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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 시즌이다. '쉴토'(쉬는 토요일)가 주5일제에 따라 전면화하면서 학교 방학은 이제 무늬로만 남아 있다. 쉴토 때문에 모자라는(?) 수업 일수를 벌충한다는 명목으로, 예전이면 방학 기간일 1월까지 수업을 한 학교도 생겨났다. 우리 학교도 겨울 방학이 24일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3주(일수로는 13일)는 보충이었다. 방학(放學)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3주 방학에 2주를 보충 수업으로 때운 인근 학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학교 관리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를 학교에 붙잡아두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난 주 서울에서 온 손님 한 분과 만남을 가졌다. 동료 교사가 주도한 자리에서였다. 서울 손님은 건강한 인문학 책을 제법 많이 내놓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분이셨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우리나라 교육과 학교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왔다. 바래지기 바쁘게 전년도 대학 진학 실적을 적은 펼침막을 업데이트하는 학교와, 초청한 외부 손님의 특강이 현실 논리에 안 맞는다며 삿대질하는 교사와, 제대로 된 시집 한 권 읽지 않고 교직에 입문한 젊은 국어 교사가 입길에 올랐다.

무엇보다 압권은 아주 자연스럽게 학교를 '양계장'이라고 말했다는 어떤 교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나는 학교를 다른 것에 빗대 말할 때 군대나 병영, 내무반 들을 끌어왔다. 양계장은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려나 그 정도까지야 하겠는가 하는 내부자의 자위적인 시선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양계장이라니….

어쩌다가 학교가 양계장이 되어 버렸나

양계장이 어떤 곳인가.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사각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닭들을 떠올려 보라. 이들은 오로지 알을 낳거나 인간에게 먹히기 위한 목적으로 길러진다. 그러니 이익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 양계장의 빈틈 없는 닭장 배치와 각종 항생제로 뒤범벅이 된 사료가 그저 나왔겠는가.

양계장에서는 닭들을 철저하게 선별하여 관리한다. 유정란을 낳는 닭과 무정란을 낳는 닭, 석 달 된 닭과 넉 달 된 닭, 육계용 닭과 알을 낳는 닭이 구별된다. 병든 닭과 그렇지 않은 닭은 더욱 철저히 구별한다. 밀집 공간에서 살기 때문에 전염성이 강한 탓이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쓴 <양계 변명>이라는 수필을 보면 닭병의 전염성이 아주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 '백리병'이니 '콕시듐'이니 하는 병명도 다양하다.

대한민국 학교가 그렇다. 양계장 같은 학교 시스템은 차등적인 학교 구별로부터 시작된다. 상위 1%의 아이들이 다니는 국제 학교나 특목고 그리고 나머지 99%가 다니는 일반 학교가 그것이다. 전국의 모든 학교들이 학업 성적과 입시 결과로 한 줄로 서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하위 50%는 상위 50%에 속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상위 50%는 하위 50%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눈을 부라린다. 학교에서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배려와 협력와 연대는 꿈조차 꿀 수 없다.

다음에는 아이들을 선별하는 일이 기다린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수치화한 성적이 대거 동원된다. 점수에 따라 등급이 나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받는다.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은 가차없이 학교에서 배출된다. 최근 몇 년 간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6만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예의 '백리병(白痢病)'이나 '콕시즘'에 걸린 닭들이 철저하게 격리·소각되는 것처럼, 아이들은 '학교 부적응'이니 '문제 학생'이니 하는 이런저런 꼬리표를 단 채 학교에서 내쫓김을 당한다.

이제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들은 교사나 교과서가 던져주는 잡다한 지식을 사료처럼 받아 먹는다. 그것이 삶에 지혜를 더해주는지 여부는 따질 필요가 없다. 닭이 본능적으로 사료를 쪼아먹듯이 아이들은 그 지식들을 그저 받아먹기에 바쁘다. 합리적인 분석이나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입시에 종속된 수업은 철저하게 문제 풀이 기술을 익히는 기계적인 공정을 따른다. 팍팍한 세상을 핑계로 현실에서 뒤처지지 않는 처세와 영악함을 가지라고 아이들을 다그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교육은 '전쟁'이다. 그냥 한두 번 격하게 치르는 '전투'가 결코 아니다. 흔히 공부와 학습이 '전술'이 아니라 '전략'으로 비유되는 까닭이다. 친구는 기본적으로 '적'이지만 '전술적으로' 이용 가치가 있다면 활용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교사는 전투 보조원쯤 될까. 교사들 스스로 그 구실을 기꺼이 맡는다. 결코 교육이 아닌 그것을.

'전쟁판'이 된 학교,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존 테일러 개토의 책 <바보 만들기>(2011, 민들레)의 표지.
 존 테일러 개토의 책 <바보 만들기>(2011, 민들레)의 표지.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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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평화로운 배움의 터전이어야 할 학교가 왜 이렇게 돼버린 것일까. 험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을 감싸줘야 할 학교가 왜 오히려 거리낌 없이 아이들을 세상으로 내몰까. 서로 교감하면서 삶의 깊은 지혜를 쌓아가야 할 교사와 아이들이 왜 기꺼이 전쟁이나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이 돼버렸을까. 왜들 그렇게 힘든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걸까.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30년 경력의 미국 공립학교 교사인 존 테일러 개토(John Taylor Gatto)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발적인 명제다. 당신은 이 명제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무엇보다 교사 탓? 맞다. 개토에 따르면 교사는 일곱 가지 죄를 범하고 있다(<바보 만들기>의 첫 번째 글인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에 자세히 나와 있다).

