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동춘 / 한겨레출판 / 2013
▲ <대한민국 잔혹사> 김동춘 / 한겨레출판 / 2013
ⓒ 한겨레출판

관련사진보기

내가 맨 처음 마주했던 국가폭력의 모습은, 어렸을 적 동네에 붙은 한 전단을 통해서였다. 그 전단은 고문으로 죽었다는 한 대학생의 시신의 처참한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며 국가를 규탄하는 것이었다.

매우 적나라했던 사진의 충격이기도 했지만, 어린 생각에도 고문으로 사람이 죽는 것에 무척 공포를 느꼈었다. 이와 함께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국가폭력은 역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었다.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오롯이 광주에서 보냈던 나는, 주위 어른들에게서 챙겨 들었던 이야기들과 TV에서 본 참혹한 광경들 때문에 지금도 그때의 정서와 분위기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일 때, 국가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커다란 공포였다.

하지만 십 대를 보내고, 이십 대가 되어서는 국가의 존재감을 크게 못 느끼며(어쩌면 느끼지 않으려 했을 수도) 살아갔다.

나의 이십 대, 청춘의 시기를 지나며 만난 대통령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그들이 진정 훌륭한 대통령이었는지는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지만, 그래도 그들은 적어도 폭력과 억압의 주체이거나 독재자 같은 대통령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래 90년대 학번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특별한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딱히 없어도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잘 살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MB, 그 남자가 등장한 것이다.

결혼과 함께 만난 대통령은 바로 MB였다. 촛불집회 이후 작심한 듯한 MB는 자신의 반대세력이라 생각되는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려세우며 불법사찰과 공권력을 동원해서 이들을 해했다.

근무하는 곳이 바뀌면서 출퇴근 때 광화문과 시청 광장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미FTA 반대 집회에 참석한, 같은 교회에서 함께 하는 청년들을 퇴근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시청 광장에 들르기도 했다. 끝까지 함께 할 순 없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데 그만 물대포까지 맞았다는 것이다. 황당했다. 그 추운 날 물대포를?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국가의 폭력이 실재가 되어 내 바로 옆까지 닥쳐왔음을 절감했다. MB를 통해 다시 국가폭력을 마주하게 되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비록 간접경험에 불과했으나 폭력의 그늘이 이처럼 서늘한 것임을 몸소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제야 국가폭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신음이 내게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쌍용자동차 해직노동자들을 비인간적으로 강제진압하고, 남일당 힘없는 망루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입주자들에 시가전투의 장면을 방불하는 기상천외한 컨테이너 진압을 불사한 공권력의 폭력을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그 피해자들, 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져 갔던 것에 뒤늦게 충격을 받았다.

저자는 MB가 저지른 폭정의 현재와 지난 현대사의 비극 사이에서 벌어지는 국가폭력을 평행이론처럼 꼬집어 낸다. 저자는 파편처럼 이리저리 쏟아낸 나의 작은 각성의 조각들을 단숨에 꿰어 정리해준다. 브레이크 없는 폭력의 역사를 멈추고, 진정한 반성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이다.

"과거 국가 폭력에 맞서다 희생당했거나 의로운 활동을 하다가 이런저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국가가 기억하고 애도해야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용기 부족으로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역사의 흐름에 무임승차를 하고서도 희생당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배은망덕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염치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자신이 지금 누리는 편리와 이익이 어디서 왔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나름대로 보답을 해야만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야수들의 천국이 될 것이다." - <대한민국 잔혹사> / p.265 

여기서 우리가 꿈꾸어야 할 공동체는 공감의 공동체이다. 사실 이 사회 속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심판을 받지 않는 가해자가 여전히 넘쳐나는 것은 결국 피해를 보는 약자들을 외면하고 방관하는 대다수의 나머지 사람들, 우리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는 공감과 배려가 자리할 곳이 없다. 이렇게 귀를 닫고, 숨죽여 살기만 하다가 다음 세대, 우리의 자녀들에게 내가 물려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30년이 넘도록 약자들에게 무관심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아프게 돌아보며, 이제는 최소한 불의와 폭력에 욕지거리라도 내뱉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물론 개인들의 각성만으로 될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 잔혹사>에서 상당한 분량의 폭력 에피소드를 담당하고 있는 자가 바로 박정희인 만큼, 이제 18대 대통령이 된 박근혜의 회심이 요구되는 때이다. 그러나 지금은 박근혜에게 더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만큼의 큰 정치역량과 마음을 아직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그녀에게, 솔직히 나는 기대가 없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직접 나서서 유신 권력의 폭력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에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을 시작한다면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구기득권을 향한 욕망을 포기함으로, 질기고도 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폭력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내는 대통령. 자신의 아버지의 잘못을 스스로 짊어져서 극복하고 뛰어넘는 대통령. 잔혹한 현대사 속에서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멋진 대통령을 가지는 나라에서, 이젠 살고 싶다. 간절히.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개인 블로그(http://dressing.tistory.com)에도 포스팅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잔혹사 - 폭력 공화국에서 정의를 묻다

김동춘 지음, 한겨레출판(2013)


태그:#대한민국 잔혹사, #김동춘, #국가폭력, #정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