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인천시 중구 북성동 1가 102-2에 위치한 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시 중구 북성동 1가 102-2에 위치한 한국이민사박물관.
ⓒ 심혜진

관련사진보기


방영근을 포함한 하와이 이민자 120여명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욕설과 채찍질을 당하며 노예 같은 생활을 한다. 열대의 7월 햇빛 아래 열대성 잡초를 제거하고 농토를 만들기 위한 개간사업에 동원된 이민자들은 아침 5시부터 오후 9시까지 혹사당하면서 집에 갈 날을 고대하며 "몸이나 성허도록 헙시다"며 자위한다. 그들은 100달러씩 농장에 빚을 지고 있으며(배타기 전 받은 20원과 하와이까지의 배 삯) 매달 노임이 15달러라는 사실을 알고 생활비를 공제하면 빚을 갚기가 어렵다는 생각으로 한숨을 지며 백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분개한다.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에 묘사된 하와이 이민자들의 생활 모습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정치적 불안과 계속된 가뭄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정부가 인정한 첫 공식 이민자는 1902년 제물포항에서 이민선 '갤릭호'를 타고 미국 하와이로 떠난 121명이다. 이때부터 1905년까지 7400여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건너갔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인천 사람이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관장 김경언·중구 북성동 1가 102-2)이 인천에 자리 잡은 이유다. 지난 3일,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았다. 김경언 관장이 직접 박물관 곳곳을 안내했다.

이민자 모집공고에도 지원자 없어

박물관 1층 제1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19세기 인천의 모습을 본뜬 모형이 눈에 띈다. 큰 돛단배가 오가는 모습에 인천이 개항 이후 조선 최대의 무역항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왼편에는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한 인천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돼있다. 과거를 돌아보듯 찬찬히 자료를 살피다 보니 '하와이 이민 모집공고문'이 붙은 벽에 발길이 머무른다.

"19세기 중엽부터 하와이에 사탕수수농장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하와이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기후 조건이 최적이었죠. 농장주들은 처음에 하와이 원주민을 고용했는데,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였어요.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만들어져 중국인 노동력을 쓸 수 없게 되니, 조선인을 이민자로 받아들이려고 공고문을 낸 거죠."

이민자 모집공고문은 개항장 제물포를 비롯한 항구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기차역, 시장 등 곳곳에 나붙었다. 공고문에는 ▲하와이에 정착하고자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편리함을 공급함 ▲기후는 온화해 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음 ▲모든 섬에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아니함 ▲농부들은 법률의 제반 보호를 받음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월 십오원 ▲일하는 시간은 매일 열 시간이고 일요일은 쉼 ▲집과 나무와 물과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주가 지급함 등이 적혀있다. 한자와 영문, 한글을 각각 사용한 것을 보니 얼마나 이민자 모집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김 관장의 설명이 이어진다.

"공고문을 붙이고 황성신문에도 여러 차례 공고문을 실었지만, 이민자가 모이지 않았어요. 당시엔 집에서 멀리 떠나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낯선 땅에 간다는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어요? 또 조상의 분묘를 버릴 수 없다는 인식도 한몫했죠."

하와이 첫 이민자 싣고 제물포 떠난 갤릭호

 첫 이민선 갤릭호에 올랐던 실제 이민자의 모습. 가방과 짐도 대부분 당시 이민자들이 사용했던 것들이다.
 첫 이민선 갤릭호에 올랐던 실제 이민자의 모습. 가방과 짐도 대부분 당시 이민자들이 사용했던 것들이다.
ⓒ 한국이민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설명을 들으며 몇 걸음 옮기자 외국인의 모습을 본뜬 하얀 석고상이 나타났다. 코에 묻은 까만 손때가 석고상을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의 숫자를 가늠케 한다. 석고상의 모델이 된 이는 인천내리교회 존스(G.H Jones) 목사. 존스 목사는 하와이 이민 모집 업무를 담당한 미국인 데쉴러의 요청으로, 교인과 주변 기독교인을 설득했다.

"미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말이 교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해요. 당시엔 기독교 탄압이 심했으니까요."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내리교회 교인 50명과 인천항 노무자 20명을 포함한 121명이 첫 이민선인 갤릭호에 올랐다. 가족 친지들과 눈물로 이별한 이들은 이틀 후 일본 나가사키 항에 도착해 검역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예방 접종을 했다. 신체검사에서 19명이 탈락하고, 해를 넘긴 1903년 1월 13일 102명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16명에게서 질병이 발견돼 결국 86명만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갤릭호는 화물선이었어요. 가축과 사람이 한데 엉켜 생활해야 했죠. 가축 분뇨 냄새 때문에 밥을 못 먹은 이도 있었다고 해요."

