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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우리도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처럼 자그마한 힘이지만 뭉쳐서 왜놈들을 물리치자. 이대로 있다가는 도대체 분통이 터져 못살겠다. 무슨 일을 해보자꾸나. 우리가 여학생이라 하여 남자들처럼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니? 조금도 겁내지 말고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자."

<기전 80년사, 1982년>에는 3.1만세운동 당시 기전여학교(현 기전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려져 있다.

해마다 3월 13일에는 기전여고 학생들이 선배들의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그날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만세운동 재현 해마다 3월 13일에는 기전여고 학생들이 선배들의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그날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기전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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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3일 정오. 기전의 딸들은 비운에 돌아가신 고종 황제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흰 띠를 질끈 동여맨 뒤 신발 끈을 단단히 조이고 남문의 인경(정오) 소리를 기다려 두려움 없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주 장터에서 벌어진 이날 만세운동을 이유로 왜경은 전주기전학교 출신 여학생 최기물(20살), 최애경(18살), 최요한나(17살), 최금수(21살), 김공순(18살), 함연춘(21살), 정복수(17살), 송순태(18살), 김신희(21살), 강정순(21살), 임영신(21살), 김순실(17살), 김나현 (17살) 등을 잡아 들였다.

'기전학생 3.1운동 공판 판결문'에 따른 여학생들의 죄목은 "1919년 3월 13일 오후 1시경 수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남문시장 부근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방해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보안법 제7조 제령 제1조에 해당하는 죄를 들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3.1운동 역사상 이렇게 대규모의 여학생이 잡혀간 예도 드물었다. 이 소식이 상해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이들의 이야기를 <한국독립운동 지혈사>에 자세히 기록한 바 있다.

"우리가 어찌 너희의 판결에 복종하랴? 너희들은 우리 강토를 강탈하고 우리 부모를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삼천리의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非法)이라 하니 이는 불법(不法)한 판결이라"고 비분강개하던 여학생들의 불굴의 나라사랑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교장 원광연)를 찾은 것은 지난 12월 3일로 초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930년대 기전여학교 학생들과 선생님
▲ 1930년대 1930년대 기전여학교 학생들과 선생님
ⓒ 기전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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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연락을 받은 원광연 교장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현관까지 나와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관 건물 2층의 교장실로 오르는 계단과 복도에는 기전여학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흑백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전시되어 있었는데 교장선생님은 이들 사진 하나하나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구한말 어지러운 시기인 1900년 4월 24일 미국 남장로교 출신의 최마태(mattie tate) 선교사가 소녀 6명으로 시작한 기전학교는 처음에 전주 은송리(현 완산초등학교)의 작은 초가집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관리들은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이때 전주시로부터 받은 땅이 화산동 일대로 이곳에 교사가 들어서고 제 1대 교장으로 전킨 선교사가 취임하였다.

학교 이름을 기전(紀全)이라고 지은 것은 'Junkin Memorial'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킨 목사는 1892년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아내가 운영하던 기전여학교에 많은 도움을 주다가 1908년 1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전킨(全緯廉)을 기념(紀念)하기 위해 기전여학교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전킨 교장(왼쪽) 과 초기 기전여학교 학생들
▲ 전킨 교장 전킨 교장(왼쪽) 과 초기 기전여학교 학생들
ⓒ 기전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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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개교할 당시는 남존여비 관습이 강하던 시절이라 학생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기전여학교보다 1년 먼저 개교한 남자학교인 신흥(新興)학교에는 학생들이 날로 늘어 갔으나 여학교인 기전은 달랐다. 그래도 선교사들은 학생 숫자보다는 질적인 교육을 위해 힘썼는데 특히 '한국에 필요한 여성, 교회 전도에 필요한 여성'에 초점을 두고 교육에 전념했다.

이러한 교육 이념 아래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민족적 위기에 직면하여 빼앗긴 조국의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강한 저항정신을 기르게 된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두말할 나위 없다.

개교 당시만 해도 트레머리에 쓰개치마를 쓰고 외출하던 소녀들은 머지않아 쓰개치마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며 여성 차별로부터의 해방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외형의 변화와 달리 자신의 고장 전주에 대한 긍지와 애착은 강했으며 그것은 자연스런 국가의식과 연결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노골화된 조선인 탄압의 일환으로 궁성요배, 황국신민,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저항한 기전여학교는 1937년 10월 5일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46년 11월 26일 일제의 패망으로 만 9년 만에 인문과 4년제로 복교하게 된 것이다.
 
