 파행도 이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만주 인맥으로 그의 '역사 선생'이나 다름 없었던 이선근이 초대 원장으로 있었던 사실은 정문연의 어두운 역사를 잘 보여 준다. 1978년 6월 30일, 박정희는 정문연 개원 치사에서 연구원을 국학 연구의 총 본산이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한국학 연구 기관으로 키워 나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선근은 내부적으로 박정희 독재 정권의 유신 이념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하고, 새마을 운동과 같은 국가 지도 이념을 확립하는 데 연구원 운영의 중점을 두었다. 어용 연구원이라는 이름이 나온 배경이다.

심각한 문제는 일부 '정치 편향적인' 교수들의 행태이다. 정치학 전공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명예 교수로 있는 양동안 교수, 현재 한중연의 역사 계열 교수로 있으면서 최근 교과서 파동을 불러온 권희영 한국현대사학회 회장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양동안 교수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종북 세력 비난과 척결에 큰 목소리를 냈다. 2년 전엔가 그는 <서울신문>에 글 한 편을 기고했다. 거기에는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에 내포된 미약한 정도의 사상·표현의 자유 규제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조만간 와해될 것이라는 주장이 실려 있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국보법에 의지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콩가루' 나라다.

양동안 교수는 올해 초 논란이 된 '경기도 현대사'에도 연루되어 있다. '경기도 현대사'는, 경기도가 2010년 10월부터 지난해 12월 20일까지 4600만 원을 들여 경기문화재단에 '경기도 현대사 편찬 및 활용방안' 용역을 발주해 만든 역사 교재로, '대한민국 편'(234페이지)과 '경기도 편'(131페이지)으로 나뉜 368페이지 분량의 자료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재 집필엔 '뉴라이트' 학자 단체인 '교과서포럼'의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참여했다. 양동안 씨는 유석춘 연세대 교수, 안병직 서울대 교수,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등과 함께 교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모두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논란은 1945~1997년을 다룬 '대한민국 편'에서 비롯되었다. 이 대목에서 교재 집필자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의 국가 체계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세워졌다면 5·16 군사정변은 그 토대 위에서 국가 경제의 곳간을 채우는 역사적 과제를 추구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는 그로 인해 유신 체제와 신군부에 저항한 민주화 세력이 급속히 반미세력으로 변해갔다는 주장을 서술해 놓기도 했다. 심각한 편견과 왜곡에 따른 서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권희영 교수의 교과서 집필 제안, 의도가 무엇일까

나는 '정치학' 석사 학위를 가진 양동안씨가 어떻게 명색이 공무원들의 역사 교재인 '경기도 현대사'의 자문위원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그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국보법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면서 '자유'가 붙은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수호를 외쳐 온 사람이다. 그런 전력을 김문수 경기도 지사가 높게 봐 준 것일까.

나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고풍스러운 한중연에서 양동안 교수와 같은 이가 나온 게 부끄럽기만 하다. 그런 한편으로 전교조 교사인 나 같은 이는 그가 바라마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는 '빨갱이' 취급을 받으면서 제대로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할 것 같아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종북 검찰'이라는 말이 나오는 시대이다. 그러니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내 군 생활이, 기무사의 까다로운 신원 조회를 통과한 뒤 강원도 양구의 최전방 GP 부대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들은 '종북 군대'를 들먹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 한중연의 현직 교수로 있는 권희영씨는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 한중연의 이름을 양동안씨 이상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줄 것 같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현대사학회는, 좌편향된 역사 연구를 지양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한다는 취지 아래 2011년 5월 설립된 학술 단체다. 이들 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수 계열 역사학자들은 한목소리로 기존 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며 비판해 왔다. 그런 그들이 쓴 교과서가 이번에 한국사 교과서 검정 심의 본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번 교과서 집필은 권희영 교수가 먼저 교학사 쪽에 교과서 집필을 제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지난 달 31일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한국현대사학회가 주최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학술회의에서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해방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서술한 교과서는 없다. 교과서들은 4·19 이후, 87년 체제 이후에 민주화됐다고 보는데, 이는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8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모인 교과서포럼이 내놓은 이른바 '대안교과서'에서는 5 ·16 쿠데타를 '혁명'으로 격상해 서술하고, 4·19 혁명은 '학생운동'으로 폄하하여 기술하였다. 권희영 교과서 팀의 의도도 이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박정희는 '산업화의 아버지'로 보면서, 당시의 경제적인 성과는 최대한 부풀리는 대신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 등의 부정적인 실상은 최대한 축소하는 집필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한중연 동문들이 '격문'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희영 교수가 먼저 제안까지 해서 집필한 교과서가 나는 지금 무척 궁금하다. 검정 교과서 집필은 교육부가 마련해 놓은 교육 과정과 교과서 편찬 기준, 교과서 집필상의 유의점 등 몇 가지 준거를 잘 따라야 한다. 검정 심사도 이들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번에 권희영 교수 팀이 쓴 교과서도 나름대로 그 기준들이 제시하는 조건을 잘 따랐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본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권희영 교수 팀의 교과서가 매우 의심스럽다. 공동 집필자로 참여한 저자들의 면면도 정말 궁금하다. 명색이 역사학 관련 학회임에도 역사학 전공자가 전체 회원의 6%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그런 내 의심을 부채질한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현대사학회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길 기대한다. 그들의 학문적인 허술함이 만천하에 확실하게 밝혀졌으면 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그들이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결코 허투루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진정한 한국학의 본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졸업한 한중연의 진짜 주인이 강의동, 연구실, 혹은 장서각 자료실 등에 앉아 '진짜 한국학'의 미래를 준비하는 '무명의' 대학원생과 교수, 연구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양동안씨나 권희영 교수 같은 '폴리페서'가 우리 연구원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참으로 모욕적인 아니러니다. 이번 기회에 한중연을 사랑하는 동문들이 곳곳에서 '격문'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리하여 우리 연구원이 '진짜' 한국학의 본산이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권희영, #양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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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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