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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던 지난 21일, 국방부 민원실(서울 용산구 소재)로 한 예비역 장교가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제법 무거워 보이는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전방에서 근무했던 박종기(68·예비역 중령)씨다. 그가 한겨울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국내 고엽제 피해자 인정 문제' 때문이었다. 국방부 보건정책과에 근무하는 이선우 중령이 그를 맞았다.

박종기씨 : "국내 고엽제 인정기간이 13개월 더 늘어나도 혜택받는 사람은 소수다."
이선우 중령 :
"제가 추정해보니까 380명 정도 될 것 같다."

박씨의 '국내 고엽제 피해자 인정 문제'를 발벗고 도와온 고교 동창 박정윤(66·예비역 중령)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전방에 고엽제를 뿌린 거잖아. 그런데 박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잘 됐지 뭐."

고엽제 살포 이후인 70년부터 71년까지 세 차례 전방 근무

고엽제 살포 직후 전방에서 근무했던 박종기 예비역 중령.
 고엽제 살포 직후 전방에서 근무했던 박종기 예비역 중령.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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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1945년생)인 박종기씨가 군에 입대한 것은 지난 1968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반 사병으로 입대한 박씨는 논산훈련소를 거쳐 20사단 60연대 기관총 사수가 됐다. 그런데 당시에는 군입대자 가운데 고졸자가 드물어 그는 하사로 진급했다가 장교시험까지 치르게 됐다.

"김신조의 1·12사태가 터지고, 3사관학교가 창설되면서 장교 수요가 많아졌다. 소대장을 할 사람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1969년 12월에 3사관학교 3기로 입교했다."

경북 영천에 있던 3사관학교에서 1년간 교육받고 소위로 임관한 지난 1970년 11월 20사단 62연대에 배치됐다. 박씨는 "20사단 62연대는 최전방 부대였다"라고 말했다.

"지금으로 치면 강원도 철원이고, 5사단 지역이다. 바로 철책선이 있는 곳이다. 그 전에는 철책선이 없었다. 그래서 남으로 넘어오기도 하고, 북으로 넘어가기도 했다고 하더라. 그곳에서 소대장을 인수인계받았다.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바로 철책선 소대장이 된 것이다."

1970년 12월부터 최전방(GOP 혹은 FEBA) 철책선 근무를 시작했다. 박씨가 철책선 소대장으로 부임한 지 3개월이 지나서 부대는 후방으로 물러났다. 1년 단위 교대근무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철책선 근무는 계속 됐다. 상관이던 중대장이 수색중대로 이동하면서 그를 수색소대장으로 차출했기 때문이다.

"보통 1년 정도 근무하다가 훼바(FEBA)지역에서 빠지면 다른 연대가 그곳에 들어가 근무하고, 빠지는 부대는 후방에서 정비를 한다. 그런데 나는 일반소대장으로 철책선에서 3개월 근무하다가 3개월 뒤에 다시 철책선으로 들어간 셈이다."

비무장지대(DMZ) 안에는 휴전선을 감시하는 초소(GP)가 있다. 박씨는 그 초소를 책임지는 'GP장'으로서 DMZ 안에서 수색과 매복을 되풀이했다. 일반소대장으로 철책선 근무를 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근무였다. 그리고 군수장교를 하다가도 다시 전방으로 갔다.

"철책선 근무를 시작한 1970년 12월부터 세 번이나 전방에 들어갔다. 최초 소위로 임관해서 3개월간 근무했다. 그리고 3개월 뒤에 다시 전방에 들어갔고, 중위 달고 대대 보급관(군수장교)을 하다가 다시 들어갔다. 8개월 동안 M16을 장전하고, 크레모아와 수류탄 주렁주렁 달고 DMZ를 드나들었다."

박씨가 철책선에서 완전히 벗어난 때는 중위로 진급한 직후인 지난 1972년 1월께였다. 고엽제는 지난 1968년 4월부터 1969년 7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DMZ에 뿌려졌다. 이것은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2년간 추가로 고엽제를 살포했다는 의혹이 있다. 

박종기 예비역 중령이 전방에서 근무하던 시절. 수색소대장으로 DMZ 안에서 수색과 매복을 되풀이했다.
 박종기 예비역 중령이 전방에서 근무하던 시절. 수색소대장으로 DMZ 안에서 수색과 매복을 되풀이했다.
ⓒ 박종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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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문 없는 첫 아들, 사산된 첫 딸... 난 백혈병에 걸려" 

첫번째 불행은 지난 73년에 찾아왔다. 박씨가 결혼한 지 2년 뒤인 지난 1973년 6월 첫 아들이 태어났다. 전방근무에서 벗어나 춘천의 한 자동차중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다.

