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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장애아'라고 하면 '불쌍하다' '안됐다' 등의 말이 따라붙곤 합니다. 하지만 여기, '행복하다' '네 덕분에 산다'며 미소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입니다. 사회의 편견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랑으로 사는 그들. <오마이뉴스>와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www.miral.org)이 이들을 만나러 갑니다. [편집자말]
선천성 무뇌수두증을 앓고 있는 찬송이
 선천성 무뇌수두증을 앓고 있는 찬송이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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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초 지인의 전화를 받았어요.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키우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버려지게 생겼다고요. 혹시 입양기관 같은 곳을 알면 소개해 달라는 거예요. 그 전화에 왜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지요. 전화를 끊고 한참을 혼자 울었어요."

10년 전 그날. 강희숙(58)씨는 전화 너머로 갓 태어난 한 아기의 이야기를 들었다. 1.7kg 미숙아로 태어난 여자 아기.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큰 아기. 극심한 불화로 별거 중이었던 친부모에게는 이미 세 자녀가 있었고 7개월이 될 때까지는 임신 사실조차 몰랐던 친모는 출산 전날까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했다.

아기가 태어났지만 친부는 아기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친자식임을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장애아라는 이유로 아기 이름을 호적에 올리는 것(출생신고)조차 거부했다. 친모 역시 아이를 품지 못했다. 제 한 몸도 챙기기 어려운 상황에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울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질 운명에 놓인 가여운 아기와 희숙씨는 어떤 운명의 끈이 이어졌던 것일까. 전화 한 통화로 아기는 희숙씨의 가슴에 들어와 버렸다. 마치 자신이 낳은 아이인양 아프고 또 아파서, 가엽고 애처로워서 데려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마음에 걸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아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때 제 나이 마흔여덟. 젊지도 않은 나이에 남편(이상일씨·61)의 사업 실패로 오갈 데가 없어 철거를 앞둔 청계천 삼일아파트에 들어가 살 때였어요. 삼일아파트에 비하면 지금 지하방은 천국이지요. 아이를 데려다 키울 만한 환경도 형편도 아니었어요."

청계천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30년 넘게 도시빈민들의 보금자리가 됐던 삼일아파트 역시 재개발 수순을 밟고 있었다. 이미 많은 세대가 집을 비운 상태였지만 보상에 합의하지 않은 주민 몇몇과 갈 곳이 없는 노숙인·외지인들이 들어와 빈집을 임시거처로 삼고 있던 시기.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어진 희숙씨네도 그들과 같이 언제 강제 철거반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삼일아파트에 흘러들어왔다.

"그땐 내 두 아이도 거두지 못했어요. 환경이 그러니 친구 집으로, 이곳저곳 나가 지내고 남편과 저만 그 집에서 생활했죠. 전화를 받고 고민고민하다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도 우리가 데려다 키우자고 하는 거예요. 애들도 자기들이 열심히 도울테니 데려오자고 하고요. 언제 거리에 나앉을지 모르는 형편에 말이에요. 참 대책 없는 가족이죠? 하하하."

그날 이후, 찬송이는 울지 않았다... 커지던 머리가 점점 작아졌다

찬송이와 엄마 희숙씨
 찬송이와 엄마 희숙씨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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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에 태어난 아기는 한 달간 인큐베이터에 있었고, 퇴원한 지 열흘 만에 희숙씨의 딸이 됐다. 아기에게는 이찬송이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줬다.

"병원에서는 3개월 이상 살기 어려운 아이를 왜 데려가느냐며 말렸지만 그런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무조건 빨리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데려오려니 그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친부모가 아이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서 입양 절차를 밟을 수 없는 거예요. 결국 친부모에게 각서를 받고 저희 부부 호적에 친자로 올렸어요. 어차피 내 자식으로 키울 건데 오히려 잘된 거라 생각했어요." 

희숙씨는 이렇게 해서 나이 마흔여덟에 늦둥이 딸을 얻었다. 찬송이에 대한 사랑은 남편과 두 아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엄마가 말을 꺼낸 날부터 찬송이를 딸로, 동생으로 여기며 기다렸던 것이다.

