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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페이스북에 아는 분이 평화통일 산행을 한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책도 소개돼 있었습니다. <신불산>이라는 책이었습니다. 크게 확대해 보니 '빨치산 구연철 생애사'라고 돼 있었습니다.

구연철 할아버지는 신불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이었습니다.
▲ 신불산 책 주인공 구연철 할아버지 구연철 할아버지는 신불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이었습니다.
ⓒ 인터넷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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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월 초 강원도 평창면 산속 화전민 부모로부터 생명을 물려받은 저는 1970년께 부모를 따라 울산으로 내려와 살게 됩니다. 당시 지금의 동구 전하동 바닷가에 조선소가 들어서고 양정동 뻘밭에는 자동차 공장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염포에서 국민학교 다니다 조선소 공장이 있는 동구로 이사를 가고 전하국민학교를 마칩니다. 현대중학교를 졸업하고 현대공고를 졸업하고 현대종합목재에 다니면서 퇴직하고 또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들어가 10여 년 다니다 정리해고당하며 살다 이 나이가 됐습니다. 가난하게 살아 주눅이 든 채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사회현상에 눈뜨고 살아 오기도 했으나 아직 모르는게 더 많습니다. 사상범에 대해 궁금하게 여긴것도 아마 노조활동을 하면서부터 였을 것 같습니다. 1990년 초부터 노조활동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때는 주로 노학연대(노동자와 대학생의 연대활동)나 농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대학가에서 노동계로 널리 퍼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임수경이란 여대생이 대학생 대표로 북을 방문하고 문익환이라는 목사님이 북한을 방문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절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분에게 <완전한 만남>이라는 책을 보라해서 보게됐습니다. 사상범과 무기징역이나 사형 같은 말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소설책이었습니다. 짧은 단락으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모두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였습니다. 친인척 만나러 왔다가 붙들려 구속됐거나 간첩으로 몰려 사형수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돼 있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본 후 사상범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좌익이니 우익이니 알지도 못했지만 한반도 분단의 희생량이 되신 분들 같아서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살 때 그러니까 1999년께 저는 수소문해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곳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만난 그 할아버지는 남들이 빨갱이라 손가락질 받는 분이었습니다. 어려서 머리에 뿔이 달리고 얼굴은 도깨비처럼 붉고 한손엔 총, 한손엔 칼을 들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사람이라고 배웠기에 진짜로 그런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빨치산'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

우리는 구연철 할아버지가 활동했다는 산속으로 걸어 들어 갔습니다.
▲ 신불산 산속으로 우리는 구연철 할아버지가 활동했다는 산속으로 걸어 들어 갔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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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아버지는 자상했습니다. 어렵사리 찾아간 저에게 친절함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분은 작은 중고품 파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분은 대학 교수에게나 풍기는 듯한 품성을 지닌 그런 인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다만 얼굴만 알고 있었습니다. 몇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 북한 송환이 국가 차원에서 추진될 때 그분도 북한 고향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분은 북한에 가족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래전 일이고 10년도 더 지난 일이어서 그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곳에서나마 여생을 잘 보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4월 28일 오전 7시 일어난 저는 평화통일 산행가는 일행과 함께 신불산에 가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습니다. 큰 길가에서 모여 가기로 했습니다. 버스 타는 곳으로 가니 신불산 갈 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울산에선 모두 10여 명이 가고 신불산에 모이는 분들은 120여 명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동네(울산 동구)에서 시내를 거쳐 언양 신불산으로 갔습니다.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니 버스가 3대 왔습니다. 몇몇 분들은 구연철 할아버지를 보기 위해 대구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저 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빨치산 본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 전망대 저 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빨치산 본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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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는 올라갈 수 있는데 버스는 못 올라가게 했습니다. 참가자는 모두 버스에서 내려 걸어 올라갔습니다. 찻 길을 걷다 갑자기 오솔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곳은 두 사람 정도만 좁게 걸을수 있는 길이었고, 양 옆은 온통 낭떠러지 같은 급경사 지역이었습니다. 키만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곳엔 하얀색 3층 건물이 있었습니다. 전망대라 했습니다. 돌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누가 그랬는지 세워져 있지 않고 눕혀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파손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공비'라 쓰여 있는 것을 보니 빨치산을 두고 하는 말 같았습니다. 

"해방되면 뭐해, 미국이 어떻게 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빨치산을 어찌 여기는지 알수 있는 비석이다. "부순놈 죽인다" 살벌하네요. 아직도 이나라는 좌우 대립이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종전협정이 아니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할 거 같습니다.
▲ 전망대에 있는 비석에 써있는 글귀 대한민국 정부가 빨치산을 어찌 여기는지 알수 있는 비석이다. "부순놈 죽인다" 살벌하네요. 아직도 이나라는 좌우 대립이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종전협정이 아니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할 거 같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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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는 전망대에 자리를 잡고 행사를 진행하는 분들이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나눠주고 같이 먹었습니다.

