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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꿈>에서 김보희 역을 연기하고 있는 탤런트 민지아.
 <대왕의 꿈>에서 김보희 역을 연기하고 있는 탤런트 민지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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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김유신의 동생인 보희는 김비형(비형랑)이란 남자를 짝사랑한다. 서라벌을 오줌 바다로 만드는 왕후의 꿈을 꾼 보희는 '꿈 소유권'을 동생 문희의 비단 치마와 맞바꾸었다. 그 결과, 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하고 보희는 비형을 사랑하게 되었다. 

드라마 속의 비형은 반체제 단체인 귀문의 리더다. 모계는 신라 왕족이고 부계는 가야 왕족인 보희가 반체제 운동가를 사랑하고 있으니, 이 사랑은 매우 위험한 사랑이다. 그래서 비형은 보희를 거부하지만, 보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에는 끝나지만, 보희는 오랫동안 이 사랑을 간직한다.

보희의 구애를 받고 있는 비형은 <삼국유사> '기이' 편에 따르면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다. 진지왕이 도화라는 과부와의 혼외관계에서 낳은 아이다. 김춘추가 진지왕의 손자이므로, 비형은 김춘추의 삼촌이 된다.

<삼국유사>는 진지왕의 영혼이 일반 백성인 도화의 집에 들어가 7일간 머문 끝에 비형이 잉태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 방식은 고대인들이 고위층의 불륜을 점잖게 묘사하는 기법 중 하나다.

진지왕은 비형의 출생을 몰랐거나 아니면 방치한 채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비형을 거둔 것은 사촌형제인 진평왕이다. 진평왕과 비형은 사촌형제 관계이지만, 나이차는 꽤 컸다. 진평왕의 배려로 왕궁에 들어온 비형은 적어도 10대 중반 이전부터 '귀신의 무리'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삼국유사>는 '귀신의 무리'를 귀중(鬼衆)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귀신의 무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귀중' 대신 귀문(鬼門)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비형과 보희의 사랑이 가능성이 낮은 이유

<대왕의 꿈>에서는 '귀신의 무리'를 반체제 결사로 해석했다. 하지만, 비형과 귀신들이 왕명을 받아 다리를 건설하고 조정에 인재를 추천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볼 때 '귀신의 무리'를 반체제 단체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김유신의 여동생이 한때나마 반체제 운동가를 사랑했다는 문학적 상상은 현실성이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김비형(비형랑, 장동직 분). 사진은 비형랑이 김춘추(채상우 분)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장면.
 김비형(비형랑, 장동직 분). 사진은 비형랑이 김춘추(채상우 분)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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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보희와 비형이 사귀었을 가능성은 있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거의 부모자식뻘이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비형과 보희의 출생 연도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정황을 통해 두 사람의 나이차를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지왕 편에 따르면, 진지왕은 재위 4년째 되는 해의 음력 7월 17일에 사망했다. 양력으로 치면, 서기 579년 8월 24일이다. 따라서 비형은 적어도 580년 이전에 출생했다.

김유신이 595년에 출생했으므로, 동생인 보희는 596년 이후에 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비형이 580년에 출생했고 유신과 보희가 연년생이었다면, 보희와 비형은 최소 16세 차이가 난다. 유신 남매가 연년생이 아니라면, 이들의 나이차는 20년에 가까워진다.

비형이 580년 이전에 출생했다면, 이들의 나이차는 20년을 넘었을 것이다. 물론 열렬히 사랑한다면 나이차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비형이 반체제 운동가였다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고, 보희가 비형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상당히 낮다고 판단할 수 있다.

동생에게 꿈을 판 보희는 어떻게 됐을까

그럼, 왕후의 꿈을 동생에게 팔아버린 보희는 어떤 남자와 결혼했을까?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뜻밖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보희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 '제18대 풍월주 김춘추' 편에서는 <문명황후 사기(私記)>라는 책을 인용하여, 나중에 가서는 보희가 문희(훗날의 문명왕후)에게 꿈을 판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문희가 김춘추의 정실부인이 된 뒤부터 그런 감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김문희(린아 분).
 김문희(린아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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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는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놀이를 하던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망가뜨린 뒤, 옷을 수선해주겠다며 자기 집에 데려가는 장면을 감상해보자.

이날은 서기 7세기 초반 어느 해의 음력 1월 15일이었다. 이날, 김유신은 큰 여동생인 보희에게 옷 수선을 맡기려 했다. 그런데 유신의 의도와 달리 문희가 수선을 맡게 됐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자. 

<삼국사기> '신라 본기' 문무왕 편에서는 "그 언니는 사정이 있어서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한편, <삼국유사> '기이' 편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옛 기록에서는 병 때문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는 내용과 "보희는 어찌 이런 사소한 일로 가볍게 귀공자에게 접근할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 사양했다"는 내용을 함께 제시했다. 두 번째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방식이 너무 유치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나가지 못했든, 아파서 나가지 못했든, 너무 유치해서 나가지 않았든 간에, 보희가 춘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볼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정이 괜찮았거나 오빠가 좀더 강권했다면, 보희가 김춘추와 단둘이 있게 됐을지도 모른다.

"어찌 이런 사소한 일로 가볍게 귀공자에게 접근할 수 있겠느냐?"는 말 속에는 상대방에게 좀더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심리도 담겨 있다. 이런 점을 보면, 보희가 꿈을 판 일을 후회했다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김춘추의 여자가 된 보희

김춘추(최수종 분).
 김춘추(최수종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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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보희는 단순히 후회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동생 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는 것을 보고 속이 무척 상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보희는 어느 남자와도 결혼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드라마 속의 보희는 춘추 대신 비형을 사랑하고 있지만, 실제의 보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춘추를 좋아했던 것이다.

보다 못한 김춘추는 보희를 첩으로 맞이했다. 동생인 문희가 정실부인이 되고 언니인 보희가 첩이 된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인용된 <문명황후 사기>에 따르면, 보희와 춘추 사이에서도 지원과 개지문을 비롯한 자녀들이 출생했다고 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위작 논란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보희 역시 결국에는 김춘추의 여자가 되고 군주의 여자가 된 셈이다. 동생에게 꿈을 팔기는 했지만, 완전히 팔지 않고 약간 떼어놓은 셈이라고나 할까.

성경 창세기 25장에는 이삭(아브라함의 아들)의 장남인 에서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동생인 야곱에게 장남의 지위를 파는 장면이 나온다. 에서는 장남의 지위를 붉은 죽과 교환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은 야곱과 그 자손들에게 계승되었다.

보희·문희의 사연도 유사하다. 보희가 왕후의 꿈을 동생의 비단치마와 교환하는 바람에, 언니가 첩이 되고 동생이 정실부인이 됨과 동시에 동생의 몸에서 신라 왕통이 나왔으니 말이다. 


태그:#대왕의 꿈, #김보희, #비형랑, #김비형,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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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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