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 방비엥까지 우리 아이들의 사랑방이 되어준 차 ..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여행학교에서 규칙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하루의 일기를 매일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다. 일기는 아이들이 여행을 스스로 성찰하게 하는 도구다. 또, 시간 지키기는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연락할 길이 없는 이곳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만약 이 두 가지의 규칙 중 어느 것이라도 어길 때에는 상응하는 벌금이 부과되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씩 하는 일기장 검사에서 밀린 일기가 발각되면 하루 치에 1달러씩, 모이기로 한 약속 시간에 늦으면 10분에 1달러씩 정도를 내는 식이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여행이 끝날 때쯤 전체 회식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부부가 한 시간이나 늦어 버렸다. 아침 일찍 방비벵으로 떠나는 날이다. 방비엥으로 가는 길은 라오스 북부지역의 카르스트 산악지대를 넘어야 해서 도로도 험하고 시간도 온종일 걸리는 힘든 여정이다. 그래서 미니버스는 새벽녘에 떠나기로 예약되어 있었고, 미니버스와 연계된 뚝뚝 택시가 출발 시간 30분 전에 우리들이 각각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근처로 픽업을 나오기로 했다.

..
▲ 루앙프라방의 한적한 거리 ..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우리 부부를 태워갈 뚝뚝은 30분도 더 늦게 나타나서, 루앙프라방 중심부를 한 바퀴 돌고도 모자라 외곽지역의 게스트하우스까지 돌면서 여행자들을 빽빽이 채워 실었다. 그 사이에 시간은 예정보다 1시간이나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사나 '뚝뚝이'의 이런 관행이야 툭하면 생기는 일이지만, 이를 알 턱이 없는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대학생인 하영이가 제일 먼저 달려왔다.

"삼촌, 이모, 왜 이제 오세요."

목소리와 얼굴만 봐도 그 시간 사이의 마음고생이 보이는 듯했다. 버스 운전사가 한 차에 13명 전부를 태우고 출발하려고 해서 안된다고 버티느라고 힘들었던 모양이다.

"버스 출발시간은 9시. 하지만 삼촌과 이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뚝뚝이 오는 길목에 서서 하나하나 들여다보았지만 허탕이었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리고 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고가 난 걸까. 두 분이 아프신가. 방비엥에서 만나는 거였나. 우린 어떻게 해야되나.' 9시 50분까지 발을 동동 구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니버스 기사들이 10시에 출발한다며 차에 타라고 했다. 이때 정말 심장이 쫄깃쫄깃해졌다. '2명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기다려 달라'는 말을 전하긴 했는데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고, 삼촌과 이모랑 연락할 길은 없고."  - 하영(스무 살)

승합차 두 대로 가기로 예약한 건데 우리 부부가 없는 사이 차 한 대로 보내고, 우리 부부는 다른 서양여행자들에 끼어 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픽업 택시를 늦게 보내고도 또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차를 한 대만 운행하려는 심보가 세계 어디를 가든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심리인가 싶어 쓸쓸해진다. 곧바로 사무실로 가서 따져 묻는다. 쉽게 차 한 대가 더 배치된다. 대신 4명의 서양여행자가 한 차에 동행하게 되었다.  

...
▲ 방비엥으로 넘어가는 산길에서 ...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버스는 루앙프라방을 벗어나며 강물을 따라 한 시간 남짓 달리는가 싶더니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길이 높아질수록 시야가 트이더니 산봉우리의 모양새들이 올록볼록 들어가고 불거지면서 이곳이 지리책에도 나오는 세계 3대 카르스트 지형 중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길 아래쪽 비탈을 따라 바나나 나무나 옥수수가 많아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 아니라면 낭떠러지를 겨우 면한 작은 땅뙈기 한 편에 나무집 한 채라도 서 있다. 또, 길가에는 노인들이 타작한 벼를 말리고, 청년들은 볏단을 나르고, 아이들은 바람을 쫓아 뛰어다닌다.

생경한 공간에서 만나는 익숙한 풍경들이다. 생각해보면 이 높고 외지고 험한 곳에 마을을 이루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신기하고, 이렇게 꼬불꼬불 길이 생겨나 피부색이 다른 우리들이 버스 차창을 사이에 두고 눈빛을 나누고 손을 흔들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그런데 여행학교의 아이들은 오늘도 버스 밖 세상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다. 언제나처럼 버스 안에서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와 게임에 몰입해 있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나선다.

"이야~, 얘들아, 저기 저 산들 좀 봐~아!"   
"우와~!"

그렇게, 아이들이 반응을 보이는가 싶더니, 딱 그 감탄사 한 마디뿐이다. 곧바로 자신들의 좀 전 화제로 돌아간다.

