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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 롯데백화점 직원 자살, 남양유업 폭언,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대형 사건들이 한 주가 멀다고 연쇄폭발처럼 터져 나와 한국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지난 한 달, 유달리 운이 나빴던 것일까? 유난히 봄이 늦게 오더니, '잔인한 사월' 기운이 오월까지 가시지 않은 탓일까?

착각하지 말자. 이런 사건은 한국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저 교묘하게 가려져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가해자가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일 수록, 피해자가 힘 없고 돈 없는 사람 수록 사건은 묻히기 쉽다.

예컨대 남성보다 여성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경제적 착취와 성폭력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여성민우회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이 불안정한 여성일수록 성폭력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 지난해 성폭력 상담 내용 가운데 절반이 직장 내에서 일어났으며, 가해자의 87.5%가 그들의 명줄을 쥔 사업주와 상사들이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90% 이상이 성폭력을 당해도 보복이 두려워 제대로 신고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면에서 최근 불거진 일련의 사건들은 힘깨나 쓰는 가해자들이 꽁무니를 숨기지 못한 '희귀 사례'에 가깝다. 이들의 추태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가 손을 쓰기 어려웠던 탓이다. 이마저도 우연의 도움과 불이익을 감수하고 사건을 폭로한 사람의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에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폭언, 폭행, 착취처럼 흔적도 없이 묻혀 과거가 되고 미래로 되풀이 되었을 것이다.

권력자의 악행은 어떻게 은폐되는가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이 12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 사과의 뜻을 표명하며 절하고 있다.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이 12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 사과의 뜻을 표명하며 절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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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사고'로 가해 사실이 드러나기는 했으나, 배후에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치밀하고 조직적인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은 권력자들의 악행이 은폐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워싱턴DC 소재 주미 한국 문화원은 성추행 사건을 파악하고도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가해자와 함께 피해자를 찾아가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청와대가 가해자를 서둘러 귀국시킨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청와대는 여론이 심각해지기 전까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고, 도리어 가해자가 거짓과 변명으로 가득한 '기자회견'을 하게 내버려 뒀다. 그런 뒤 귀국을 종용했느니 안 했으니, 팬티를 입었느니 안 입었느니 하며 가해자와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청와대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내용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은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느 누구라도 책임지고 물러난다는 단단한 마음가짐"을 주문했다. 그리고 '윤창중 재발방지 매뉴얼'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거라곤 '이번 일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기 뿐이다. '재발방지 매뉴얼'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 정말 이번 사건의 원인이 '매뉴얼'이 없어서 일어났다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윤창중 재발방지 매뉴얼'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할까? "'성공하라'고 인턴을 격려할 때는 손의 위치를 조심하라"? "아무리 바빠도 문을 열 때 최소한 팬티는 챙겨 입어라"? 당사자 윤창중은 기자회견에서 "여자가이드의 허리를 툭 한차례 쳤을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물론 윤창중 전 대변인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

"미국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생각에 저는 깊이 반성하고 있다. 그 가이드에게 이 자리에서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겠다."

그렇다면 매뉴얼에 이런 내용도 들어가야 할 것 같다. "한국과 달리, 외국에서는 여자를 허락 없이 만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굳이 이런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훈련시켜야 하는 존재라면 청와대 고위직보다 동물원에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윤창중 전 대변인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위로'가 아니라 '사과'라는 점도 배울 필요가 있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를 비교적 잘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이성을 허락 없이 만져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둘러싼 '문화적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강자가 약자의 생존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의 크기와 그런 착취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보장되는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윤창중이 성추행을 저지른 것은 자신의 행동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희생자가 자신의 악행을 '감히' 드러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자의 생존권과 내부 고발자의 신변이 보호되지 않는 한, '행동지침 매뉴얼'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분량으로 펴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윤창중은 청와대 대변인에서 '한국문화'의 대변인으로 영원히 살아남게 될 것이다.

윤창중의 공모자들

박근혜 대통령 미국 방문 기간 중 대사관 여성인턴 성추행 사건으로 경질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11일 오전 서울 종로 하림각에서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 전 대변인은 사건 발생 후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이 "성희롱에 대해서는 변명을 해봐야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귀국을 지시해 따랐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또한 자신은 여성 인턴에게 격려 차원에서 허리를 '툭' 쳤을 뿐 문화적인 차이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 "격려차원에서 툭 쳤을 뿐" 윤창중 '성추행' 부인 박근혜 대통령 미국 방문 기간 중 대사관 여성인턴 성추행 사건으로 경질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11일 오전 서울 종로 하림각에서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 전 대변인은 사건 발생 후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이 "성희롱에 대해서는 변명을 해봐야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귀국을 지시해 따랐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또한 자신은 여성 인턴에게 격려 차원에서 허리를 '툭' 쳤을 뿐 문화적인 차이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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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사회만 그런 게 아니다. 대한항공은 '라면 진상고객'에 대해 고발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한 일은 정보를 유출한 직원을 색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사의 잘못된 서비스 정책이 승무원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객으로부터 승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만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게 아니다. 권력자들이 이런 짓을 벌일 때는 항상 권력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일부 보수시민들은 사건을 공론화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종북'이라며 비난하고, 더 나아가 피해자 신상을 털며 '꽃뱀' 딱지를 붙이는 야만에 동참하기도 한다.

범죄를 고발하는 것이 '좌빨'이 되고, 성폭행 피해자를 비난하고 학대하는 범죄가 '애국'이 되는 나라, 우리는 이런 희한한 곳에 살고 있다. 왜곡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 전체를 망가뜨리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분단 상황을 악용한 이데올로기가 약자의 착취를 영속화하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극우 사이트 '일베저장소' 처럼 몰상식한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는 집단이 득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전하기 때문이다. 기득권 편에 서서 발언하는 데 용기 같은 건 필요 없다. 이들은 기득권을 옹호하는 대가로 자유롭게 발언할 권리를 얻는다. 이들은 보수회귀의 한국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받는 유일한 집단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착취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는 약자가 고통 받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강원랜드 직원이 '채용'을 미끼로 아르바이트생에게 키스를 요구하고 문자로 성희롱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 국민의 기초생계와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건, 강자의 악행, 범죄, 착취를 보장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실을 무시한 '정의', '상생', '경제민주화'는 권력 유지를 위한 빈 구호일 수밖에 없다. 사람을 멋대로 착취하는 사회에서 무슨 '정의'와'공존'을 말하는가. 이는 현 정부가 목놓아 외치는 '창조경제'와도 거리가 먼 일이다. 생존에 목 맨 전쟁터에 창의성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우리는 지금 분노하고 있지만, 분노는 쉽게 사그라질 것이다. 우리가 벌써 대한항공 사건과 남양유업 사태를 잊기 시작했듯 말이다. 그러면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되풀이될 것이다. 행동과 결합되지 않는 분노가 사회를 바꾸는 일은 없다.


태그:#윤창중, #대한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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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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