"첫 아들이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났다. 처남이 근무하는 광주기독병원으로 데려갔다. 항문 수술은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대장을 잘라서 배변할 수 있도록 수술했다. 4년 뒤인 5살 때에야 배변할 수 있는 인공 항문을 만드는 수술을 했다."

첫 아들에게는 항문만 없었던 게 아니라 정신지체 현상까지 있었다. 박씨는 "애가 자라면서 기고 서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며 "발육도 늦고 지능도 2~3세 수준밖에 안 됐다"고 말했다.

"그때는 고엽제 영향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뭐가 잘못됐나? 나한테 문제가 있나? 부인한테 문제가 있나? 이런 생각만 했다. 고엽제 자체를 몰랐으니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첫 아들 뒤에 다시 첫 딸을 얻었지만 사산됐다(1975년). 담당 의사는 "살아서 나왔어도 장애인이었을 것이다"라고 박씨에게 말했다. 두번째 딸도 자궁외 임신이었다(1976년). 죽을 거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정상으로 태어났다.

월남전 참전 군인들의 고엽제 피해 문제가 사회적 현안으로 떠오른 때는 1990년대 초반이었다. 지난 1993년 한시법(5년마다 개정)이긴 하지만 '고엽제 후유의증 등 환자지원에 관한 법률'(고엽제 환자 지원법)도 만들어졌다. 그러다 지난 1998년 백혈병에 걸리면서 박씨는 자신이 '국내 고엽제 피해자'임을 확신하게 됐다.

"1998년 5월에 만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원래 이것은 법을 제정할 때는 고엽제 후유증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다 중간에 추가됐다. 내가 백혈병에 걸리면서 나뿐만이 아니라 내 자녀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모두 고엽제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실제 고엽제 환자 지원법 제5조 1항에 따르면 '만성 림프종 백혈병'과 '만성 골수성 백혈병'이 '고엽제 후유증 범위'에 포함돼 있다. 게다가 박씨는 '고엽제 후유의증'인 고지혈증과 고혈압뿐만 아니라 협심증까지 앓고 있다.

"나는 허혈성 심장병으로 심장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정신지체인 장남은 척추 곡만증이 있다. 척추 곡만증은 관련법에 (고엽제 후유증 2세 환자의 질병 범위에) 포함돼 있는 척추이분증과 관련돼 있다."

박종기씨는 지난 98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박종기씨는 지난 98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 박종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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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피해 인정기간, 미군은 우리보다 13개월이나 더 길다    

고교 동창인 박정윤씨가 적극 나서서 "자네는 전형적인 고엽제 후유증에 해당되니까 신청해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만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리고도 10년이 넘은 지난 2010년에서야 박씨는 국가보훈처에 국내 고엽제 피해자(국가유공자) 인정을 신청했다.

하지만 "국내 고엽제 피해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정이 나왔다. 국내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되는 기간에 박씨가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 근무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전방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고엽제를 살포하지 않았다. 고엽제를 살포한 이후에 근무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고엽제를 살포했던 지역에서 근무한 것도 맞다. 살포했던 고엽제가 잔류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박씨는 "사계청소를 한다면서 155마일 비무장지대에 고엽제를 뿌렸다"며 "철책선 안팎 100미터 되는 지역에 뿌렸는데 우리는 거기서 수색과 매복을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DMZ는 20년 가까이 사람들이 출입을 안했던 지역이다. 잉어가 (일반 잉어보다) 두 배 정도로 컸고, 주먹만한 우렁이도 있었다. 야생 배나 야생 딸기도 많았다. 우리는 수색과 매복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채취해서 먹곤 했다."

고엽제 환자 지원법에 따르면, '1967년 10월 9일부터 1970년 7월 31일 사이'에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서 근무한 군인 등이 고엽제 후유증과 관련한 질병을 얻었을 때 '국내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돼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받는다.

휴전선에 마지막 고엽제가 뿌려진 때가 지난 1969년 7월 31일이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내용을 헤아릴 때 고엽제 독성 잔류 기간을 1년만 인정한 것이다. 박씨는 고엽제 잔류 기간으로 인정받은 때로부터 5개월이 지난 1970년 12월부터 전방에 근무했기 때문에 '국내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1월 미국 보훈부가 DMZ에서 고엽제를 살포했다가 피해를 입은 미국의 보상 범위를 '1968년 4월 1일부터 1971년 8월 31일까지'로 늘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전 보상범위에서 2년 1개월을 더 늘린 것이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미군이 2년 1개월을 더 연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는 물론이고 국민신문고에도 민원을 냈다. 우리도 미군처럼 (국내 고엽제 피해자 인정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연장된다면 나는 분명히 국내 고엽제 피해자에 해당한다."

