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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이 임박한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지난 6일 오후 국회 국방위에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중인 김관진 국방부장관을 대신해 정승조 합참의장이 업무보고를 하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북한 핵실험이 임박한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지난 6일 오후 국회 국방위에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중인 김관진 국방부장관을 대신해 정승조 합참의장이 업무보고를 하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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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대외선전용 주간지 <통일신보>를 통해 북 핵실험 우려가 미국의 '짐작'에 불과하다고 밝힌 가운데, 핵실험 감행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던 북한의 태도 변화에 배경이 무엇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의 웹사이트 '우리 민족끼리'는 지난 9일 주간지 <통일신보>를 인용 "미국과 적대세력은 공화국이 제3차 핵실험을 한다고 지레짐작하면서 그것이 현실화되는 경우 선제타격까지 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우리 민족끼리'는 또 "(미국의 대응에 따라)초강경 조치를 취할 것"이라면서도 "이번에 취하게 되는 '국가적 중대'조치도 미국의 침략위협에 대응해 민족의 이익을 지키자는 것이지 그 누구를 위협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지난달 24일 발표한 북한 국방위원회의 성명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 성명에서 북한은 "(앞으로) 진행할 높은 수준의 핵실험은 미국을 겨냥하게 될 것"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유화적 제스처에 대해 북한 핵실험 시기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우리 정부와 미국에 혼란을 주거나 국제 사회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다만 국제사회가 3차 핵실험이 북한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만큼, 이런 노력들이 적어도 핵실험 시기를 늦추는 등 북한의 태도 변화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을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과거 북한의 핵개발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

소련의 지원으로 시작된 북한 핵 개발

북한의 핵개발은 지난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5년 4월 과학원 2차 총회에서 원자 및 핵물리학 연구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북한은 이듬해 6월 소련에서 개최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학술회의'에 과학원 과학자 6명을 파견하면서 핵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에 핵물리학원을 설립해 핵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1963년 6월에는 영변에 소련의 도움으로 2MW 규모의 IRT-2000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했다. 이후 북한은 독자적으로 핵 능력을 발전시켜 시험용 원자로의 규모를 7MW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1985년 12월에는 소련과 북한 간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경제·기술협력협정'이 체결됐다. 440MW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 4기를 북한에 건설하는 것을 주요골자로 한 이 협정을 통해 소련은 발전소 건설 조건으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요구했고 북한은 이를 받아들였다.

1982년 미국의 정찰위성에 의해 북한의 비밀 핵무기개발 시설이 처음으로 포착됐다. 영변에서 원자로로 추정되는 구조물의 건설현장과 고폭약 실험 흔적 등이 발견된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시설들이 순수한 전력생산용이라고 주장했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의 해체와 함께 북한의 핵개발은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북한은 소련과의 합작으로 추진한 경수로 사업을 러시아에 들어선 옐친 정권과의 마찰로 포기했고, 러시아는 협정이행 중단을 선언하고 자국 핵 기술자들을 북한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북한의 핵문제 발발과 북미 제네바 합의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 이루어진 북한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 위치.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 이루어진 북한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 위치.
ⓒ 오마이뉴스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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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IAEA는 북한의 핵사찰을 시작하고, 북한은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에 합의했다. 그러나 IAEA가 정밀조사를 통해 북한의 핵 의혹을 다시 제기하자, 북한은 1993년 돌연 NPT 탈퇴를 선언하고 IAEA는 이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하면서 본격적인 '북핵 위기'가 대두됐다.

결국 1994년 10월 북미간 제네바협정에 의해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했고, 대신 미국은 북한의 전력시설을 위해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경수로 건설이 당초 약속보다 지연되고, 2001년 미국의 부시행정부 등장 이후 북미간 갈등이 고조되자, 북한은 핵시설 가동 재개를 밝혀 북한의 핵문제가 다시 재연되었다.

북한은 2002년 재차 NPT를 탈퇴하고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했고 그해 10월 국제적인 주목 속에 핵개발을 시인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한 6자회담 태동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2003년 4월 시작된 북·중·미 3자회담은 이후 한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으로 확대돼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대가로 체제보장과 경제적 지원 등을 제공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채택했지만, 2005년 11월 5단계 회담을 마지막으로 공전 상태다.

북한은 그동안 두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긴장상황은 최고조에 도달했고, 유엔안보리는 대북제재결의 1718호를 채택해 제재 수준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2009년 5월 북한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유엔안보리는 또 다시 북한의 핵실험을 규탄하며 강력한 대북 제재 조치를 담은 결의안 1874호를 채택했지만 북한의 핵개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그:#북 핵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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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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