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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일본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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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를 주인공 수준으로 다룬 만화가 10편 정도, 영화가 20편 정도, TV 드라마가 10편 정도 나온 것을 보면 그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그가 더욱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일본이 경제·외교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빈부격차로 국민 통합이 약화되면서,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그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사카모토 료마를 이해하면, 일본인들의 최근 정서가 어떤지는 물론이고 그들이 어떤 영웅을 갈구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1836년에 출생한 사카모토 료마는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역사 무대에서 제대로 활약한 기간은 10년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짧은 생을 살았는데도 그런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일본 역사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속에 극적인 요소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하급 무사 출신인 그는 두 차례나 무사 직을 이탈한 '문제아'였다. 이런 사람들은 낭인(료닌)이라 불렸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 입지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도, 그는 마치 독립군처럼 돌아다니면서 정치적 변혁을 일궈냈다. 그래서 그의 삶이 더욱 극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급 무사가 짧은 시간에 영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서세동점(서양의 동양 침탈)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였다. 19세기 초반부터 러시아·영국·미국의 시장개방 요구에 시달리면서, 전통적인 국가 체제가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시대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던 도쿠가와 막부(일종의 군사정권)는 쉽게 무릎을 꿇었다. 미국과의 불평등조약(1854년)을 시작으로, 자국 시장을 불합리한 조건으로 서양 열강에게 내주고 만 것이다.

일본 개혁세력의 주역은 하급무사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일본 무사들. 사카모토 료마가 죽은 지 2년 뒤인 1869년에 찍은 사진이다. 맨 왼쪽은 이토 히로부미. <현대 일본의 역사> 속 자료사진.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일본 무사들. 사카모토 료마가 죽은 지 2년 뒤인 1869년에 찍은 사진이다. 맨 왼쪽은 이토 히로부미. <현대 일본의 역사> 속 자료사진.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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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막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각계각층에 허겁지겁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막부의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개혁 세력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막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개혁 세력이 구심점으로 내세운 존재는, 1185년경 가마쿠라 막부의 출현 이래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했던 일왕(소위 '천황')이었다. 전국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으면서도 정치적 실권은 거의 없는 일왕이란 존재는, 막부에 대항하는 개혁 세력이 볼 때는 안성맞춤의 파트너였다. 개혁 세력이 왕정복고를 주장한 것은 일왕에게 실권을 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부 지도자인 쇼군에게 맞설 전국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에드워드 카는 "한 시대의 문명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다음 시대에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며 "그런 집단은 이전 시대의 전통·이해관계·이념에 너무 깊이 젖은 탓에 다음 시대의 요구나 조건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개혁세력의 전면에 나선 것은 봉건 제후인 다이묘나 막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아니었다. 개혁세력의 주역은 하급 무사들이었다. 사회를 움직일 역량이 있으면서도 구체제의 이해관계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그들이 시대의 변혁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반나절 만에 개화파로 변신한 쇄국파

이 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하급 무사 중에서, 특히 사카모토 료마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의 업적은 물론이고 그의 특성 때문이다. 그는 통찰력·협상력·돌파력 외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성을 더 보유했다. 이 글에서는 그 두 가지에 대해서만 설명하고자 한다.

두 가지 중 하나는 '신속한 변화'다. 사카모토 료마는 당시의 일반적인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전쟁이 나면 외국인의 목을 따서 돌아갈 생각"이라고 결의를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극적 장면이 연출됐다. 쇄국파가 반나절 만에 개화파로 변신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신속한 변화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가 28세였던 1862년, 그는 칼을 들고 막부 관료의 집에 침투했다. 미일 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소지한 사절단을 태운 선박을 이끌고 1860년에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가쓰 가이슈의 집이었다. 가쓰 가이슈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개화파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개화파를 처단할 목적으로 침투한 것이다.

칼을 뽑은 사카모토 료마는 "일단 내 말 좀 들어보라"는 가쓰 가이슈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런 뒤,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칼을 바닥에 놓고, 오후 내내 개화의 필요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를 계기로 가쓰 가이슈는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이 됐고, 개화파로 전환된 사카모토 료마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개화운동에 앞장섰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하자, 기존의 생각을 가차 없이 내던진 것이다. 그의 변화는 다른 무사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다.

'통합의 귀재'가 맞은 극적인 죽음

별다른 타이틀도 없이 개혁세력을 통합한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번·조슈번의 재통합을 이룬 직후에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별다른 타이틀도 없이 개혁세력을 통합한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번·조슈번의 재통합을 이룬 직후에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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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중에서 또 하나는 '통합 능력'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쇄국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지만, 막부에 대한 적대감만큼은 여전했다. 막부를 타도해야 일본이 살 수 있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신념을 이룬 것이 그의 통합 능력이다.

그가 29세였던 1863년.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막부에 대항할 세력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막부에 불만을 품은 사쓰마번·조슈번·도사번(번은 행정구역의 일종) 무사들의 협상을 중재하고 이들의 통합을 촉진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제휴가 손상됐을 것이다. 한번은 조슈번이 미국·네덜란드 선박에 포격을 가해 외교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막부의 무력 공격을 받고 사쓰마번과의 관계를 손상시킨 적이 있었다. 개혁세력의 연대가 와해될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이때 사카모토 료마는 각 번의 무사들을 설득한 끝에 '조슈번과 막부가 또다시 전쟁을 하면, 사쓰마번은 조슈번을 사실상 지원한다'는 합의를 도출해 두 번의 관계를 복원하고 개혁세력을 재정비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통합 능력이 이뤄낸 이 성과를 토대로,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그가 죽은 이듬해인 1868년에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성사시켰다.

별다른 타이틀도 없이 개혁세력을 통합한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번·조슈번의 재통합을 이룬 직후에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33세였던 1867년, 교토의 여인숙에서 막부 순찰대 요원들이 휘두른 칼날에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그는 막부가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40세가 되기 전에 집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그렇게 실현됐다.

사카모토 료마는 단순히 영화 같은 삶을 사는 데 그치지 않고, 700년간 계속된 막부의 봉건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근대화 체제의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은 서세동점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사카모토 료마의 화신이 등장해서 위기의 일본을 구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최근 일본인들의 정서 중 하나다.


태그:#사카모토 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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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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