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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2008년 5월 26일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교과서포럼 주최로 열린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안병훈 전 선대위원장의 안내를 받고 있다.
 2008년 5월 26일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교과서포럼 주최로 열린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안병훈 전 선대위원장의 안내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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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적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과거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문제이고, 역사 교과서야말로 우리 청소년의 역사관과 국가관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국민의 혼을 만드는 미래의 나침반이다. (중략) 많은 뜻있는 분들이 현행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 대안교과서의 출간으로 걱정을 다소나마 덜었다. 이 책의 출간을 후원하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애국지사들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의 출간은 훗날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2008년 5월 26일, 뉴라이트 학자가 주축이 된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출판기념회에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가 한 말이다. 이날 박 전 대표는 출판사 기파랑 대표인 안병훈(조선일보 전 부사장)씨 등 참석자들을 애국자로 추켜세우며, 대안교과서 출판이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극찬한 박근혜 대통령

5년 전 장면을 떠올린 이유는 지난 1일 고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심의 본심사를 통과한 8종 중 가운데 뉴라이트 계열인 권희영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이 주집필자로 참여한 교학사 교과서가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학사 측은 논란의 핵심인 교과서 본문 내용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5년 전 논란이 됐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떠올리면 그 내용을 유추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책임 편집을 맡았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는 박효종, 김영호 등 뉴라이트 교수 12명이 집필을 맡았고, 복거일 문화미래포럼 대표 등이 감수를 담당했다. 책의 출판을 둘러싼 논쟁은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로 구성된 '교과서포럼'은 박근혜 전 대표가 축사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기존 교과서가 왜곡돼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책의 서두에서도 이런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005년 우리가 '교과서포럼'이란 이름 아래 모인 것은 현행 고등학생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존 교과서는 우리 삶의 터전인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하게 태어난 나라인지, 그 나라가 지난 60년간의 건국사에서 무엇을 했는지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포럼 지음·기파랑)>

식민지 근대화론, 대한민국 정통성, 반공· 반북 문제는 재평가가 불가피하다는 교과서포럼의 주장은 고스란히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내용에 반영되었다. 일제의 지배와 독립 투쟁,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 권력과 민주화 투쟁에 대해 기존 역사관을 전면 부정하거나 정립되지 않은 주장이 역사적 사실처럼 기술되기도 했다.

쌀은 수탈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수출되었다. 빈곤의 근본 원인은 급속한 인구 증가에 따른 농촌 과잉인구 축적에 있었다. 이 논리가 과연 자학사관을 벗어난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식민지 한국인의 생활수준 기술 부분 쌀은 수탈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수출되었다. 빈곤의 근본 원인은 급속한 인구 증가에 따른 농촌 과잉인구 축적에 있었다. 이 논리가 과연 자학사관을 벗어난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대안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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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에 한국인의 생활 수준이 일제의 수탈로 극도로 열악해졌다고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예컨대 생산된 쌀의 절반을 일본에 빼앗겨 한국인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수탈론에는 실증적인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쌀은 일본에 수탁된 것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이 증대되었다."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98P 부분        

위 글은 도시의 비숙련 노동자, 농촌의 빈농이 낮은 생활 수준에 머물렀지만 일제 수탈 때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식민지 경제구조가 한국인의 생활 수준 향상에 일정정도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식민지 시기 친일 관료와 적극적 친일 행위자를 제외한 상당수 민중은 비참한 생활을 했으며 식민지 경제 수탈이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를 왜곡시켰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상반되는 내용이다.

"1942년 5월 상순 일본인 대리업자가 '위안봉사'를 시킬 한국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큰 돈벌이, 가족의 빚 갚기, 쉬운 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이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 백 엔의 전대금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이었다. 대개 800여 명이 이렇게 모집되어 1942년 8월 20일까지 랑군에 도착하였다." -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93P 부분

일본군을 위한 성 노예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일본군위안부. 일본 제국의 계획에 의해 한국 등에서 여성을 무차별적으로 징벌해 전선에서 성노예가 되기를 강요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만이 일본군위안부를 국가의 계획적 범죄가 아닌 민간업자의 돈벌이 욕심 때문에 생격난 것이라는 억지를 계속하고 있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는 위안부로서 비참한 생을 살았던 할머니의 증언 등에 근거해 일본 제국의 의도성을 파헤치기보다는 미국군 심문 내용을 앞세워 대리업자와 무지한 여성들의 거래로 설명했다.