당시 갤릭호의 상황은 이민자 함하나 할머니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새벽 4시 30분 사이렌 소리에 기상, 하루 열 시간 고된 노동

 한국이민사박물관 내부 모습.
 한국이민사박물관 내부 모습.
ⓒ 한국이민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제2전시실로 들어가는 통로 벽은 동그란 모양의 창을 내 배를 탄 듯한 느낌을 준다. 통로를 지나자 사탕수수 모형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하와이 이민 생활이 시작한 것이다. 1905년 하와이에는 농장 65곳에서 한인 노동자 5000여명이 다른 민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루나'라고 불린 농장 관리인들은 말을 타고 가죽채찍을 들고 다니며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가죽을 꼬아 단단하게 만든 채찍을 보니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이민자들은 새벽 4시 반 사이렌 소리에 일어나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뜨거운 햇빛 아래서 일했다. 하루 단 30분, 점심시간에만 쉴 수 있었다. 농장 일은 잡초를 뽑는 일에서부터 수확 때 줄기를 자르는 일, 이파리를 잘라내고 차곡차곡 쌓는 일, 물 대는 일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쌓아놓은 사탕수수를 등에 지고 기차나 마차에 싣는 일이었다. 이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숙소 근처에 채소를 심어 직접 가꿔 한식을 해 먹었다.

사진 한 장 쥐고 하와이로 간 '사진신부'들

시간이 지나면서 이민자들은 현지 생활에 적응했지만, 가정을 꾸릴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남성 수가 여성보다 열 배나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1910년부터 1927년까지 '사진신부'라는 이름으로 여성 700여명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신부란, 신랑이 될 사람의 사진 한 장만 들고 하와이로 건너간 이들을 뜻한다. 사진신부들은 기독교인이 많았고, 미국에서 꿈을 펼치거나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기대를 가진 이들이었다.

"사진신부에 지원할 정도면 당시 조선에 대한 울분이 있었다고 봐도 좋아요. 사진 속 모습도 또랑또랑 하잖아요? 이들이 미국 한인사회를 구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사진신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과 생활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한여자애국단·대한부인구제회·영남부인회 등의 활동을 하며 독립자금을 모아 본국으로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한 맺힌 멕시코 '애니깽' 농장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
ⓒ 심혜진

관련사진보기


어렵사리 낯선 땅에 적응해간 하와이 이민자들과 대비되는 사연이 제3전시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905년 새로운 삶을 찾아 멕시코로 향한 한인 1033명이다. 하지만 이는 이민 중개인에 의해 단 한 차례로 끝난 대규모 불법 노동이민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뜨거운 불볕 아래 난생 처음 보는 에네켄 밭. 에네켄은 두꺼운 잎 양 옆에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들이 무수히 솟아있어 이민자들의 몸에선 하루도 피가 멈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민자들은 이를 '애니깽'이라 불렀다. 이들은 4년 동안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계약이 끝난 이후에도 본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전시는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 이민으로 이어진다. 해외 각지에서 독립군 자금을 보낸 이들의 표창장이 눈에 띈다.

모든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검은 현판에 깨알 같이 적힌 이름들을 마주하게 된다. 다름 아닌 하와이 가는 배를 탄 승객 7400여명의 명단이다. 김 관장은 이곳을 '통곡의 벽'이라 설명했다.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박물관에 와 전시를 둘러본 후, 이곳에서 자신의 할아버지·할머니 이름을 발견하고는 눈물 흘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운명한 이들이 작은 이름으로나마 한국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곳이죠. 그들의 역사를 기리는 것이 박물관이 해야 할 역할이죠."

한국이민사박물관 소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08년 개관했다. 이후 방문객이 꾸준히 늘어 작년 한 해 동안 50만여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1층부터 4층까지 상설전시실에는 유물 205점과 참고자료 5점, 복제유물 12점이 전시돼 있으며 전체 소장유물은 3만 2000여점에 이른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단체관람객이 많아 여유롭게 박물관을 돌아보려면 겨울이 오히려 최적기다. 미리 전화를 하면 전문해설사의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상설전시 이외에도 해마다 한 두 차례 특별전시도 연다. 박물관은 월미산 산책로와 연결돼 있어 가족단위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없다. 현재 박물관은 무료입장이지만 올해 5월부터 유료화할 계획이다.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관람마감시간 30분 전까지 입장)
· 정기휴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공휴일 다음날
· 단체관람 : 관람 1주일 전 예약
· 상설전시실 자동음성 안내기 : 전시내용 설명 기기 무료대여(한국어·영어·일어·중국어)
· 문화관광해설사 해설시간 : 오전 10시~오후 4시
· 문의 : 032-440-471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