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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주인공인 김준(김주혁 분).
 <무신>의 주인공인 김준(김주혁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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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존경하는 역사 속 인물들의 상당수는 왕이나 관료다. 과거에는 왕이나 관료가 정치인과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왕 혹은 관료의 모습과 정치인의 모습을 함께 갖추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권력과 관련된 것이다. 독일 사회과학자인 막스 베버는 '정치는 권력의 세계에 참여하려고 하는, 또는 권력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했고, 미국 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는 '정치는 권력보유·권력확대·권력과시 중 하나와 관련된 것'이라고 규정했다.

정치의 본질이 권력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경하는 왕이나 관료들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역사 속 인물들도 어느 정도는 정치적 때가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극에서 주인공의 사소한 정치적 흠집을 다루지 않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속담처럼, 정치적 혹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정치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흠집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주인공이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일지라도 그냥 묵과할 수 없는 과오를 갖고 있다면, 사극에서는 그것도 시청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주인공의 업적과 과오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시할 것인지를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종영을 앞둔 MBC 드라마 <무신>이 최근에 보여준 '역사왜곡'은 좀 실망스러웠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무신정권 제9대 지도자인 김준의 정치적 과오를 숨기고 다른 인물한테 떠넘기는 데 급급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최항의 불한당 같은 행동 탓에 쿠데타 불가피했다?

무신정권 제6대 지도자인 최우는 망나니 같은 서자인 최항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드라마 속 최우는 자기 집 노비 출신인 김준에게 '내 아들 최항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최우는 아들에게 최고 권좌를 넘기면서도 국정운영의 실권만큼은 김준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처럼, 최항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은 뒤에도 행실을 고치지 못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술과 섹스에 정신이 팔린 사람이었다. 그냥 그렇게만 살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최항은 술과 섹스에 심취했다가 잠시 정신을 차린 뒤에는, 틈만 나면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인물들을 그냥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폭군이었다.

무신정권 제7대 지도자인 최항(백도빈 분).
 무신정권 제7대 지도자인 최항(백도빈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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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김준은 그런 최항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저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는 자기 소임만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몽골과의 전쟁이나 국정 수행은 그의 책임 하에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자신은 충실히 국정을 수행하는데도 최항이 계속해서 인사·사법권을 남용하자, 김준은 중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에 독을 풀어 최항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최항이 죽은 뒤 그 아들인 최의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간신들이 최의의 주변을 둘러쌌기 때문에 김준이 부득이하게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 <무신>의 최근 스토리다.

<무신>의 최근 방영분을 보면, 최항의 불한당 같은 행동들 때문에 김준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김준이 최항 시대의 정치적 혼란에 대해 별다른 책임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생긴다. 

무신정권 제9대 지도자인 김준은 1258년부터 1268년까지 최고 권좌에 있었다. 제7대 지도자인 최항이 집권한 기간은 1249~1257년이었다. 이렇게 집권 기간이 다르기 때문에 김준이 최항 시대의 혼란과 무관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 딸린 최항 열전에 의하면, 최항은 말 그대로 망나니였다. 한때 아버지 최우에게 버림을 받아 승려 생활을 한 기간에도, 그는 사채놀이를 하면서 일반 백성들을 괴롭혀서 지역 경제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최항의 추종자들은 유부녀를 강간하고 공공기물을 함부로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두목인 최항의 도덕성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 최항 자신은 아버지가 죽자 딱 이틀간만 상복을 입었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첩들을 자기 방으로 데려간 뒤 문을 닫아걸었다. 이 정도면, 최항이 국정을 운영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잔혹한' 최항에 '국정에 충실한' 김준... 불가능한 설정  

그런 최항이 최우의 후계자가 된 것은 김준의 지원 덕분이었다. <고려사> 김준 열전에서는 "최우가 최항을 후계자로 결정한 데는 김준의 힘이 컸다"고 했다. 이렇게 킹 메이커 역할을 했기 때문에, 최항 시대에 김준이 핵심 실세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했다. 김준은 최항의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준 열전에서는, 김준이 최우 시대보다 최항 시대에 훨씬 더 신임을 받았다고 했다. 최우 때도 김준은 최우를 항상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최항 때는 김준과 최고 권력자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이 정도면 최항 시대에 김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항의 명의로 단행된 폭정이 김준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김준 역시 최항 시대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항의 잘못을 나무라는 김준(왼쪽).
 최항의 잘못을 나무라는 김준(왼쪽).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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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신>에서는 이런 폭정이 김준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했다. 후견인인 김준이 반대하는데도 최항이 은근슬쩍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주인공 김준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한 역사왜곡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김준의 이미지와 최항의 이미지를 분리하고자 <무신>이 고안한 첫 번째 장치는, 김준은 오로지 국정과 전쟁 수행에만 전념했고 최항은 인사·사법권을 갖고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다.

입법·행정·사법이 분리되지 않은 고려시대에, 한쪽에서는 인사·사법권을 남용하고 한쪽에서는 국정과 전쟁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게 과연 말이 될까? 게다가, 이런 일이 잠시도 아니고 무려 8년간이나 계속될 수 있을까?

<무신>이 고안한 두 번째 장치는, 집권한 지 얼마 뒤부터 최항이 후견인인 김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준이 최항을 꾸짖고 나무라기도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역사기록과 배치된다.

최항 열전에서는, 김준과 최항의 관계가 나빠진 것은 최항이 김준 라인인 송길유를 실각시킨 때부터라고 했다. 송길유는 최항 정권 막바지에 실각됐다. 그러므로 최항이 집권한 동안에는 김준과 최항의 관계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김준 역시 최항 시대의 정치적 파행에 대해 상당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최항의 만행에 대해 분개했기 때문이 아니다. 최항 말년부터 최씨 집안과의 관계가 나빠졌고, 최항의 아들인 최의 때는 실세 그룹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주요 사실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물론 김준에게 정치적 오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무려 10년간이나 몽골과 싸워 고려를 지켜냈다. 고려-몽골의 40년 전쟁 중에서 25%는 그의 지휘 하에 수행된 것이다. 이런 공로는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준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몽골을 물리친 공로와 폭정에 대한 책임 중에서 어느 쪽을 중요시할 것이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상당수 시청자들은, 김준 역시 정치인이므로 어느 정도의 흠집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시청자들의 몫이다. 사극은 시청자가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주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무신>은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된 판단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노비 출신으로 무신정권 수장에 올라 몽골을 막아낸 김준의 입지전적 활동만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그가 범한 정치적 과오는 최항한테 떠넘긴 것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역사 속 인물의 과오를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고 주인공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정도를 벗어난 일이다.


태그:#무신, #김준, #최항, #최우,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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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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