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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 '민촌'으로 더 많이 알려진 마을입니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 '민촌'으로 더 많이 알려진 마을입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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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놈들 맨날 불바다 만든다 해쌌고, 내 귀에 딱지가 앉았데이."

민촌에 사시는 김분겨 할머니(78)는 "요즘 북한이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데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옛날을 회상하십니다. 그러실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할머니는 북한에서 쏟아내는 선무방송을 확성기를 통해 들으며 민통선 산골마을에서 53년을 사셨습니다.

'민촌' 가는길, 4월7일 말고개에는 초봄인데도 폭설이 내렸습니다.
 '민촌' 가는길, 4월7일 말고개에는 초봄인데도 폭설이 내렸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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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10시, 민통선 안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강원도 화천과 철원의 경계를 이루는 '말고개'를 넘었습니다. 간밤에 전국적으로 많은 봄비가 내렸는데 이곳에는 밤새 함박눈이 내린 모양입니다. 순간 '겨울용 타이어를 너무 일찍 교체했구나' 하는 후회를 했을 정도니 말입니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노크도 없이 노인정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에 모여 있던 20여 명의 노인들이 경계심 그득한 눈으로 일제히 나를 쳐다봅니다. 점심으로 손칼국수 요리를 준비하시는 모양입니다. 구수한 국물 냄새가 거실에 진동하고 한쪽에서는 할머니들이 연신 나무방망이를 이용해 밀가루 반죽을 밀고 계십니다.

민촌 노인정에서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나무 방망이로 말가루 반죽을 말고 계신 할머니들을 만났습니다.
 민촌 노인정에서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나무 방망이로 말가루 반죽을 말고 계신 할머니들을 만났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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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이 뒤숭숭하잖아요. 그래서 할머니들 잘 지내시는지 취재하려고 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뭔 뉴스 기자? 들어오지 말고 여서 기다려 보그레이."

취재를 여러 번 다녔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입니다. 모두 외지인인 나를 경계하는 눈빛입니다. 미리 연락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방문한 결과겠지요. 이윽고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시기에 다시 한번 온 목적을 말했습니다.

"그래 그런 거라면 저기 저 할매한테 묻그레이, 고생 젤 많이 했제."

분명히 이곳은 강원도 철원 땅인데 사람들은 모두 경상도 사투리를 씁니다. 아니 경상도 억양은 맞는데 정확히 어느 곳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말투입니다.   

태풍에 전 재산 잃고 '민통선' 안으로 집단 이주

"그때 아마 예순여댓 집이 이리로 왔제. 내 나(나이) 스물다섯 때인 갑다." 

김분겨 할머니가 24살 되던 해인 1959년, 사라호 태풍은 경북 울진군 원정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집이며 살림살이 할 것 없이 모두 폭우에 쓸려갔습니다. 그나마 농토가 있는 사람들은 이듬해 다시 농사를 지으면 되니 희망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작농을 하던 사람들과 날품팔이를 하던 이들은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겁니다.

"땅을 준다기에 일루 왔지. 누가 오고 싶어 왔겠노."

강원도는 울진군 원정면 마을사람들에게 농토를 준다는 조건으로 거주이전을 제안했습니다. 울진은 경북인데 왜 강원도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까요? 이유는 1959년에는 울진군이 강원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울진군은 1963년에 경북으로 편입됐습니다.

"고향 안 그리운 사람이 우뎃겠노(어디 있겠나). 안 죽을라꼬 억척스럽게 살았제."

김분겨 할머님(가운데) 일행, 이 분들이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곳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든 분들입니다.
 김분겨 할머님(가운데) 일행, 이 분들이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곳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든 분들입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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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김 할머니를 비롯한 66가구 364명의 사람들이 군용차량을 나누어 타고 춘천과 화천을 지나 이곳 민촌까지 오는 데 꼬박 3박 4일이 걸렸답니다. 군부대에서 제공한 된장국과 보리밥은 겨우 아이들이나 먹일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지만, 어딘지는 모를 '신세계'로 간다는 희망 때문에 힘든 줄 몰랐다는 게 김 할머니의 말씀입니다.

"대포소리, 총소리가 젤 무서웠제. 또 이북방송을 들을 땐 벌벌 떨었제."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 마을은 민통선 초소를 통과해야 출입이 가능한 곳입니다. 그 정도로 외부인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곳입니다. '마현1리'라고 말하면 어딘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들도 '민촌' 하면 쉽게 아는 곳이 이 마을이기도 합니다. 마을이름이 '민촌'으로 된 건 '민간인들이 모여 산다'는 뜻으로 당시 군인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랍니다.

김 할머니 일행이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온통 버드나무와 억새풀, 칡넝쿨, 싸리나무 밭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 불모지였습니다. 민통선 안쪽이다 보니 후방 울진에서 살다온 이들에게 밤낮없이 들리는 대북방송과 대남방송, 그리고 포사격 소리는 불안함 그 자체였습니다.

군부대에서 지원해준 천막과 가마니, 그리고 식구들이 이고 지고 온 양재기(양푼)가 유일한 생활도구였습니다. 전방의 4월은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춥습니다. 그런 날씨에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천막을 치고, 작업복을 접어 베개를 만들고, 군부대에서 지원해준 담요 한 장을 덮고 잠을 청했습니다.

