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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성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TV, 신문 등 언론뿐만 아니라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커뮤니티에서도 성범죄에 대한 얘기는 끊이질 않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장소·나이를 불문하고 일어나는 성범죄는 이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나는 계속되는 성범죄 사건과 그에 대한 불안함 속에서, 조금은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애써 잊어보려 했지만, 내겐 트라우마처럼 남았던 기억.

두 달 전, 친구를 만나고 집에 귀가하는 길이었다. 집에 가기 위해 여느 때처럼 1호선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 겹쳐서인지 다른 시간대보다 사람이 많았다. 1호선은 원래 복작복작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타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물론 앉을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지나, 내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신도림역에 도착했다. 내가 신도림역을 '지옥'이라고까지 칭하는 이유는 바로 발 디딜 틈 없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타는 역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금세 자리를 잡았고, 나도 옆 사람들과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고 노력해가면서 자리를 잡았다. 집까지는 딱 8정거장이 남아있었다. 얼른 도착해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내게 바짝 붙어온 남자에 '뭐 하시는 거예요?' 묻고 싶었지만

 지하철 성추행
ⓒ 오마이뉴스

그 순간, 뒤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사실 술 냄새가 놀랍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 얼큰하게 술 취한 아저씨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은 느낌이 좀 달랐다. '그냥 술 취한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아저씨는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내게 기대고 있었다. 아니 기댄 것이 아니라 붙고 있었다.

처음엔 '아니겠지' 생각하면서 뒤를 힐끔 쳐다봤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되레 내게 왜 보냐는 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에 '내가 너무 예민했나' 싶었다. 그런데 2-3분이나 지났을까. 뒤에서 또 바짝 붙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뒤돌아 쳐다보고 싶었지만,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할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우선 이 상황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 틈 속에서 나는 조금 옆으로 이동했다. 맘 같아선 다른 곳으로 피해버리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조금 옆으로 비켜서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또다시 내 뒤로 온 것이다. 우연이라고 나를 달래기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다시 내 뒤로 온 남자는 대담해졌다. 그 남자는 내게 더 바짝 붙었고, 그 남자의 숨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묻고 싶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이 말을 몇 번은 되뇌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지 못했다. 지금 말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걸 알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가끔 인터넷에서 접하던 지하철 성추행이 이런 거였나 싶었다.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무서웠다. 누군가 나를 꺼내줬으면 싶었다. 야속하게도,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서 나와 그 남자를 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까. 지하철은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그곳을 박차듯 내렸다. 내리고 나서야, 나는 몇 분간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지하철이 떠나고 안보일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 내가 그 남자와 함께 지하철을 탄 시간은 20여 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성인 여성 2명중 1명..."성추행 당한 경험 있다"

1호선 지하철에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지하철 타기를 망설였다. 지하철을 이용해야 할 경우에는 '방어태세'를 갖췄다. 사실 방어태세라고 해봤자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 문 옆에 붙어서 간다든지, 사람들 틈 속에 있을 땐 여자들 옆에 서려고 했다. 어쩌다 남자들 옆에 서게 되면, 긴장하고 경계했다. 그런 날이면, 집에 돌아오는 길이 더 힘들고 지쳤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경계하고 긴장하는 여성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최근 온라인 취업포털사이트 '사람인'이 성인 여성 5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응답자 2명 중 1명은 "실제로 성추행 및 성폭행 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중 "신체접촉 및 밀착 등 경미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경우가 응답자의 70.6%로 가장 많았다.

이처럼 많은 여성들이 지하철 등에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성추행을 당하더라도 창피하거나, 혹은 무서워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성추행범을 잡기도 힘들다. 이런 사정 때문에 경찰에서는 CCTV 설치 증가, 경찰 인력 증가를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대책은 사후 조치밖에 될 수 없다.

 지난 2011년에 제작된 4세대 전자발찌를 착용해보는 모습.
ⓒ 연합뉴스

요즘 지하철 성추행뿐만 아니라 많은 성범죄가 끊이지 않음에 따라, 여러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미 시행되고 있는 화학적 거세, 전자 발찌, 범죄자 신상정보 공개에서 더 나아가 물리적 거세, 사형제 부활까지 논의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사후 조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후 조치는 성범죄 근절에 한계가 있다.

성범죄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거세나 사형제 등의 가해자 엄벌이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는 가해자 처벌 강화에 집중해왔지만 앞으로는 피해자 지원을 강화하고 돌봄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

내 옆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마음 편히 지하철을 타고, 길을 걷는 날이 빨리 오길 바라본다.


태그:#지하철 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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