먼저 '혼란'이 있다. 교사들은 제멋대로 가르친다. 만사의 연관성을 파괴하고 관계를 단절하도록 한다. 교과 내용과 그 시행 방법도 제멋대로다. 아이들을 교실에 '구속'시킨 죄도 크다. 도대체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 공부를 교실에서'도'가 아니라 교실에서'만'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우리는 아무 의심도 품지 않고 기꺼이 교실에 갇힌 채 지낸다.

교사들에게는 '무관심'의 죄도 있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그 무엇에든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한다. 너무 지나치면 종소리를 놓쳐 쉬는 시간을 잃게 된다. 교사들도 종소리만 나면 그 어떤 중요한 일을 하다가도 기계적으로 멈춘다. 그러니 아이들은 수업에 적당히 관심을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 자신에게 무관심한 교사의 죄는 두 말 할 필요조차 없이 크고 심각하다.

'정서적 의존성'과 '지적 의존성'의 죄도 무시할 수 없다. 아이들은 교사가 허용하는 범위 한도 내에서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개성을 표출한다. 자유로운 감정 표현과 의사 표시는 되도록 지양하도록 한다.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하는 지적 의문과 같은 것도 가질 필요가 없다. 교사가 알아서 다 떠먹여주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든 평균적인 의식을 소유하고 있는 교사는 튀는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균과 획일과 통일을 강조하는 학교, 문제다
자, 이제부터는 양계장 학교를 탓해보자. 우리는 왜 12년 동안이나 지긋지긋하게 학교에 다녀야 할까. 대학까지 합하면 16년이다. 참으로 엄청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이 스스로 자연을 벗삼고, 여행을 하며,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읽으면 안 되나. 9년이나 되는 의무교육과정을 두어 '강제로' 학교에 잡아두는 이유는 대체 뭘까. 전인격체적인 주체의 완성? 민주 시민으로 기르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정작 학교의 속셈은 정말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국가와 회사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한 사회의 법과 질서를 고분고분 잘 따르는 노예 기르기와 같은 것 말이다. 학교가 '적당히'와 '평균적으로'를 강조하는 이유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학교가 길러내려고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51쪽)

독일 철학자 피히테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 규정한, 이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 길러내야 하는 다섯 가지 인간상 중의 마지막이다. 평균과 획일과 통일을 강조하는 학교 제도가 아이들의 개성을 뿌리뽑게 된 연유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고, 결국 바보가 되고 만다.

'양계장 학교'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학교의 불합리한 규율에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 획일적인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교사와 학교는 아이들에게 선택과 결정의 자율권을 최대한 많이 주어야 한다. 국가와 학교와 교사는 전지전능한 신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신처럼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우는 방식이나 어떤 공부가 값진 것인지를 올바르게 밝힌 이론이 없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치 이런 게 있다는 식으로 꾸며내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시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과 혁신에서 멀어져 온 것입니다."(58, 59쪽)

현실 핑계는 적당히 대자. 현실을 이야기하더라도 사실을 말하자. 대학에 가야 취직에 유리하다는 말이 혹시 잘못된 신화는 아닌지 따져 볼 일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열 명 중 네 명은 백수로 산다. 최근 2년 간 대학 취업률은 60%를 넘지 못하고 있다(2012년 59.5%, 2011년 58.6%). 그나마 간신히 얻은 일자리도 1년이나 2년짜리의 비정규직이다. 아이들에게 냉철하게 사실을 말하고 그들이 스스로 삶의 진실을 깨닫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다시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양계장 이야기 끝에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꿈이나 희망이라는 말이 지천에 널린 세상을 이구동성으로 개탄했다. 현실적인 기대나 욕심을 꿈이나 희망으로 부풀리고 있는 이들도 일갈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민들레 새싹처럼, 불가능에서 가능을 일구는 게 진정한 꿈과 희망이 아닌가. 동료 선생님의 그 말이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아이들에게서 '○○이 내 꿈'과 같은 말을 쫓아내자. 그런 것은 우리의 기대일 뿐이다. 그 대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핍박 받는 이들에게 공감과 연대의 편지를 띄우도록 하자. 철탑에 올라간 노동자들에게라면 참 좋겠다. 왕따를 당하고, 벗이 없어 외로워하는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리도록 용기와 배려를 가르치자. 그리하여 이들이 힘을 얻고 세상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학교가 아이들에게 그런 꿈과 희망을 말할 수 있을 때, 양계장 학교가 참된 배움터로 바뀔 수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 - 존 테일러 개토 씀, 김기협 옮김(2011), 바보 만들기, 민들레. 160쪽. 값 7,500원.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개정판

존 테일러 개토 지음, 조응주 옮김, 민들레(2017)


태그:#존 테일러 개토, #<바보 만들기>, #양계장 학교, #교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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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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