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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신의>의 최영(이민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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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위대한 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다. 막판에 이성계에게 당하기 전까지 그는 무패의 명장이었다. 몽골제국(원나라)과의 관계가 좋았을 때는, 몽골군을 도와 중국 한족 반란군을 대파한 적도 있었다. 그는 국제적인 명장이었다.

최영은 청렴한 정치인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금과옥조처럼 준수한 그였다. 명성은 천장을 쳤지만, '통장 잔고'는 항상 바닥이었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그의 집은 초라했고 간혹 식량도 모자랐다.

역사는 오로지 결과로만 말한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어쨌든 간에 그는 이성계에게 졌다. 그래서 이후 500년간 이성계 자손들의 무덤이 한양 주변에 화려하게 만들어질 때, 최영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중턱을 외로이 지킬 수밖에 없었다.

최영이 이성계를 신임한 이유

최영이 패배한 것은 이성계의 쿠데타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동정벌(만주정벌)을 떠난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을 공격하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럴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최영이 이성계를 덜 경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영 못지않게 이성계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여진족 지역에서 몽골에 충성하며 살다가 1356년에 스물둘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투항한 이래, 이성계는 각종 내우외환에서 고려왕조를 구한 일급 충신이었다.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까지 그는 무려 32년간이나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주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30년간이나 일편단심을 다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불법 유턴'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최영이 이성계에게 5만 대군을 맡겼던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거금 5억 원'을 손에 넣은 이성계의 표정이 그렇게 순식간에 바뀌리라고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만약 이성계가 군대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압록강을 건넜다면, 최영은 역사의 패자가 안 될 수도 있었을까? 역사에서 가정(if)은 무의미하다고들 한다. 가정을 해봤자 지난 역사가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을 하지 않으면 역사로부터 배울 게 없다. 그때 이랬다면, 이러지 않았다면 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야만, 역사에 대한 지식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향후 유사한 상황이 닥쳐도 잘 대응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역사의 가정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요동정벌 명령에 복종했을 경우에 최영이 승자가 됐을지 패자가 됐을지 판단하려면, 요동정벌이 실패했을 경우와 성공했을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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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의 전투 장면. 사진은 서울시 관악구 낙성대동의 낙성대에 전시된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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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정벌'이 바꾼 운명

한국인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듯이, 고려시대 진보세력은 '우리의 소원은 요동회복'이라고 노래했다. 요동정벌이 이 정도로 중차대한 과업이었기 때문에, 이 일의 결과에 따라 고려의 정치지형이 바뀌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최영의 운명도 이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이 명나라 군대에 패하고 돌아왔다면, 이성계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당연했다. 요동정벌이 추진된 1388년의 정치적 의미를 고려하면, 그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388년은 우왕의 심복인 최영이 이성계를 끌어들여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해였다. 우왕의 왕권을 위협하던 집권세력인 이인임·임견미·염흥방이 이로써 제거되고, 우왕의 왕권을 지지하는 최영이 이성계와 더불어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연합정권의 시소는 최영 쪽으로 기울었다. 최영은 고려사회의 주류인 데다가 공민왕 때부터 왕의 신임을 받은 데 비해, 이성계는 여진족 지역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성계가 최영을 능가한 것은 얼마 뒤 5만 대군을 장악한 후였다. 그러므로 연합정권 출범 당시만 해도, 최영이 이성계를 능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최영은 개경에 남아 권력을 공고히 하고 이성계는 요동에서 패하고 돌아왔다면, 최영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겠지만, 아무래도 이성계가 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가 최영을 꺾은 원동력은 최영이 맡긴 5만 대군이었다. 이 병력이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소모됨과 동시에 이성계의 위상이 추락했다면, 이성계가 최영을 능가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실패했다면, 최영의 정치적 우위가 계속 유지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랬다면, 이성계가 건국 시조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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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대자산 산속에 외로이 모셔진 최영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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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이성계가 명나라를 꺾고 돌아왔다면, 그의 위상은 당연히 높아졌을 것이다. 위상이 높아진 이성계가 귀국하여 병력을 반납한 뒤 최영과 대결했다면, 어느 쪽의 승산이 더 높았을까?

최영과 이성계 어느 쪽도 고려 군사력의 '과반수'를 장악하지 못했다. 이성계 군단의 주력은 동북면 여진족 출신들이었고, 최영 군단의 주력은 주상 경호부대였다. 양쪽 다 오랫동안 각종 전쟁에서 승리 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군사적으로 더 강했을지는 측정하기 힘들다.

신진사대부 대하는 태도 달랐던 최영과 이성계

하지만, 정치투쟁의 결과가 반드시 군사력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여론을 형성하는 지배층의 동향도 승부에 영향을 준다. 지배층이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수 있었다.

이 경우, 승산이 더 높은 쪽은 이성계였다. 왜냐하면, 이미 공민왕 시대에 지배층의 자리에 오른 신진사대부(개혁 성향 선비그룹)가 이성계에게는 우호적인 데 비해 최영에게는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은 이인임 정권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신진사대부에게 상처를 주었다. 10월 1일 방영된 드라마 <신의> 제15부에서 최영이 신진사대부를 두고 "꽉 막힌 선생들"이라고 폄하한 것처럼, 실제의 최영도 선비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서생들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것이다. 

한나라 건국시조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탐독한 황석공의 <삼략>.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장수는 마치 물을 갈구하듯이 학자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학자들의) 책략이 모여든다." 

장수는 학자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성계는 이 메시지를 잘 따랐다. 그는 신진사대부를 열렬히 포용했다. 신진사대부의 정신적 지주인 이색과 수제자인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 이후 한동안 이성계를 도운 것이나, 신진사대부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정도전이 끝까지 그를 도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처럼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이성계는 여진족 지역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당시에는 학자가 곧 정치가였으므로, 이들의 지지는 이성계에게 천군만마가 되었다. 

그러므로 최영과 이성계가 충돌할 경우, 신진사대부가 이성계를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양측이 군사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므로, 결국 신진사대부를 장악한 쪽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성공하고 귀환했다면, 최영이 정치적으로 밀렸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성계가 요동정벌에서 실패할 경우에는 최영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고 반대의 경우에는 최영의 패배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론은 최영과 요동정벌이 상호 모순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요동정벌을 추진한 최영의 입장에서는 요동정벌이 실패하는 편이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더 유리했던 셈이다.

최영은 위대하고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처한 모순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이것이 그의 실패를 초래한 핵심 요인 중 하나였다. '만약 위화도 회군 없이 요동정벌이 추진됐다면' 하는 역사의 가정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메시지는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