"솔직히 저는 걱정도 되더라고요. 제 나이도 있고 우리집 형편도 그렇고... 더구나 아픈 아이잖아요. 그런데 남편도 애들도 하루빨리 데려오자고 성화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예쁜 아기가 아니라고요. 머리만 크고 딱 ET같이 생겼는데 콧줄로 우유를 먹는 아이라고요."

찬송이는 선천성 무뇌수두증이라는 희소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5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한다는 무뇌수두증은 대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뇌척수액이 가득 차는 질병으로 흡수되지 못한 척수액 때문에 머리 둘레가 비정상적으로 커진다는 특징이 있다. 찬송이는 머리에 찬물을 빼는 기관 삽입 수술도 하지 못했다. 수술을 이겨 낼 정도의 건강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를 데려왔는데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있고 팔다리는 새처럼 앙상한 게 말 그대로 ET 같더라고요. 생후 한 달인데 머리 사이즈가 50.5cm였어요. 보통 아기보다 두세 배는 컸죠. 척수액이 고이면서 머리가 자꾸 커지니 얼마나 아팠겠어요. 그러니 아이가 24시간 울기만 하는 거예요."

아이는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주사기를 이용해 콧줄에 분유 30mL를 흘려 넣고 나면 몇 배나 더 많은 것을 토해내기 일쑤고 매일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머리로 인한 통증 때문에 한숨도 못 자고 울기만 했다.

"찬송이가 온 뒤에 정릉 임대아파트로 이사 가게 됐는데 거기서 얼마 살지 못하고 삼일아파트로 돌아왔어요. 아이가 밤새도록 우니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항의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하고... 결국 찬송이랑 저만 다시 삼일아파트로 왔어요. 다 무너져가는 아파트라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천국이더라고요."

그렇게 울던 찬송이가 울음을 그친 것은 4살 때다. 갈라진 두개골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물이 차올라 응급실로 달려간 그날. '이제 아이를 보내는구나' 싶었지만 고였던 척수액를 빼내는 수술을 받고 4박 5일을 견딘 찬송이는 기적처럼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찬송이는 울지 않았어요. 기적처럼 더 이상 머리도 커지지 않았고요. 오히려 조금씩 작아졌지요. 하지만 그때 이후로는 소변도 대변도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됐어요. 아이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서 관장을 하거나 소변 줄을 끼워줘야 하죠."

대소변을 가려주는 일보다 힘든 것은 먹이는 일이었다. 씹고 삼키는 기능이 어려워 토하기 일쑤고 자칫 기도로 음식물이 흘러 들어가면 질식사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급식관(L-Tube) 삽입을 권했지만 엄마는 가능하면 입으로 먹이고 싶었다. 입으로 음식을 받아먹었을 때의 느낌·맛·즐거움을 찬송이가 알기를 원했고, 그러다 보면 건강도 빨리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씹는 맛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만... 수술 택하다

새처럼 연약한 찬송이. 엄마의 사랑을 먹고 큰 아이다.
 새처럼 연약한 찬송이. 엄마의 사랑을 먹고 큰 아이다.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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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렇게 애를 썼지만 찬송이는 10년 만에 위장에 직접 급식관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더 이상 입으로 음식을 섭취하면 폐렴이 재발해 사망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음식만큼은 입으로 먹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폐렴 때문에 입원하고 검사를 하다 보니 입으로 섭취한 음식물들이 조금씩 폐로 새들어가는 것이 보였나 봐요. 위에 급식관을 연결하는 수술을 해야 산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시처럼 말라 뼈만 남은 아이의 배를 뚫어 수술을 하게 된다니 하늘이 캄캄해졌어요. 개복 수술이 쉽지만 찬송이가 통증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며 복강경으로 수술을 하겠다고 했어요."

입으로 먹는 즐거움을 지켜주기 위해 엄마는 10년 동안 애를 썼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아이가 위험해진다는데 어떤 엄마가 수술을 거부할까.

"그날도 정말 많이 울었어요. 처음엔 복강경으로 수술을 해서 금방 끝날 거라더니 세 시간이 지나도 네 시간이 지나도 수술실에서 나오질 않는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니 휘어진 척추 때문에 복강경을 진행하다가 개복 수술로 바꿨다더라고요.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그냥 둘 걸 공연히 수술해서 더 아프게 한 건 아닌가' 하며 남편과 둘이 찬송이를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급식관 수술을 받은 찬송이는 다행히도 잘 회복돼 집으로 돌아왔다. 찬송이네 집은 종로구 숭인동 한 상가건물 지하에 위치한 작은 개척교회. 예배당 뒤쪽에 벽을 세우고 전기 패널을 깔아 방을 꾸몄다.

