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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나, 낙태했어>(다른 출판사 펴냄)는 1987년에 설립, 그간 여성의 인권 관련 다양한 활동을 해온 한국여성민우회가 기획한 책이다.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 25명을 인터뷰하고 왜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낙태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낙태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나에게 무엇인가 등의 물음을 통해 우리 사회 낙태 관련 문제들을 짚어본다. 태아의 생명존중을 위해 여성 혹은 개인의 생명은 나몰라라 하는 국내낙태관련현행법의 문제점도 이 책은 묻고 있다.


정말 제가 이거를 사회에 말해야겠다 싶었던 게 어느 곳이든 간에 수술은 다 해줘요. 근데 상담한 데서 부모님 데리고 와라, 부모님 데리고 와라, 이런 분들이 되게 많았어요. (중략) 부모님 안 데리고 와도 되니까 두 배 정도의 돈을 요구하더라는 거예요. 부모님을 안 데리고 오는 대신에 돈을….훨씬 많이 요구하는 거예요. 100만 원 가까이 요구를 하고, 그래서 제가 인터넷에 (낙태 가능한 병원을 찾는 내용으로 글을) 올렸는데 답이 되게 많이 왔어요. 수술해 준다고 하는 병원에서 쪽지가요.(…) 거기서는 그니까 병원에서 부르는 게 값인 거에요. 그리고 다 문의했을 때 단 한 군데도 자기네는 수술을 하지 않는다는 병원이 없었어요. 제가 거의 정말 열군데 갔거든요. 열군데 모두 다 수술을 해 준다고….(중략) 의사도 병원에서도 불법이고, 나도 불법이라 다 같이 하는 건데 의사는 불법이니까 돈을 더 내야 된다 그러고, 같이 불법을 저지르면서 되게 모순이 많아요. 어차피 할 건데……. 저는 병원에 들어갔을 때 가격하고 미성년자니까 부모님 안 모시고 와서 백만 원대의 수술비를 요구를 하고, 근데 그 피해자가 저만 있는 게 아닐 거에요. ― <있잖아… 나, 낙태했어>에서


현재 대학생인 이 여성은 10대 후반에 낙태를 했다. 이 여성은 여러 산부인과를 떠돌며 상담을 하다가 불범임을 이용해 높은 비용을 요구하는 현실에 낙담하다가 다행히 남자친구 어머니의 도움으로 낙태를 할 수 있었다.

<있잖아… 나, 낙태했어>
 <있잖아… 나, 낙태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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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여성이 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혹은 턱없이 비싼 낙태 비용 때문에 낙태할 수 있는 때를 놓치거나, 낙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의 현행법은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나 혈족 간 임신 등과 같은 몇 가지 이유 있는 임신 시의 낙태만을 허용한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 '낙태'는 불법으로 규정, 적발되면 최하 1년에서 최고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 낙태를 한 당사자도 시술한 사람도 처벌을 받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여성의 고백처럼 낙태를 해야만 하는 여성의 절박함을 악용하는 의사들 때문에 한쪽은 낙태가 불법인 덕분에 더 많은 돈을 벌고, 한쪽은 피해자가 되고 만다.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다는 것, 낙태를 범죄화 한다는 것은 누군가 돈을 더 벌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의 단순한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한 생명을 존중하고자 역시 존중받아야 하는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임신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그녀

책을 읽는 내내 지난해 12월 안전하지 못한 낙태시술을 받던 중 죽은 한 여고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0대인데다가 미혼이었던 그 여고생이 임신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리하여 출산과 낙태에 대해 조금이라도 일찍 누군가와 상의를 했고, 보다 안전한 시기에 보다 안전하게 낙태수술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결국 죽고 말았지만 난 그 여고생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여고생이 낙태를 하지 않고 아이를 출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혼모란 우리 사회의 주홍글씨 낙인과 접어야만 하는 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10년 산부인과 의사들로 조직된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고발과 국가의 저출산 정책이 무섭게 만났습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낙태를 하고 있는 병원 4곳을 고발했고, 보건복지부가 나서 낙태신고센터를 개설하는 등 낙태 처벌이 강화되었습니다. 몇 개월간 시술비용이 10배 넘게 뛰었고, 중국 등지로 소위 '원정 낙태'를 가는 여성들도 생겼습니다.(…) 60년대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낙태'를 일종의 피임법으로 퍼뜨렸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2010년, 정부는 저출산이라는 명목으로 '낙태'는 처벌해야 할 불법행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이 흘렀지만 여성을 애 낳는 '도구'로 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낙태에 대한 이 사회의 시선도, 낙태하는 여성의 상황에 대해서도 폭력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처벌로 낙태율을 낮출 수 있다는 정부의 태도는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외면합니다. - <있잖아… 나, 낙태했어>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생아로 태어나 9살 때 강간을 당하고, 14살에 아이를 낳는 등과 같은 불행에도 토크의 여왕이 된 오프라 윈프리 등과 같은 인물들의 예를 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반면 어떠한 경우에도 낙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과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오프라 윈프리처럼 살 수 있을까? 과연  오프라 윈프리처럼 극복해내는 것만이 옳은가? 솔직히 같은 여성으로서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오프라 윈프리 운운하는 이야길 듣노라면, 화가 난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 같아서.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그녀의 불행이 여성 누구나 당연하게 겪을 수 있는 것처럼 혹은 당연하게 견뎌내야만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 그와 동시에 9살 아이를 강간한다거나 14살 아이를 임신시키는 파렴치한 성범죄와 도덕부재를 은연 중 정당화시키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오프라윈프리,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까?

