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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천 교구에서 매주 일요일에 발행하는 주보 1월 6일 치에 신간소개가 실렸습니다. 9권의 책을 주보 한 면을 통째로 해서 소개했는데, 그 가운데 한 권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책 제목은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입니다. 이 책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서 좌절한 당신에게 존경받는 청춘 멘토 와타나베 가즈코 수녀가 전하는 힐링 에세이라고 간단하게 소개돼 있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9권 모두 당연히 처음 보는 책들인데 유독 이 책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책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그 열네 글자밖에 안 되는 제목이 왜 그렇게 나의 시선을 끌었고,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지난 연말에 있었던 대선 이후부터 처절하게 겪고 있는 멘붕에서 벗어나는 해답을 단적으로 요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48퍼센트의 정신적 충격, 흔히 말하는 '멘붕' 상태에 나도 깊이 빠졌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선거를 치러왔지만 이번처럼 가까운 일가친척에 전화를 해서 특정후보를 뽑아달라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박근혜 골수팬인 충청도 사시는 장인께 길게 설득을 해서 어렵게 뜻을 이뤘고, 서울에 사는 누나 두 명에게도 전화를 해서 꼭 정권이 교체되도록 힘을 보태달라고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두 누나는 공통적으로 첫 마디가 "나는 박근혜가 좋은데" 라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이 간곡하게 부탁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12월 20일 아침 여느 때처럼 신문이 왔습니다. 워낙 아버지가 신문을 많이 꼼꼼하게 보시는 관계로 경향신문과 한겨레 두 가지를 구독하는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신문 두 가지를 단 20분만에 다 보고 덮어버렸습니다. 평소에 하나 갖고 3~40분갸량 보고, 다른 하나는 보통 퇴근 후에 보는 편인데, 그날은 앞쪽 면은 대부분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녁에 8시 혹은 9시에 정규 뉴스를 텔레비전을 통해 봤는데 그것을 보기가 싫어졌습니다. 나의 멘붕은 그렇게 언론을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할 일을 그만두면 안 되므로 다른 날과 똑같이 일상적인 생활을 해나갔지만 신명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5년 동안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게 살았는데 앞으로 또 5년을 그와 비슷한 이념을 지닌 정권 아래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그때 한 기사를 읽게 됐습니다. 경기대학교 주은선 교수의 글인데, 죽 읽어나가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 같은 것, 그래서 내가 꼭 해나가야 할 것을 그 글에서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분노하고, 원망하고, 답답해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얼마간은 화를 내고, 술을 마시고, 누군가를 욕하고, 동굴 속에 침잠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다독이면서 함께하시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잘 알 테니까요. 무엇이 되었든 우리에게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해요.'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들,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사람들, 지금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견뎌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답니다. 그게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경쟁과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더 엄혹한 세월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를 우리 자신을 지켜야지요. 힘든 세월을 함께 견디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야 하는 것은 어느 후보를 지지하셨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시사주간지 <시사in> 276호 (12.29자)-

맞습니다. 그의 말이 나에게 구구절절이 사랑의 언어가 되어 날아와서 내 가슴에 쏙쏙 새겨졌습니다. 서로를 다독이면서 치유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될 것은 우리의 주변 상황은 대선 이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어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들과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들은 여전히 춥고 힘든 곳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다른 구절보다도 나는 이 대목이 가슴을 심하게 찔렀습니다. 그가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 아닐까요? 우리가 대선 결과에 절망하며 멘붕 상태에 빠진다면, 그 상태가 만약 금방 끝나지 않고 오래 가거나 영영 치유가 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고통 받거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글 하나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데 역시 그러했습니다. 나에게는 이 글이  그 당시 상황에서 가장 큰 치유와 힘이 되는 명문이었습니다. 그 글은 나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네가 이 처참한 상태에서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찾으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려운 이들을 후원하고 연대하며 지지를 보내왔던 것보다 더 많이 후원하라고 말입니다. 더 열정적으로 연대하고 지지를 보내라고 말입니다.

누군가는 지난 대선 결과가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가 애석하게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절망감에 못 이겨 딴 나라로 가서 산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이 지긋지긋한 나라에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이 땅에서 숨 쉬고 살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를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것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마음으로 지금보다 더 애정을 갖고 이 땅에 더 굳건하게 발붙이고 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요 며칠 동안 하고 있던 차에 주보에서 그 책을 보고 '맞다, 바로 이거다' 하며 책 제목을 뚫어질세라 봤던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송이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누구 말마따나 대선 이전과 이후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현실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더욱 씩씩하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들지만, 그것도 표정을 굳게 하거나 인상 찌푸리지 말고 밝은 표정으로 희망찬 내일이 곧 올 것처럼 웃으면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날씨가 무척 춥습니다. 삼한사온이란 낱말이 사라져버렸는지 추위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생존권 보장을 위해 이 혹한에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곳에 가서 같이 올라가 농성을 해야 할까요? 그곳 주위에 천막을 치고 동조농성을 해야 할까요?

화가 김한민은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바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살릴 유일한 방법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공농성을 하는 것,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뿐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것을 우리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서 고통 받는 이웃들을 바라보는 겁니다. 시선을 그들에게서 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주보에서 본 그 책의 제목인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를 실천하는 것이 멘붕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다양한 저마다의 방법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 그래서 그 마음을 밑바탕으로 해서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연대할 때에 한 송이 꽃이 바로 그곳에 피어날 거라고 확신합니다.


태그:#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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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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