2005년 효자동(완산구 유연로 133)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화산동 교사
▲ 화산동 교사 2005년 효자동(완산구 유연로 133)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화산동 교사
ⓒ 기전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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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여자고등학교는 2005년 3월 2l일 효자동 393번지에 신축교사를 짓고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6명의 소녀로 시작한 기전학교는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지던 1919년 3월 13일 김공순(1995년 대통령 표창) 애국지사를 비롯, 함연춘(2010년 대통령 표창) 등의 애국지사와 당시 교사로써 이들을 길러낸 한국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박현숙 애국지사 (1980년 건국포장) 등 쟁쟁한 여성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러한 선배들의 피는 속일 수 없는 듯 <혼불>의 작가 최명희, 중앙대학교 설립자인 임영신, 예수대학교 총장 김강미자 등 수많은 여성지도자들이 민족정신의 요람인 기전여고를 빛내고 있다. 2012년 현재 졸업생은 1만8116명이며 경천(敬天), 순결(純潔), 애인(愛人)의 교훈 아래 27학급 970명이 재학 중이다.

기전여고는 전인교육의 기치 아래 캐나다 애보츠포드 크리스천 고등학교, 중국 텐진 난카이 고등학교, 일본 긴조 가쿠인고등학교 등과 국제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세계를 호흡하고 있다. 또 독서토론, 문예창작(글샘), 동물사랑, 미디어비평, 풍물패(예끼) 같은 46개의 동아리를 만들어 전교생이 균형 잡힌 지성인으로서의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것 또한 112년 전통의 저력이 만들어낸 결과다.

또한 역사와 전통의 고장답게 학생들의 시선은 교내를 벗어나 자기 지역의 문화유산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전주 한옥마을을 비롯하여 최명희 혼불문학관, 전주전통한지원, 전주향교, 부채문화관 등의 명소를 소개하는 소책자 '한옥마을 이모저모'를 영어판, 일본어판, 한글판 책자(지도교사 한인규)를 만들어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나눠주고 안내를 하는 등 자원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전통에 빛나는 전주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직접 학생들이 만들었다. 한글판, 영어판, 일어판(왼쪽부터)
▲ 한옥마을 소책자 전통에 빛나는 전주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직접 학생들이 만들었다. 한글판, 영어판, 일어판(왼쪽부터)
ⓒ 기전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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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전국고교합창 경연대회에서 우리 학생들이 금상을 탔습니다."

원광연 교장 선생님은 교장실 한편에 만들어둔 알림판에 스크랩해둔 기사를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을 탔다는 사실보다 학생들이 받은 상금 300만 원을 자발적으로 백혈병을 앓고 있는 다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수술비로 선뜻 기부했다는 사실이라며 학생들의 갸륵하고 기특한 마음을 칭찬했다.

두드러진 학생활동으로 대내외 수상 기사가 많다
▲ 합창대회 두드러진 학생활동으로 대내외 수상 기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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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여 대담을 나눈 교장실은 아주 소박하고 정갈했다.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좋은 교육 기자재를 사서 주고 싶은 마음에 교장실 집기 하나도 함부로 사들이지 않는다고 귀띔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교장 선생님의 학생사랑 정신을 고스란히 학생들이 보고 배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지간이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조국의 독립을 찾고자 했던 선학들의 정신과 통하고 있는 것이리라!

대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겨울비가 그치지 않자 우산을 미처 준비 못한 필자를 위해 교장선생님은 주차장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주면서 운동장 끝자락에 있는 등나무 정자를 가리켰다. 사연인즉 이곳 출신의 여학생이 2005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딸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을 모교의 후배들을 위한 쉼터로 만들어 달라고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모녀의 이야기를 새겨 운동장 끝자락에 학생들의 쉼터로 만들었노라는 설명을 들으니 기전여고 구성원들의 학교사랑 정신이 새삼 돋보였다.

필자가 기전학교를 찾은 까닭은 유관순 열사 외에 알려지지 않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 그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에서였다. 기전여학교 3회 출신인 김공순(1901-1988) 애국지사는 재학 중 1919년 3월 13일 전주 남문 밖 시장부근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김공순 애국지사는 3월 1일 서울로부터 전주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신흥학교 학생들과 함께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호롱불을 켜 놓고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인쇄·제작하였다. 그리고 거사 당일에는 푸성귀 가마니에 태극기를 숨기고 운반하여 정오 남문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태극기와 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잡혀 옥고를 치렀다. 자세한 이야기는 2013년 상반기에 출간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필자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3권에 실을 예정이다.

광복 67주년이 되도록 사회의 따스한 관심과 조명을 받지 못하고 들꽃 같은 삶을 살다 스러져간 이 여성 애국지사들은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독자들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필자의 지난한 작업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바란다.

여성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역사의 증거인 흑백사진이 기전여고 복도에 빼곡하다. 원광연 교장 선생님과 그때를 회상하며.
▲ 원광연 교장 여성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역사의 증거인 흑백사진이 기전여고 복도에 빼곡하다. 원광연 교장 선생님과 그때를 회상하며.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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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대자보에도 보냄



태그:#기전여고, #원광연, #여성독립운동, #독립운동,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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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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