혹시 모르겠다. 우리나라보다 성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어서 성과 관련된 주홍글씨 낙인이 덜 무거운 그들 나라에선, 우리보다 사회복지제도가 훨씬 잘 구축되어 있다는 그들의 현실에선 오프라 윈프리가 얼마든지 가능할지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런가?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낙태나 미혼모 등과 같은 성의 상처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많은 사람들이 낙태는 마치 대부분 미혼 여성들의 성적 '문란'이 원인인양 쉽게 치부하지만 한국의 경우 전체 낙태율에서 기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60퍼센트에 달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제대로 피임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원할치 않은지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수술하게 되는 대부분의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제 낙태 처벌은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이미 개인의 선택을 넘어선 '강요된' 결정이고,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제대로 양육할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 미혼임에도, 장애아를 낳아도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인 토대를 말하기에 앞서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정부 시책은 지극히 폭력적입니다. 이것은 분명 폭력입니다. - <있잖아…나, 낙태했어>에서

낙태 관련 우리의 현행법(책의 뒤에 실려 있음)은 배우자에 대한 불신이나 육아에 대한 공포 등처럼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입장, 경제적 문제 등으로 더 낳을 수 없는 가정의 사정,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청소년들의 성교육과 미혼모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등과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생명존중'을 앞세워 낙태를 불법으로 묶음으로써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현행법 과연 옳은가? 머리말과 맺음말 등 극히 적은 분량만을 제외, 책의 거의 대부분을 낙태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채운 이 책은 임신과 출산 혹은 낙태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을 가장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그리고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를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열쇠를 제시함은 물론일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곳
▲한국여성민우회:02-737-5763▲성폭력상담소:02-335-1858▲한국성폭력상담소:02-338-5801~2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02-593-5910▲한국여성의전화:02-3156-5400▲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02-734-5007,3007▲유쾌한섹슈얼리티 인권센터:0505-991-8075▲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02-2676-1318▲이유명호한의원:02-719-4231(책에는 각 단체 누리집 소개되어 있으나 생략 정리함)
책의 뒷부분에 우리의 낙태관련현행법 전문을 시작으로 다른 나라들의 낙태허용규정, 외국의 인공임신중절 관련 규정, 국가별 임신중절 허용기한 및 임신중절 확인과 상담 절차 등을 실음으로써 우리의 낙태관련현행법의 부실을 비교할 수 있게 했다.

또, 임신과 낙태관련 자주 듣는 질문들, 낙태 관련 도움 받을 수 있는 단체(박스기사 참고) 등을 실어 누구나 참고하고 도움 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낙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이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여성으로서 때때로 뜻하지 않은 임신을 불안해 하면서도 말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지 않은, 즉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임신을 한 주변의 여고생을 동정하는 한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날라리'로 간주해 내 딸과 사사로운 말 한 마디라도 섞는 것을 경계하면서, 제대로 키울 형편도 되지 못하면서 아이만 낳는 사람들을 경멸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런 내게 이 책은 낙태 관련 참 많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낙태는 반대하지만, 여성과 개인의 입장과 사정, 사회적인 문제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국내낙태관련현행법'은 더욱 간절하게 반대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아울러 낙태에 관한 가장 솔직한 이 책이 태어날 생명을 살림과 동시에 생명을 잉태한 여성 역시 살릴 수 있는 그런 현행법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고, 낙태를 무조건 불법으로 묶는데 앞서 누구나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마련하는 계기의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있잖아… 나, 낙태했어> ㅣ사단법인 한국여성민우회 (지은이) | 다른 | 2013-02-20 ㅣ11,000원



있잖아… 나, 낙태했어

사단법인 한국여성민우회 지음, 다른(2013)


태그:#낙태, #한국여성민우회, #미혼모, #저출산국가, #출산장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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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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