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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잎구엔 생가터 경위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설명해 두었습니다.
▲ 고 육영수 생가 입구 대문 잎구엔 생가터 경위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설명해 두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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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9일 화요일 아침 7시 저는 남목서 1만 원 짜리 관광을 하려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고 육영수 생가 방문' 광고지를 보았고 호기심이 생겨 가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아침 7시경 출발한 관광버스는 3시간 정도를 달려 대전옆에 있는 충북 옥천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옥천마을 고 육영수 여사 생가 터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하루 관광버스가 200여 대나 온다고 합니다. 육여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 된 후 엄청 인기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30분이면 다 돌아볼수 있을 것입니다. 방문객이 많은 관계로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가이드가 그렇게 말하면서 버스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입구엔 고 육영수 여사 생가 터 임을 알리는 큰 알림판이 있었고 옆으로 입구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었습니다. 입구 옆엔 방문객에게 쓰라고 방문록을 펴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록에 기록을 했습니다. 그곳엔 이미 많은 관광버스가 도착해 있었고 생가 터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대부분 나이 많은 어르신 분들이었습니다.

방이 99칸이라더니 정말 으리으리 한 대궐같은 집이었습니다. 모두 기와집으로 되어 있었고 큰 연못도 보였습니다. 여기 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유품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집 밖에 그녀의 사진과 그녀의 남편(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녀에게 쓴 편지글 같은 것만 큰 액자로 진열해 놓은게 다였습니다.

"귀 댁 딸이 국가의 큰 그릇이 될 것"... 스님의 이야기

입구에 있는 설명 간판 그림입니다.
▲ 고 육영수 여사 생가 터 입구에 있는 설명 간판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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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은 지은지 얼마 안 된 건물들 입니다. 74년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쓰러진 후 그 충격으로 부모님도 모두 돌아 가시고 가족도 모두 나가 살아서 이곳은 폐가가 되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니 흉가가 되어 후손들이 건물을 모두 헐어내고 땅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99년 후손들이 옥천군청에 기증했습니다. 주민들이 생가 복원을 해야한다고 진정을 하고 그런 운동이 2004년 생가 복원을 추진하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건물 한 채 짓고 다음해 또 한채짓고 해서 2011년에야 복원이 완료되어 이렇게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가는데 누군가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남자분이었고 한 사람은 여자분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고 육영수 여사의 삶과 인품에 대해 관광차 온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성분이 안내하는 이야기를 잠깐 들었습니다. 제가 돌아본 그곳은 정말 큰 한옥 저택이었습니다. 설명문엔 고 육영수 여사가 어린시절 어떻게 보냈다는 내용도 있었고 잠자던 방도 있었습니다.

육영수 생가지
 육영수 생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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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생가지 설명에 의하면 육영수 여사가 1925년 그 집에서 태어나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곳은 1600년대부터 정승들이 살았던 저택으로 1894년에 전형적인 충청도지역의 상류주택 양식으로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고생한 번 않고 자란 양반집 귀수였네요.

"1950년 전쟁중에 두분이서 결혼했습니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셨는데 결혼을 반대했던 육영수 여사 아버님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훗날 왜 그사람과 결혼 했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우리 집에 인사차 왔는데 그 때 멋진 군복입고 군화를 벗는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떤 스님이 이곳에 시주를 왔다 가면서 "귀 댁 딸이 국가의 큰 그릇이 될 것" 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건물 하나엔 그녀의 사진과 작품, 우표, 서신을 크게 만들어 액자로 걸어 놓았습니다.
▲ 한 건물에 사진과 그녀의 작품 전시 건물 하나엔 그녀의 사진과 작품, 우표, 서신을 크게 만들어 액자로 걸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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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듣고 싶었지만 30분 관람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아야겠다 생각하고 안내자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저는 1974년 그 때 11살이었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그 해 8월 15일 청와대가 주최한 광복절 행사장에서 문세광이라는 조총련계 제일교포가 쏜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육영수 여사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아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보니 고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자가 문세광이 아니라 청와대 경호원 중 누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 관광온 사람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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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육영수 여사가 숨을 거둔지는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40분경 이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39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충분히 의심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죽은자는 말이없다"는 말이 있듯이 진실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또 방송에 출연한 사람도 짐작하는 내용의 인터뷰 뿐이었습니다.

방송에 보면 문세광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광복절 식장에서 끌어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청와대 관계자가 나서서 "장관을 만나러 왔다" 며 그를 들여 보내라 했다는 것입니다. 방송 관계자는 문세광을 안으로 들여보낸 당시 청와대 관계자를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그는 "세월이 오래 지나서 나는 아는게 없다. 다 잊어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1월 29일 그녀의 생가를 방문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난 후 고 육영수 여사에 대해 든 생각은 그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참 아쉽기도 합니다. 그녀가 군사독재자로 또한 친일파로 분류되는 남편이 아니라 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과 만났더라면 더 오래 살면서 더 많은 봉사활동으로 삶을 살다 하늘이 준 생명을 다해 살다가 평화롭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974년 당시 그의 나이 49살이었다고 합니다. 남편과는 8살 차이. 5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비밀요정 술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직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둡니다. 대한민국 최고권력을 손에 쥐고 18년간 살았던 그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가 아직도 비밀에 싸여있는 부분이 많은거 같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에 대해 속시원히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문제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채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지어 관광객을 맞는 것은 또다른 영웅화 작업의 방편일 뿐일테니까요.

지난 1월 22일 대통령에 당선된 딸(박근혜 당선자) 쪽은 3800억 원을 들여 고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는 주변에다 휴양지를 조성하겠다고 언론에 보도자료를 냈다고 합니다. 딸이 할 일은 엄마의 영웅화 작업이 아니라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게 먼저 아닐까요? 아무것도 모른채 억울하게 숨을 거두었을 고 육영수 여사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태그:#고 육영수, #고 박정희,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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