국내 고엽제 피해자수는 약 9만 명에 이르러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에 따르면, 고엽제는 국내에서 총 두 차례에 걸쳐 살포됐다. 첫 번째 살포는 1968년 4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두 번째 살포는 이듬해인 1969년 5월 19일부터 7월 31일까지 이뤄졌다. 고엽제 살포 작전에는 연인원 5만 명이 투입됐다. 이에 앞서 군은 1967년 10월 9일부터 15일까지 일부지역에서 고엽제를 시험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윤상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6월 3일 대정부질문에서 "한미 양국군이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1968~1969년 두 차례에 걸쳐 최전방 9개 사단 93개 대대 관할의 비무장지대(DMZ) 6840ha(68.4km)에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했다"며 "이는 국방부가 고엽제 피해보상문제가 불거진 1999년 이후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해 2000년 작성한 기밀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살포된 고엽제의 양은 에이전트 오렌지 2만350갤런, 에이전트 블루 3만8280갤런 등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엽제의 종결자'라는 모뉴론도 211.1톤이나 살포됐다. 정부에서는 1969년 7월 31일이 고엽제 최종 살포 시점이라고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이후에도 고엽제가 살포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2년 10월 말 현재 국내 고엽제 피해자는 총 8만9772명(후유증 3만9909명, 후유의증 4만9799명 등)이다. 여기에는 고엽제 피해자 2세 64명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월남전 참전자들이고, 국내 DMZ 근무자는 1000명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비해 고엽제 피해자를 판정하는 기간이 짧아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보훈부는 지난해 1월 DMZ에서 고엽제를 살포했다가 피해를 입은 미군의 보상범위를 1971년 8월 31일까지로 늘렸다. 이전에는 '1969년 7월까지'로 규정돼 있었다는 점에서 무려 2년 1개월이나 늘린 것이다. 반면 한국은 미국보다 1년 1개월이 짧은 '1970년 7월 31일까지'로 규정돼 있다. 미국은 고엽제 최종 살포 시점인 1969년 7월 31일부터 2년을 '고엽제 독성 잔류기간'으로 설정한 반면, 한국은 1년만 설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0년 8월 1일부터 71년 8월 31일까지 DMZ에서 똑같이 근무했다가 고엽제 피해를 입었을 경우 미군은 피해자로 인정되지만 한국군은 피해자에서 제외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1970년 12월부터 전방에 근무한 박종기씨는 "병은 깊어지고 있는데 국가보훈처 등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도 미군들이 보장받고 있는 기간 정도로 연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당선인, 아버지 시대 그늘도 책임져야"

다행히 국내 고엽제 피해자 인정 기간을 미군처럼 늘리기 위한 입법 활동이 감지되고 있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국내 고엽제 피해자 인정기간을 '1971년 8월 31일'로 13개월 더 늘리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고엽제 환자 지원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이것을 연장하려고 시도한 국회의원은 없었다"며 "박민식 의원의 경우에도 기안만 한 상태이고 최종 입안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뿐만 아니라 고엽제 때문에 병을 얻은 장병들이 있다면 이는 국가에서 책임져야 한다. 현재 국내 고엽제 피해자는 950명 정도다. 인정 기간을 13개월 더 늘리더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300~400명밖에 안된다. 이렇게 혜택받을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이고 예산도 적게 들기 때문에 반드시 국가에서 해결해줘야 한다."

고엽제 살포는 남북한 대결이 첨예했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뤄졌다. 지난 1968년 북한의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이후 휴전선의 사계를 청소한다는 명분으로 고엽제를 살포한 것이다. 박씨가 '박근혜 책임론'을 제기하는 이유다.

"고엽제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뿌려졌다는 점에서 국내 고엽제 피해자 문제는 보수진영에서 적극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특히 자기 아버지가 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이 해결해줘야 한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의 유업이나 공적만 얘기할 게 아니라 아버지 시대의 그늘인 국내 고엽제 문제도 책임져야 한다."

지난 1998년 "길어야 6개월밖에 못산다"고 진단받았던 박씨는 현재 백혈병약을 끊으면 언제든지 가족들과 이별해야 할 처지다. 그는 "국내 고엽제 피해자 문제가 그늘에 묻혀 있다"며 "박근혜 당선인이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특히 박씨는 "한국과 미국의 보훈정책에는 큰 차이가 있다"며 "미국은 보훈대상자를 적극 발굴해 보상해주는데 우리는 최대한 그 대상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태그:#국내 고엽제, #박종기씨, #박근혜,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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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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