뉴라이트, 일본 극우와 닮았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쌀을 수탈했고, 정신대를 강제 동원해 일본군 위안부로 삼았다고 기술한 중고교 국사교과서는 신화(神話)에 불과합니다." - 2004년 11월 19일 '한일연대 21 심포지움' 이영훈 교수 발표 내용 중 (<동아일보> 2004.11.19.)


"위안부가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그 정도로 총탄이 오가는 상황에서 정신적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강자 집단에 위안부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 폭행, 협박해서 납치한 사실은 입증되지 않았다." - 하시모토 도루 일본 오사카 시장 위안부 관련 발언 중

뉴라이트를 대변하는 학자와 일본 극우를 대변하는 하시모토 도루 일본 오사카 시장. 이 두 사람의 발언을 놓고 우리 사회는 어떤 잣대를 들이대고 있을까?

1997년 일본 내 새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자학 사관의 극복을 명분으로 탄생해, 숱한 역사 왜곡을 통해 자국 내 지식인은 물론 주변국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뉴라이트 교과서포럼 또한 자학 사관 극복을 내세워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집필했다.

일본 위안부에 대해 대안교과서는 "대리업자의 돈벌이 수단으로 무지한 여성들이 전대금을 받고 동의한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논리는 일본의 극우주의자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 한국 근현대사의 위안부 기술 부분 일본 위안부에 대해 대안교과서는 "대리업자의 돈벌이 수단으로 무지한 여성들이 전대금을 받고 동의한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논리는 일본의 극우주의자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 대안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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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뉴라이트 계열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논란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2008년 교과서포럼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단행본은 원하는 사람이 참고만 하면 그만이지만, 교과서는 선택해서 배우는 순간 거기에 담긴 내용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논란이 된 교학사 고교 한국사 집필을 주도한 한국현대사학회는 5월 31일에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 중·고등 한국사 교과서 분석과 제언' 학술회의를 열고 기존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를 집중 부각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참석자들은 교과서가 친일·반일, 민주·파쇼의 대립을 강조하고 보편적·헌법적인 가치 대신 이분법적 사관으로 기술돼 있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고 한다. 기존 교과서의 좌편향이 박근혜 대통령의 예전 발언처럼 전율할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정작 어떤 부분이 그렇게 좌편향 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되는 부분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교과서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한국현대사학회의 학술회의 발언이나 집필진의 면면을 보면 이번에 1차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의 역사교과서가 기존에 출간된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관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일본 새역모의 주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교과서의 탄생이라면 이 사회는 또다시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정체성도 같이 도마 위에 올려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제 침탈을 정당화하고 모순투성이 역사관을 강조하는 뉴라이트류의 역사교과서가 중학생 딸아이가 배울 교과서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청산되지 못한 일제 잔재가 또다시 우리 아이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한다. 

역사 교과서가 좌경화 돼 바꾸어야 한다고 해서 매국노 이완용이 근대 문명의 선구자가 될 수는 없다. 기존의 근·현대 역사교과서는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증언과 수많은 자료를 근거로 만들어졌다. 뿌리를 흔들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답답하고 참담하다.

아버지와 딸아이가 대립적인 역사관을 가진 대한민국이 뉴라이트가 꿈꾸는 미래가 아니라면 왜곡된 사실로 가득찬 역사 흔들기는 중지돼야 한다. 일본 총리의 망언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규탄을 한들, 위안부 소년상을 우리가 지키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들, 우리 자식들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공연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쇼에 불과하다.


태그:#뉴라이트,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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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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