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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씨가 쓴 <마녀의 연쇄독서>.
 김이경씨가 쓴 <마녀의 연쇄독서>.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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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편견과 오해는 여지없이 작동했다. 새침해 보이는 분홍색 표지와 '마녀'가 붙은 책 제목을 본 순간, 딱 두 가지 생각이 일었다.

'대~단한 독서가 한 명 또 나셨네!'
'젊고 예쁘면서 독서량과 지식까지 자랑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 또 강림하셨네!'

자고로 외모로 전체를 판단하지 말라 했거늘, '분홍'과 '마녀'의 조합은 편견의 쓰나미에 선풍기를 틀어댔다. 오해의 핵심은 이거다.

'지적 허영심으로 충만한 젊은 여성이 그렇고 그런 서평집을 냈나보군.'

사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오만한 자아의 증거일 게다. 책 표지의 분홍보다 진한 새침함과 삐딱한 시선으로 몇 페이지를 훑어봤다. '뭐… 내공이 좀 있고, 글도 좀 쓰네' 하는 느낌이 들었으니, 역시 그때까지 내게는 책 읽는 자의 겸손함이 결여된 상태였다.

그러다 이 책 <마녀의 연쇄독서>(후마니타스)를 쓴 '마녀' 김이경을 저자와의 대화 자리에서 직접 대면했다. 일단, 기대(?)와 달리 젊은 여성은 아니었다. 중년이었다.(내가 실망했을 거라고 오해하지 마시길!) 기자라는 직업을 밝히고 참석했으니, 폼으로라도 수첩과 펜을 책상에 올려놓고 김이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약 1시간 30분 동안.

'누가 또 지적허영을 부렸군'... 괜한 오해였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김이경이 한 말을 복기해 적었다.

"독설하려고 독서하는 거 아니잖아요."

사실 이 말을 들었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책 몇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뭘 좀 아는 척하며 누군가의 가슴을 후벼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는 척'은 타인의 상처를 부르고, 종국에는 부족한 자기 밑천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연쇄를 부르기 마련이다.

아는 척의 위험과 타인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지식의 양날'을 아는 저자이니, 일단 겸손하게 '닥치고 독서'나 해보자는 생각이 일었다. 저자 대면이 독서 욕구를 불렀으니, 이것도 일종의 연쇄반응이다.

책이 잘 팔리지 않아 책 만드는 사람은 박봉이고 출판사는 경영난에 허덕이며, 동네 책방 마저 사라져 대형 서점에서는 '베스트셀러' 몇 권만 집중적으로 팔리는 사회가 한국 아닌가. 2011년 기준 한국민의 평균 독서량(일반도서, 종이책 기준)은 연간 9.9권으로, 한 달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의 월 평균 독서량 각각 6.6권, 6.1권에 비하면 한참 뒤처진 수치이면서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서평집과 책읽기를 독려하는(?) '책을 위한 책'은 시중에 넘쳐난다. 인터넷에서는 서평 전문 글쟁이 등 재야의 고수들이 춘추전국시대 진용을 갖춘 지 오래다. 이쯤되면 독서의 양극화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거칠게 분류하면 <마녀의 연쇄독서>도 서평집이고, 저자 김이경 역시 '독서무림' 세계의 빼어난 고수다. 그런데 이렇게만 쓰면, 개성과 특성을 뭉개버리고 손쉽게 '땡처리' 해버리는 폭력을 저지른 느낌이다.

직설적인 제목이 말하듯 이 책은, 책이 책을 부른 24편의 연쇄 기록이다. 연쇄의 불길은 저자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주제에서 불길이 번지기도 하며, 키워드 하나가 몇 권의 책을 읽느라 며칠을 불사르게도 하니,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은 저자 김이경은 작가 플로베르에 홀려 그의 전기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는다. 그 다음에는 키워드 '앵무새'에 꽂혀 환경 운동가가 쓴 <스픽스의 앵무새>를 읽으며 생물종 멸종에 무감한 우리 인간을 성찰한다. 스픽스 앵무새의 멸종으로 가슴을 친 저자, 이번에는 인간 세계 다양한 언어의 멸종을 이야기하는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에 눈길을 돌린다.

소설로 시작한 독서가 전기로 이어진뒤, 생물학을 거쳐 인문-사회학으로 돌아오는 궤적이다. 또한 조선의 문장가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는, 토크빌이 미국을 여행한 뒤 쓴 <미국의 민주주의>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재일 조선인 서경식의 저작과 장 아메리의 <자유 죽음>까지 연쇄를 일으킨다.

저자 김이경이 미리 정해놓지 않았기에 연쇄의 방향과, 책과 책을 연결하는 고리도 예측불허다. 그렇다고 연쇄의 불길이 자연스럽고 쉽게 저절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적절한 연쇄와 그에 알맞는 책을 위해 도서관에서 머리를 싸매기도 한다. 전혀 마녀답지 않게 말이다.

오묘한 역쇄독서의 맛... 나도 '연쇄' 시작한다

저자는 감정적이거나 허투로 책과 책을 연결하지 않는다. 그녀가 책과 책 사이에 놓은 노둣돌과 징검다리에는 고생하며 흘린 땀 냄새가 흥건하다. 책을 다루는 그녀의 글은 감상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딱딱한 정보만 나열하지도 않는다. 해당 책에 충실한 자세를 유지하기에 고전이든(<열하일기> <미국의 민주주의>), 자연과학 계열이든(<진화의 무지개> < 곤충의 밥상>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바로 지금 여기의 인간과 사회와 연결 고리를 찾아 성찰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녀가 놓은 노둣돌과 징검다리를 따라 책을 다룬 한 꼭지의 글을 다 읽으면, 마치 내가 읽지도 않은 그 책을 독파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아는 척하는 허영심에서 삶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딱이다. 이 한 권으로 어디 가서 최소한 24권 읽은 척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마녀의 연쇄독서>를 통해 독자들이 연쇄독서의 매력을 느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그 소망은 이룬 듯하다. 일단 나부터 이 책이 소개하는 <그 모든 낯선 시간들> <진화의 무지개>를 주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후 내가 진행할 연쇄의 키워드는 바로 '겸손'이다. <마녀의 연쇄독서>가 내게 던져준 가장 맛있는 열매는 바로, 겸손하게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이다. 이 정도 읽고 쓰는 내공이라면 저자 김이경은 적절하게 '자뻑'을 부릴 만도 한데, 늘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 겸손하기에 이런 내공을 쌓았으리라는 짐작도 든다.

저자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전할까 싶었는데, 김이경이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읽은 뒤 인용하고 쓴 문장을 그대로 돌려주는 게 딱일 듯싶다.

문장을 짓는다는 건, 아니 산다는 건 이런 것임을, 고독에 투정부리지 않고 온몸으로 감당하며 스스로를 지우는 것임을 배웁니다. 닿을 수는 없겠으나 '가만히 있어도 유한한 인생의 저 끝이 우수리호랑이의 묵직한 발자국처럼 한 발 두 발 다가오는' 날까지 묵묵히 그 길을 따르자고 감히 다짐합니다. 좋은 책은 이렇듯 나를 깨웁니다.


마녀의 연쇄 독서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의 연쇄

김이경 지음, 후마니타스(2012)


태그:#김이경, #마녀의 연쇄독서,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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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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