이 방에서 찬송이는 엄마와 함께 잔다. 아니 잠을 잔다기보다는 함께 밤을 지새운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대소변을 가려주고, 가래를 빼주고, 소독을 해주고, 시간 맞춰 영양식을 튜브에 연결해 주고, 약을 먹이고, 욕창 방지를 위해 이리저리 뒤척여 주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 오기 때문이다.

"아빠는 여기서 못 주무세요. 찬송이가 한잠도 못 자고 뒤척이니 아빠도 같이 밤을 새워야 하는데 그러면 낮에 일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저쪽 목양실에서 주무세요. 찬송이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하루도 편한 잠을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대로 입고 지내다 이대로 입고 자고 그대로 일어나는 거지요. 아이만 생각하다 보니 내 몸 돌볼 겨를은 없죠."

말 못해도 좋은 거 싫은 거 다 아는 찬송이

작은 교회 목사인 아빠 이상일씨. 낮에는 목회 밤에는 대리운전을 한다.
 작은 교회 목사인 아빠 이상일씨. 낮에는 목회 밤에는 대리운전을 한다.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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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낳은 늦둥이 딸을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애지중지 키워 온 엄마와 아빠. 찬송이를 키우다 보니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지난날 두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 노릇을 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엄마.

"찬송이 언니 오빠 키울 땐 그러지 않았어요. 애들이 저를 '마귀할멈' '계모'라고 불렀거든요.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아이, 제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해내는 아이로 키우겠다고 무척이나 엄격하게 했어요. 아빠도 일하느라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몰라요. 기저귀가 뭐예요. 서너 번 안아준 게 다 일 거예요. 하지만, 찬송이를 키우면서 부모 사랑을 다시 배웠지요. 찬송이가 저희에게 부모가 뭔지, 사랑이 뭔지를 다시 가르친 거지요."

힘들었지만 지난 10년 동안 찬송이를 키우며 얼마나 많은 기쁨과 행복 그리고 보람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거라던 아이를 열 살이 되도록 키우면서 매일 기적과 같은 일상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 정도가 심해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엄마는 찬송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또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를 다 알 수 있단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엄마와 찬송이 사이에는 말보다 더 잘 통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 아니에요. 찬송이는 싫고 좋은 표현이 분명해요.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나요. 찬송이는 다 알고 있거든요. 지금도 다 듣고 있어요. 다만 말을 못할 뿐이죠. 그렇지 찬송아?"

엄마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미소 짓는 찬송이. 그래서 엄마 아빠는 찬송이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된다. 엄마가 애쓰고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좋아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엄마의 건강이다. 2, 3년 전부터 엄마의 건강에 이상이 오기 시작해 지금은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버렸다. 찬송이를 돌보느라 엄마는 자신의 건강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찬송이 어릴 적에는 일산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치료를 받으러 다녔어요. 정말 제 가슴에 넣고 키웠지요. 젊을 때는 밤낮으로 찬송이를 돌보면서도 집안일이고 뭐고 다 해도 힘든 걸 몰랐는데 2~3년 전부터는 한 번 누우면 일어나질 못하겠는 거예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몸이 천근만근에 뼈마디가 다 아프고... 

밤에도 몇 번씩 일어나 기저귀도 봐주고 물도 주고 그래야 하는데 잠이 들면 거의 기절한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남편이 도와주지만, 남편도 환갑인데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요. 찬송이는 아직 어린데 우린 자꾸 늙어가고 병까지 들고... 그래서 걱정이에요."

건강검진 결과 당뇨와 혈압이 있고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소견을 받았다는 희숙씨. 찬송이를 돌보려면 무엇보다 건강이 먼저인데 몸이 전 같지 않다 보니 부쩍 걱정이 늘었다. 주변에서는 힘든 상황에서 무조건 데리고 있는 게 최선은 아니니 시설에 보내는 것을 생각해보라지만, 엄마 아빠는 '시설'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부터 나온다.