"6·25 때 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그 땐 학교마다 군인들의 야전병원으로 쓰였어. 다친 군인들이 넘쳐났었지. 우린 유네스코 도움으로 만든 교과서로 공부했어. 교실을 군인들에게 빼앗겼으니 어떡해... 우린 숲에서 모여 공부했지. 칠판이라고 하는 게 큰 널빤지 세워놓고 숯으로 글을 썼어."

어느 다른 할아버지 곁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분이 자신이 겪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우린 무난하게 한 세월 보냈어. 구연철 선생이 나보다 10살 위인데 구 선생 세대들이 고생 많이 하면서 살았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면 뭐 해. 미군이 들어와 점령하면서 통치를 시작했는 걸. 나도 그때는 어려서 몰랐어.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됐지. 구 선생은 신불산에 들어와 스스로 빨치산 길을 걸은 후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 활동 4년 만에 토벌대에 붙잡혀 20년간 감옥생활을 했고, 감옥 안에서도 매일 폭력에 시달리다시피 했는데 풀려나서도 감시 때문에 힘들게 살았지. 구 선생이 해 온 고생은 말로 다 표현 못할거야"

마을에 같이 살아 오셔서 구연철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밥을 다 먹고 다시 모였습니다. 구연철 할아버지가 빨치산 활동 당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먼저 좀 수정해야 할 게 있어요. <신불산>이라는 책이 나간 뒤 '신불산 빨치산'이라 하는데 틀렸어요. 우리의 공식 명칭은 '태백산 빨치산'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는 강원·경상 남북을 거점으로 활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이 이승만을 앞세워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 처벌해야 할 친일파들과 야합해 토벌대를 만들어 미군정 통치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남한 단독정부수립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1948년경에는 일본놈들에게 치를 떨던 시기라 조선인민공화국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미군을 등에 업고 나타난 이승만 정권이 반공 정권을 표방하면서 반미세력을 진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무차별 공격에 견디다 못해 산속으로 들어가 활동 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불산을 일대로 해서 울산·양산·부산·경주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조말 대원군이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지냈다는 죽림굴과 파래소 폭포를 거점으로 활동했고 지금 우리가 있는 전망대는 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구연철 할아버지는 60년이 지난 이야기를 모인 사람들에게 해주셨습니다.
▲ 구연철 할아버지 구연철 할아버지는 60년이 지난 이야기를 모인 사람들에게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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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모두는 구연철 할아버지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 "여기가 바로 빨치산 본부 자리 였습니다" 참석자 모두는 구연철 할아버지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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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철 할아버지는 1950년 7월께 신불산에 들어와 당에 입당 절차를 밟고 빨치산이 됐다고 합니다.

"제가 빨치산이 되기로 결심한 데는 이유가 있었지요. 18살 이상되는 젊은이들을 헌병대가 돌아다니며 미군 트럭에 보이는대로 강제로 태웠어요. 군사훈련을 시켜 전쟁터로 보내려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렇게 붙들려가서 미군정과 친일세력 총알받이 되다 죽느니 산속으로 가서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각오로 항미 유격대 활동을 하는게 의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 지형을 배내골 이천삼리라 하는데 마을이 3개가 있어 붙혀진 이름이라 합니다. 산새가 험하고 사령부가 있는 이곳으로 오는 길은 우리가 걸어왔던 그 길 뿐이어서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지요. 아래 곳곳에 참호를 파고 경계를 섰습니다. 이 주변 고지마다 빨치산 부대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짧게 마치고 다음 둘러 볼 곳으로 갔습니다. 작은 길을 따라 가파른 산길을 내려갔습니다. 한참을 내려간 후 커다란 소나무 앞에 모였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빨치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신불산 일대에 토벌대를 보냈습니다. 신불산에서 많은 동지들이 죽었어요. 우리가 다 소탕이 안되자 미군은 신불산 곳곳을 화염방사기로 불을 질러 버렸어요. 우리가 활동하던 땐 온통 소나무였는데 다 불에타고 지금은 활엽수가 많아 졌어요. 그 중 유일하게 두 그루의 소나무가 살아 있는걸 보고 감격했지요. 남한엔 빨치산 활동하던 선생들이 40여 명 살아 있어요. 그분들과 함께 유격대 격전지를 찾아 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우리는 이 소나무를 통일송이라 이름지었어요."

"제대로 된 사회생활? 이사를 일곱 번이나 한 적도..."

빨치산 활동하다 토벌대에 의해 돌아가신 분들에 제를 올렸습니다.
▲ "영령들에게 제를 올립시다" 빨치산 활동하다 토벌대에 의해 돌아가신 분들에 제를 올렸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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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약식으로 영령들을 위로하는 제를 올렸습니다. 다시 전망대에 올라 쉬었다가 이번엔 파래소 폭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갈지자로 된 좁은 길은 가파른 곳이었습니다. 파래소 폭포에서 그시절 밥도 지어먹고 빨래도 하고 그랬다 합니다. 파래소 폭포는 울산 8경으로 이름난 곳이어서 사람들 발길이 많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구연철 할아버지도 다른 사람들 처럼 양말을 벗고 폭포수에 물을 담갔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잠시 구경하고 산을 내려갔습니다. 저는 내려 갈적에 구연철 할아버지 곁에서 걸었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이야기를 질문했습니다. 우선 감옥살이는 어땠는지 물어봤습니다.