많게는 10명이 넘는 식구가 한곳에서 잠을 자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아들을 위해 담요를 밀어주고, 그 아들은 또 어린 자식을 위해 양보해야 했으니 어른들은 늘 한데서 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위에 웅크리고 있다가 겨우 눈을 붙이려는 새벽, '꽝' 하는 소리에 일어난 식구들은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야간 포사격 소리란 것은 날이 밝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천막에 가마니로 추위 막고... 강제노동에 '매질'도 당해   

민촌마을 입구에 새겨진 입주 기념비
 민촌마을 입구에 새겨진 입주 기념비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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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 가지고 뭔 땟거리가 됐것노. 쫄쫄 굶었다는 기 맞는 말이제. 맞기도 많~이 맞았제."

군인들은 주민들이 도착하자마자 버드나무, 싸리나무, 잡풀을 베는 노동을 시켰습니다. 자발적 참여도 아니었고,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소집해 한정된 시간에 주어진 노동량을 마치도록 했으니 강제노동이란 표현이 맞겠습니다. 배급으로 주는 보리밥과 된장 덩어리는 그들의 허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배고픔을 못 이겨 지정해준 지역에서 몰래 벗어나 더덕이라도 캘라 치면, "지뢰 밟아 뒈지려고 환장했냐" 또는 "이북으로 넘어가려고 한 것 아니냐"는 심한 욕설을 듣고 매도 맞아야 했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주어진 분량의 작업을 하지 못해도 남정네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군인들로부터 소위 '빠따'를 맞아야 했습니다.

"우린 이승만이가 대통령을 물러났다는 것도 거반(거의) 10년 뒤에나 알았다 아이가."

김 할머니 옆의 한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민촌은 민통선 안이라 외부인 출입은 철저히 통제된 곳입니다. 모두 가난 때문에 이곳에 온 사람들이라 라디오를 소유한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밤늦도록 산을 깎아 논밭을 만들고, 곡식을 심고, 김을 매는 반복되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이듬해 1월, 군인들이 흙집을 지어줄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텐트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여름이면 극성맞은 모기를 쫓느라 피워놓은 '모깃불' 연기에 콜록이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마을사람들은 마른 검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혹독한 추위를 경험한 이들에게 이것이 추위를 이겨낼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다람쥐도 아닌데, 흙벽돌집에서 검불을 덮고 잔다는 기…."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사람들의 초기 정착 모습(DMZ박물관)

김 할머니가 웃으면 말씀하시지만, 당시엔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어느 한 집에서 그러고 산다면야 웃을 일이지만, 이 마을사람들 모두 그렇게 사는데 누가 웃었겄노."

그 무렵 옆집 김씨가 서울을 다녀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김씨 집에 모여 김씨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김씨의 말이 곧 뉴스였기 때문입니다.

"여인네들과 아이들은 연속극 듣는 게 큰 낙이었다 아이가."

차츰 생활도 나아지고 라디오를 구입한 가구도 생겼습니다. 한낮 뙤약볕에서 일을 하던 아낙들은 점심시간을 앞당겨 서둘러 라디오가 있는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전 11시 40분, KBS 제1라디오에서 나오는 연속극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방송은 모두 잡음이 심해서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 마을 사람들의 말입니다. 

"밤이 되면 이상하게 '쉐~' 하는 잡음이 무척 심했제."

FM방송이 없던 시절, 당시 전방 마을은 밤만 되면 남북의 전파방해로 라디오 방송청취가 곤란할 정도로 잡음이 심했답니다. 그러니 낮에 연속극을 듣는 것이 이 마을사람들의 최고의 낙이고 행복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이 철원에서 젤 잘 산다"

민촌마을 사람들은 맨손으로 논과 밭을 일궈 이제 참 잘 사는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민촌마을 사람들은 맨손으로 논과 밭을 일궈 이제 참 잘 사는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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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이 철원에서 젤 잘 산다."
"에이 거짓말 마세요. 신철원도 있고, 동송읍도 있는데 잘 살긴 뭘…."
"농촌마을 중에서 젤 잘 산다는 말이다!"

대꾸를 한 내게 그 할머니는 느닷없이 소리를 버럭 지르십니다. 오죽하시겠습니까! 잡초, 잡목 투성이였던 산을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일궈 이만큼 잘 사는 농촌마을로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촌마을 노인들의 손은 두꺼비 등처럼 투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할머니 말씀처럼 철원에서 제일 잘 사는 마을 '민촌'. 쌀을 많이 생산해서도 아니고, 매년 하우스 농사가 잘되어서도 아닙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라면 철원에서가 아니라 전국에서 제일 잘 사는 마을이겠습니다.

입주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
 입주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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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먹고 가라."
"아녜요. 와수리에서 점심약속이 있어서 가야 해요."
"그러면 니 앞으로 우리 마을 올 생각도 말그레이."

아무리 바쁘다고 말해도 마을회관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칼국수 먹고 가라'고 잡으시는 할머님께 '다음에 꼭 들르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이라 경계하시더니,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열자 나를 몇 십 년 만에 만난 자식 대하듯 하십니다. 

"그라믄 이제 우리 말(마을) 테레비 나오는 거제?"
"그게 아니고 인터넷 뉴스에 나와요."

외로웠던 사람들입니다. 그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사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순수함입니다. 손가락이 문드러지도록 불모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자부심입니다. 남들이 '민촌'이라 부르건, 울진 난민들이 사는 곳이라고 '울진촌'이라 비웃건, 이들은 스스로의 행복을 일궈낸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기자는 화천군청 관광기획 담당입니다.



태그:#민촌, #마현1리, #철원군, #김분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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