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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19번째 새 앨범 <헬로>를 발표한 가수 조용필
 10년 만에 19번째 새 앨범 <헬로>를 발표한 가수 조용필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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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용필은 나와 비슷한 또래다. 1950년생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도 이미 예전에 환갑을 넘겼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내게 더욱 동질감 같은 것을 갖게 한다. 노년 시기에 접어든 그가 다시 가요계에 복귀하여 수많은 팬들의 열광과 환호를 받고 있으니, 비슷한 또래인 나로서는 고마운 감정마저 갖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나도 조금은 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조용필의 노래들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노래들을 많이 불러왔다. 지금도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창밖의 여자>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은 가사를 보지 않고도 부를 수 있다. 조용필의 노래들 외로는, 가사나 악보를 보지 않고도 부를 수 노래가 거의 없다. 젊은 시절에는 많이 불렀던 노래들도 어언 세월과 함께 깡그리 잊었다.

가수 조용필을 생각하면 우선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가 떠오른다. 조용필의 이름을 들으면 그 노래가 자연발생적으로 떠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며칠 전부터 그 노래를 혼자 나직하게 불러보곤 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도 경험했다. 또 이 글을 시작하기 전 인터넷 검색으로 그 노래를 다시 들으며 아련한 그리움 속으로 눅눅히 젖어들기도 했다.

1982년, 서른네 살 나이로 소설가라는 호칭을 얻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부문 당선으로 등단을 했다. 1967년 열아홉 살 시절에 <현대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도전하여 '당선후보'가 된 후로 만 15년 만에 등단의 꿈을 이루었다.

작가지망생 15년 세월의 고난과 슬픔들을 몇 장의 필설로는 다 말할 수 없다. 일간지 신춘문예와 유명 문예지들의 신인상에 도전하여 거듭거듭 최종심까지 올랐다가 고배를 마시곤 한 그 눈물겨운 이력들은 사실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다.

작가지망생 시절, 실연의 아픔

15년이나 이어진 낙방거사의 남루한 세월 속에는 참담한 실연의 아픔도 있었다. 그 실연의 아픔을 단 한 번 필설로 고백한 적이 있다. 1982년 초, 당시의 유명 문예지 <소설문학>에서 신춘문예 당선작가 좌담회 행사를 연 적이 있었다.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 작가들을 다 모아놓고 박범신 선배가 사회를 보았다.

그 좌담회 후 박범신 선배는 자신의 소설 연재를 하고 있던 <엘레강스>라는 잡지사에 가서 내 얘기를 전한 모양이었다. 내 낙방거사 15년 세월 속 갖가지 사연들이 너무 애처롭고 이채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엘레강스> 편집장이 내게 직접 원고 청탁을 했다. 나로서는 등단 이후 최초로 받은 원고 청탁이었다.

소설 청탁은 아니었다. 낙방거사 15년 세월 속에 농축되어 있는 사연들을 수기 형식으로 원고지 80매가량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박범신 선배의 체면도 생각해서 정확히 80매를 채워 원고를 썼다. 그 원고에 '실연의 아픔'도 살짝 언급을 했다. 그런데 원고를 본 편집장은 몇 줄로 간단히 처리한 '실연' 부분에 집착했다. 그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써서 100매를 채워달라는 주문이었다.

나는 난색을 표했다.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자 편집장은 나를 서울로 불러올리더니 여관방에 집어넣고 그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써달라고 사정을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몇 년 전의 눈물겨운 실연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했다.

나는 잘나가는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내 나름대로 열심히 문필 활동을 해왔다. 내 수많은 글들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은 내 아내다. 아내는 내 모든 글의 최초의 독자이기도 하다. 아내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활자화된 내 글을 빠짐없이 모두 읽어준 아내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1982년 <앨레강스> 2월호는 아내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오늘 31년 전의 그 잡지를 찾아서 내 글의 제목을 보니 <망망계곡의 피라미, 동트는 로마로 오다>로 되어 있는데, 편집장이 임의로 정한 제목이었음이 기억난다.

언젠가 한 번 아내가 내 작품 목록들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다가 <엘레강스> 1982년 2월호에 궁금증을 표하기도 했지만, 내가 책을 내주지 않으니 아내도 쉽게 관심을 접었던 기억이 난다.

<엘레강스>에 고백했던 그 실연의 아픔 뒤에 나는 부산의 한 여성작가와 교제를 했다. 거의 결혼까지 갈 뻔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아픔이나 앙금 없이 헤어졌고, 나보다 10년 연하인 그 여성작가는 몇 해 전 이승을 하직했다. 그 여성작가와의 사연은 아내도 알고 있다. 종종 그 여성작가와 호의적인 서신 교환도 했을 정도다. 

사랑은 끝났지만 아직도 조용필의 노래는...  
              
30세 전후 시절에 겪었던 그 실연의 아픔을 지금 나이에 다시 회억하며 너스레를 떨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 글을 쓰자 하니 그 시절의 추억을 조금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실연의 아픔이 지속되던 시절 나는 조용필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참 많이도 불렀다. 어디를 가나, 어떤 자리에서나 노래를 부르게 되면 꼭 그 노래를 불렀다. 노래 자체도 절절했지만 내 목소리도 몹시 절절했던 것 같다.

내 노래를 들은 한 친구가 내게 다가와 술잔을 건네며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그만 잊어"라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후로 나는 틈만 나면 그 친구 집에 가서 전축을 틀어놓고 조용필의 노래를 듣고,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 시절 어느 핸가는 혼자 학암포에 가서 해변을 거닐며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되풀이 부르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때 노래의 묘미를 새로이 느낄 수 있었다. 노래 자체는 내 실연의 아픔을 벌불지게(등잔불 등처럼 번지게) 하는 노래임이 분명한데, 그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묘한 위안을 느끼게 되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노래를 혼자 나직한 소리로 부르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부르지 않는다. 노래방에 가서도 다른 노래만 부르고,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는 불러본 기억이 없다. 아내와 함께 장거리 운행을 할 때, 나는 운전을 하면서도 아내에게 시도 읊어주고 가곡과 대중가요도 불러주곤 하는데, 아직 한 번도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부른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노래를 잊지 않고 있다. 이미 예전에 실연의 아픔도 잊었고, 실연의 아픔 때문에 절절히 그 노래를 부르던 시절도 이제는 아득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조용필의 그 노래는 내게 남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그 노래를 두어 번 불러보았다. 노래를 부르다 보니 내가 30세 전후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도 살아올라 새삼스레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아내가 이 글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헬로~ 조용필!' 공모 응모글입니다



태그:#가수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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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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