"지리산·태백산·신불산 일대에서 6년 동안 유격대 활동과 내가 신불산에 들어온 지 4년 동안 많은 동지들이 토벌대에 살해됐어요. 다른 지역과 연락도 두절되고 했지요. 몇몇 남은 동지들은 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우리의 활동을 이어가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부산에 가서 시민증 발급받으려고 사진 찍으러 갔다가 사진관 사장의 신고로 붙잡혔지요."

구연철 할아버지는 한숨을 길게 쉬었습니다. "젊은 나도 힘든 산행을 잘 하시는거 보니 아직 몸이 건강 하신가 봅니다"고 말했더니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습니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골병이 다 들어 있습니다. 54년에 잡혀 들어간 후 74년까지 20여 년간 옥살이 하면서 전향서 안쓴다고 온갖 고문과 폭행을 받아서 몸이 성치 못해요."

구연철 할아버지는 감옥을 지옥이라 표현했습니다. 경찰이 불러다 고문이나 폭행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반 잡범 중 죄질이 무거워 무기징역이나 사형수를 감형해준다고 하는 말에 사상범을 쥐잡 듯했다는 것입니다.

"폭력배나 무기징역 받은 살인자로 복역 중인 사람만 모아 놓은 곳에 우릴 쳐넣어요. 그리고 전향서 받아내면 감형시켜 준다고 하니 우릴 말못할 폭행을 매일 자행했습니다. 기절하고 초죽음이 돼도 그들의 폭행은 멈추지 않았어요. 그렇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면서도 전향서를 쓰지 않았어요. 교도소 소장은 감형은 커녕 다른 교도소로 이감해 버렸어요.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죽도록 폭행한 사람 중 한 사람이 교도소 안에서 자살해버렸어요."

구연철 할아버지는 구속될 당시 20살 청년에서 출소 할 때는 40살 중년이 돼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자유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이 살았을까요?

"말도 마세요. 수시로 경찰에서 오라가라 해서 직장 생활도 제대로 못했어요. 또, 직장 구해서 다니나 싶으면 사장에게 나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으니 사장인들 저를 쓰려 했겠어요? 세월이 흘러 잠잠한가 싶었는데 어느날 통장이 와서 '당신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경찰이 매일 당신에 대해 확인 전화를 해?' 하고 저에게 와서 그런 후에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그러니 동네에서 살 수가 있어야죠. 이 동네 저 동네 이사를 일곱 번이나 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식에게 면목이 없다고 구연철 할아버지는 고개를 떨궜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위해는 고스란히 가족에게도 고통으로 다가섰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순박하고 작은 체구로 어찌 그리 살아 오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중간쯤 내려가시다 무릎이 아플 할아버지를 진행하는 분들이 승합차에 태워 가셨습니다.

"지금 정세, 해방 후와 다를 게 없다"

<신불산>이란 책을 보면 구연철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아 오셨나를 알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어린 나이로 일본 탄광촌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찾아 나서면서 한 고생, 해방된 후 다시 고향에 돌아와 겪은 사연들. 미국과 이승만과 친일관료들의 호강을 이어가기 위해 민초들은 수없이 살해되기도 했고 구속되기도 했던 상황에서 빨치산이 돼야 했던 처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고 구속된 폭력배와 양아치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들으며 감옥살이를 해야했던 사연. 출소하고서도 자유롭지 못했던 인생 길. 어느덧 그분의 나이 84살이 됐다고 합니다.

"60년 전 산에 있을 때 품었던 희망을 저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산행을 즐기러 온 게 아니라 당시 치열했던 항미 유격대 활동의 정신을 가슴깊이 새기려고 온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정세는 해방 전후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구연철 할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온 후 뒷풀이 마당에서 그렇게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 냈습니다. 1950년대 좌우대립으로 전쟁까지 발발된 그 당시로 시계가 멈춘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망대에 세워진 토벌대가 공비를 소탕했다는 작은 비석문을 보면서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토벌대와 항미 유격대의 격전도 60년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한반도 좌우대립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신불산 평화통일기행 하면서 알 거 같았습니다.

저는 한반도에 사는 같은 말을 쓰는 사람 끼리 왜그리 서로 헐뜯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상이나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아 가는 것일진데 말입니다. 휴전협정을 중단되고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흘러 넘치기를 바라봅니다.

평화통일 산행은 130여명이 모인 가운데 잘 마무리 했습니다.
▲ 전쟁반대, 평화협정 체결 평화통일 산행은 130여명이 모인 가운데 잘 마무리 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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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불산, #구연철, #빨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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