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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극우세력의 '역사 공세'가 가열차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뉴라이트(신우익) 계열 학자들이 집필한 역사교과서가 검정 본심사를 통과했다. 아직 8월 최종 심의를 남겨두고 있지만, 검정 본심사를 통과한 교과서가 최종 심의에서 걸러진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으므로 이 역사 교과서가 통과되리라는 예상은 이제 기정사실이라 볼 수 있다. 역사 교과서를 최종적으로 통과시켜 줄 요량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이번 검정 본심사를 통과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사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주장은 더 새삼스러울 것이 없고, 그들의 주장은 이미 역사학계와 시민들로부터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들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독재권력의 자유와 민주주의·인권 유린까지 모조리 긍정해버리는 점에 있다. 뉴라이트는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기본적으로 이념집단이지, 학문연구 집단이 아니다.

이들이 비록 한국현대사학회라는 가면을 쓴다고해서 그 본색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현대사 주장은 대부분 이념적 잣대에 기초해 재단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전부 좌편향이라 몰아붙이면서,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과 결탁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한 데서도 이점은 잘 드러나고 있다. 실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전인 2008년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 출판 기념회에 참석해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며 "(뉴라이트 교과서 덕에)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검정 통과는 한국사회가 공공적 역사의식의 측면에서 엄청난 반동의 격랑에 휩싸여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적어도 특정 권력과 이념에 의해 역사인식체계가 설정되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특히 '현대사를 보는 눈'은 자기 사회를 보는 눈인 동시에 그것 자체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창인만큼,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들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그럼 이번 사태의 책임은 누가 져야 될까? 물론 기본적으로는 현대사를 권력과 이념에 따라 재단하려는 현 정권과 교육부 당국자들에게 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지금 한국의 공공적 역사인식을 담당, 대표하고 있는 기관은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역사교과서 검정심사를 국편이 맡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국사편찬위원회는 비록 국가 기관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학문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권력과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 국편은 이 의무를 방기했다. 국편이 뉴라이트의 주장을 용인해준 꼴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뉴라이트의 주장은 공공적 역사인식에 진입하게 됐다. 사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경화 논란은 이명박 정권 당시부터, 특히 지금의 이태진 위원장이 취임한 뒤부터 역사학계 내에서 꾸준히 지속되어왔다는 점에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경화 논란 자초한 국사편찬위원회

이명박 집권 첫 해부터 극우세력들은 역사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2008년 역사학계와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발칵 뒤집어 놓은 건국절 논란도 이때 제기된 것이었다. 이어 뉴라이트 집단과 조중동은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존 근현대사 교과서를 좌편향으로 몰아갔다. 이명박 정권도 덩달아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2008년 10월,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은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6종에 대해 253개에 달하는 수정요구안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했다. 때를 맞춰 당시 안병만 교과부 장관은 "근현대사 교과서 중 일부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해치고 있어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명박 대통령 역시 "교과서를 바로잡아놓겠다"며 엄포를 놨다. 역사교과서에 대한 정권 차원의 개입이 노골화되는 신호탄이었다. 교과부는 일단 교과서포럼의 253개 수정요구안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검토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부가 예상치 못한 사단이 났다. 국편이 교과서 편찬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지향한 검인정제도를 정부 스스로 무시하는 것은 모순이라 지적하며 253개 수정안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편은 권력의 학문 재단에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국편의 태도가 2010년 이태진 현 위원장 취임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2012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5·16쿠데타와 관련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독재도 좀 필요한 거라는 인식도 있었다"고 말해 물의를 빚은 바 있지만, 이미 2011년 개정 역사교육과정과 새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국편은 보수 세력과 정권의 요구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역사학계의 반발을 초래했다.