"남편과 심각하게 상의해봤어요. 어쩌면 우리 욕심 때문에 찬송이를 고생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요. 햇볕 한 줄 들어오지 않고 공기도 좋지 않은 지하방에서 살게 하면서 뭐 특별히 아이를 위해 해주는 것도 없고... 제가 뭘 해주겠어요. 그저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그게 다죠.

제가 재활치료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뭘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찬송이에게 가끔 미안해요. 젊고 건강한 부모를 만났더라면, 더 잘 사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더 잘해 줬을 텐데. 더 행복했을 텐데. 더 오랫동안 찬송이를 지켜줄 수 있을 텐데... 나이 많고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너무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차라리 시설 보내라는 말... 고민되지만 함께 삽니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찬송이네 집 부엌. 관절이 아픈 엄마에겐 위험한 계단이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찬송이네 집 부엌. 관절이 아픈 엄마에겐 위험한 계단이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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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 부모로 살려면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한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는 아플 권리마저 없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살아 장애를 가진 내 자식의 마지막까지 뒷바라지해주는 게 모든 장애아 부모들의 소망이다. 하지만 자신은 뒷전에 두고 온 신경을 아이에게만 쏟다가 큰 병에 걸리는 부모도 적지 않다. 희숙씨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 건강한 몸 하나만 믿고 살아왔는데,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다 보니 엄마만 바라보고 사는 찬송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제가 힘들 때 늘 찬송이가 저를 일으켜 세워줬어요. 남편 사업 실패하고 다 무너져가는 청계천 삼일아파트에서도 살았고 지금 사는 이 지하교회에서 더운 여름도 추운 겨울도 다 지내고 살았어요. 가난했지만 뭔가를 빌리러 가지 않았고 우리 찬송이 먹이는 것, 입히는 것, 기저귀며 휴지며 약이며 넉넉하진 않아도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쓰고 살았지요.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자신이 없어지네요. 나이가 들고 건강이 전 같지 않아서 그런지 마음이 자꾸만 약해져요."

개척교회를 이끌어가며 어렵게 목회를 하고 있는 찬송이 아빠도 걱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시절 작은 교회 목사의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성도가 줄어 더 이상 교회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성도수가 열 명도 되지 않으니 교회를 유지하기는커녕 사는 것도 쉽지 않죠. 아내는 찬송이를 돌보느라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제가 낮에는 목회를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고 있는데 언 발에 오줌 누기죠. 부끄러운 말이지만 겨울이 다가오니 걱정이 됩니다. 찬송이에게는 정말 미안해요. 데려왔으면 잘 키워야 하는데 아빠가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찬송이를 키우느니 차라리 장애인 시설을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던 보건소 직원의 말에 부모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어떻게 내 새끼를 시설에 보낼 수 있냐며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단다. 하지만 그것조차 부모의 욕심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고.

시설에 가면 햇볕도 바람도 쏘일 수 있고 더위와 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전문적인 재활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잘 씻기고 잘 먹일 것 같아서... 일 년 내내 습하고 햇볕 한 조각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좋을 것 같아서...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를 떼어 놓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쏟아져 버린다.

"지금은 찬송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저희도 판단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고민은 잡시 접어두고 저희 부부가 할 수 있는 날까지는 함께 살려고 해요. 그러다가 정 어려운 상황이 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봐야지요."

너무나 쉽게 아이를 버리고 포기하는 세상에 찬송이 부모 같은 분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배 아파 낳았든 가슴으로 낳았든 한 번 부모 자식으로 맺은 인연을 이처럼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부모가 또 있을까. 찬송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님께 이렇다 할 조언을 드리지 못했다. 나 역시 찬송이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찬송이 엄마의 건강이 회복되고 찬송이 아버지의 경제적 상황이 좋아져 찬송이가 부모 품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랄 뿐. 그것이 찬송이 부모도 찬송이도 간절히 바라는 게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찬송이 가족에게 격려와 사랑을 전달해 주세요. 밀알복지재단(02-3411-4664)에 전화하시면 후원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밀알복지재단 누리집]을 통해서도 사랑을 실천하실 수 있습니다.



태그:#뇌수종, #밀알복지재단, #이찬송, #이상일목사, #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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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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