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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교사지를 긴급히 발굴을 하게 된 사연

 흥교라는 명문이 새겨진 막새
 흥교라는 명문이 새겨진 막새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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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6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군 흥교리 절터에서 흥교(興敎)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막새)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6월 15일 절터 주변의 밭을 개간하면서 매장문화재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긴급 발굴조사 지원심의를 거쳐 10월 11일 중부고고학연구소에 발굴허가를 내줬다.

이에 중부고고학연구소는 11월 5일 영월읍 흥월리 1083-1번지 외 4필지(6630㎡)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발굴기간은 12월 24일까지이며, 12월 17일 오후 1시 현장에서 전문가를 초빙하여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권중 조사연구실장과 김선주 조사2부장이 발표를 했다. 조사지역은 해발 546-549m에 위치한 고지대일 뿐 아니라, 12월의 폭설과 한파로 발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흥교사지 발굴 현장
 흥교사지 발굴 현장
ⓒ 중부고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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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교사지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통일신라 말 궁예(弓裔)가 나이 열 살에 출가한 절이라는 점이다. <삼국사기>「열전」'궁예' 편에 보면, 궁예는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세달사(世達寺)로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세달사가 고려시대 흥교사라고 김부식은 적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 제3권「탑상(塔像)」편에 나오는 '낙산사의 성인 조신(調信)'이 흥교사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낙산사 스님이었던 조신은 날리군(영월)에 있던 세규사(世逵寺)의 장원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곳 태수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관음보살에게 그 여인과 살게 해 달라고 빌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조신을 찾아온 김씨 낭자는 부부가 되기를 원했고, 둘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50년간 정과 사랑을 나누며 인연을 맺었으나 늙어 배고프고 병들자 서로 헤어지기로 한다. 그리하여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난다. 이에 조신은 큰 깨달음을 얻고 정토사를 세운다. 그는 부지런히 수행을 하면서 좋은 일을 했다고 한다. 일연 역시 <삼국유사>에서 세규사가 흥교사임을 밝히고 있다.

발굴 결과 나타난 새로운 사실

 흥교사지 출토 수막새
 흥교사지 출토 수막새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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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흥교사지에서는 80년대 금동불상과 청동여래좌상이 나온 바 있다. 그리고 1999년 지표조사를 통해 흥(興)자와 교(敎)자 명문기와를 수습하기도 했다. 또 세(世)자와 달(達)자가 돋을새김된 기와편을 수습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흥교분교 교정에 있던 석종형부도가 도난당하는 불상사가 있기도 했다.

이번 2012년 발굴조사를 통해 조사팀은 흥교사 절터의 중심지를 흥교분교 교사와 운동장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2013년 흥교사 중심사역으로 발굴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흥교라는 돋을새김이 분명한 막새가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곳이 흥교사 터임을 확실히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건물지
 건물지
ⓒ 중부고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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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지 6동, 계단식 석축과 기단 등 총 17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정도로 확실한 주장을 펼 수 없는 상태다. 단지 이곳에서 출토된 다량의 기와편과 막새, 치미 등과 청자, 도기, 철기 등을 통해 절의 출발을 라말여초까지 편년을 올려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좀 더 넓은 영역에 대한 발굴을 진행해봐야 알 수 있다고 발굴팀은 말한다.

기록을 통해 본 궁예의 행적

 한강이 휘감아 도는 영월 흥교사
 한강이 휘감아 도는 영월 흥교사
ⓒ 중부고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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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신라의 왕족이었다. 태어날 때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하늘에까지 닿았다"을 정도로 서기를 띠었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었고, 불꽃 같은 광채가 났다"고 하니 비범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서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영험한 일들이 불길하게 여겨져 죽음을 당할 위험이 놓이게 된다. 다행히 유모가 궁예를 데리고 도망쳐 나와 살 수 있었고, 그의 밑에서 10살까지 컸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궁예는 10살 때 세달사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장성해서는 계율에 억매이지 않고 활발하고 담대하게 일을 처리했다. 진성여왕 6년(892) 나라가 어수선할 때 북원(원주)의 양길(梁吉) 휘하로 들어가 힘을 키웠다. 이때 그는 치악산, 주천 영월 지역 등 남한강 중류지역을 평정하였다. 그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이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영월, 주천, 평창 옛 지도
 영월, 주천, 평창 옛 지도
ⓒ 중부고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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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궁예는 명주(강릉)와 임진강으로 진출하였고, 898년 송악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에 양길과 갈등이 생겼으나, 양길을 물리치고 한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궁예가 왕을 칭한 것은 901년이다. 그는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라를 무너뜨릴 생각을 했다. 궁예는 자신감에 차 신라를 병탄하고 만세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사치와 요설, 포악함과 학정으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되었고, 결국 왕건에 의해 추방되었다. 궁예는 891년에 뜻을 세우고 일어났으나 28년만인 918년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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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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