2011년 8월 확정 고시된 역사교육과정은 숱한 논란을 낳았다. 역사 교육과정 개발을 직접 담당하고자 학계 인사들로 구성된 '역사교육과정 개발 정책 연구위원회'가 마련한 개정안과 다르게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하도록 고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뉴라이트 계열 한국현대사학회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논란이 가중되자 교과부는 이것이 국편과 협의한 결과라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발표했다. 실제 당시 이태진 위원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교과부 장관의 문의에 "자유민주주의"로 해도 좋다는 의견을 보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독단적인 결정에 대해 국편 내부에서도 심각한 문제제기가 진행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편, 이에 이어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마련해야 했다. 집필기준 개발의 최종 책임은 국편에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되면서 학계의 반발이 초래됐다. 예컨대 학계 인사로 구성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발 공동연구진'이 합의한 "독재정권하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라는 부분을 국편이 "자유민주주의가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로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또 11월 11일 이태진 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박정희 정권도 처음부터 독재를 한 게 아니고 민주주의를 하려다가 장기 집권을 통해 점차 독재를 하게 된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곧 학계로부터 '독재화'라는 수사를 통해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희석시키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인재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교과서 집필기준에서 민주화 운동은 물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모두 삭제해 사실상 독재를 미화하고 있는 게 진짜 문제"라 지적했다.

이렇게 학계에서 반발하자 이태진 위원장은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대체하면 학계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제안했고, 이에 집필기준에 두 차례 나오는 '자유민주주의'를 모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꾸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국편은 이 약속을 어겼고 또 한 번 학계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어 최종 발표된 중학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선, 역사학계가 사실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던 '자유민주주의'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등의 표현이 확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주4·3항쟁, 5·18 광주항쟁, 6월 민주항쟁 등이 집필기준에서 누락되어 있어 더 큰 논란을 불러왔다.

이러한 논란의 과정에서 국편은 '우경화'됐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엄밀하게 말해 '우경화'가 아닌 '권력에의 굴종'이었고, 학문적 양심의 포기였다.

권력을 견제했던 춘추관, 권력에 굴종하는 국편

조선시대에도 국사편찬위원회가 있었다. 바로 춘추관이다. 다만 오늘날과 다른 점은, 지금의 국편과 달리 춘추관은 주로 당대의 역사자료를 정리하고 편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산물이 오늘날 방대한 분량으로 전해지는 실록이다.

그럼 왕조시대에 왜 춘추관과 사관을 두었을까? 얼핏 역사를 권력의 이용물로 써먹으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역사'가 국가이데올로기화하며 국가권력에 복무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이 역사(또는 사관)를 이용할 때 무서운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조선시대 무오사화는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래서 무오사화는 '士禍'가 아닌 '史禍'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날과 같은 의회민주주의가 없던 왕조체제에서 최고 권력자인 국왕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역사이기도 했다. 왜냐면 역사의 기록은 영원했기 때문이다. '왕으로 하여금 후세를 두려워하게 하는 것.' 이것만큼 강력한 견제장치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사관을 둔 것은 대간을 둔 뜻과 다름없다"는 언급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래서 사관은 늘 임금 곁에 붙어 있으려 했다. 태종은 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겨 때때로 '사관 입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관들은 국왕의 일상 영역에까지 침투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국왕은 절대 실록과 사초를 열람하지 못하게 했다. 이는 사관의 자율성과 탈권력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비록 사관이 왕조체제 안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최대한 왕조의 최고 권력과 거리를 두고, 그 개입을 받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직필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또 '직필'이야말로 역사의 영원성을 통해 권력을 견제한다는 뜻에 가장 부합하는 실천적 노력이었다. 이러한 '직필' 정신은 실록이 조선시대의 국가적 데이터베이스 구실을 담당할 수 있었던 일차적 요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시대 사관들이 보여준 인식과 행동을 오늘날 국편과 비교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더욱이 오늘날은 조선시대와 달리 민주주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국편이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권력에 굴종해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지성적 양심과 문화적 수준이 조선시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권력은 국편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하며, 국편은 스스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 조선시대 사관의 '직필' 정신이 지금 절실한 이유이다.


태그:#국사편찬위원회, #이태진 위원장, #극우교과서, #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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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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