"그런데 있잖아! MC몽은 어떻게 됐을까?" 

물론 한 번으로 쉽게 물러날 나도 아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감정을 잔뜩 실어 억양까지 한껏 높인다. 

"어, 저기, 저 집 대나무로 지었네. 이~야, 전통 집인가 봐!"
"우왕! 진짜! 대나무다!"

내가 감정을 넣은 만큼 아이들의 반응 역시도 리얼하게 나오는가 싶더니, 나로서는 어떻게 두 가지의 대화가 연결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내용의 화제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바로 연결된다.

"우왕! '시크릿 가든' 보고 싶다."
"진짜! 현빈 너무 멋있어. 집에 가면 하루에 다 볼 거야!"

도대체 대나무집과 '시크릿 가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크릿 가든'이 대나무로 지어지기라도 했다든가, 아니면 현빈이 라오스에서 봉사활동이라도 해서 뉴스에 보도되었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인가.

..
▲ 언제, 어디서나 싱글벙글인 아이들 ..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아무튼, 이번에도 아이들의 반응은 단발로 끝났다. 그때였다. 마침 창밖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만약 학교에 다닌다면 중학교 1학년인 서희나 수경이나 영준이 또래의 아이들이다. 나는 다시 여행학교 아이들의 눈을 창밖으로 돌리려고 애쓴다.

"저기 애들 물동이 들고 가는데…? 너네 또래다."
"불쌍하다…."

드디어 아이들의 감정이 이입되는가 싶더니…. 하필 그 순간에…. 라디오에서 동방신기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라오스의 라디오방송에서 대한민국의 가수인 동방신기의 노래가 대한민국에서 잠시 여행 온 아이들이 카르스트 산악지대를 넘어가고자 탄 버스에서 듣게 될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당연히, 차 안은 아이들의 함성으로 난리가 났다. 동방신기가 라이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해도 이보다 더 열광적일 순 없으리라!

이로써 어떻게든 그들의 시선을 라오스의 자연과 사람들의 삶의 풍경으로 옮겨보려던 나의 시도는 결정적으로 무산되었다. 친구들이랑 재잘거리며 물동이를 이고 가던 라오스의 여자아이들은 이미 저 멀리 지나쳐버렸고, 여행학교의 아이들은 버스가 떠나가라 동방신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
▲ 루앙프라방에서 방비엥으로 가는 산길 ..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이제 아이들의 관심을 창밖으로 돌리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의 노랫소리에 놀란 버스가 덜컹대고 비탈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라 해야겠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 몰래 또 한숨을 쉰다. 아, 아이들은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우게 될까. 보호자로서 교사로서 동료여행자로서 함께 여행하고 있는 우리 부부는 또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양 마냥 즐겁다. 차 안에서도, 배 안에서도, 호텔 방에서도, 식당에서도, 강변에서도, 산 위에서도, 그곳이 어느 곳이든 그들에겐 상관이 없다.

'여행이 어때?'라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10분의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재밌어요!'라는 대답을 돌려준다. 그래서 뭐가 그리 재미 있냐고 재차 물어보면, 마치 자기들끼리 미리 짜둔 것처럼 '그냥요!' 혹은 '다요!'라는 대답이 이어질 뿐 더도 덜도 없다. 그냥 여기 라오스가 좋다는 건, 대한민국에 있는 자신들의 시공간을 떠나온 것 자체가 즐겁다는 것일까.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신들을 규율하던 학교도 부모도 사회적 편견도 없는, 혹은 스스로 규율하는 어떠한 압박도 없는 이곳에서는 무엇을 하든 또는 무엇을 하지 않든지 그 모든 시간이 다 즐겁다는 식이다.

창 안에서는 동방신기의 노래가 끝나고, 창 밖에서는 굽이굽이 산봉우리와 산마루가 동화책 속의 삽화처럼 흘러가는 사이에 아이들은 꼬박 잠이 들었다. 쌔액쌔액.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예쁜 봉우리들의 파도타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이 아이들에겐 자신들의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그저 미래의 뭔가를 준비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들이 현재 즐겁다면, 그들이 지금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여행을 통해 뭔가를 보고, 느끼고, 배우게 하고 싶은 것은 또 하나의 나의 욕심은 아닌가?

'지금 아이들은 즐겁다, 행복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루앙프라방 야시장에서 산 목걸이와 티셔츠를 입고 호기심 가득, 쇼핑 상대를 고르는.. 중1, 수경
▲ .. 루앙프라방 야시장에서 산 목걸이와 티셔츠를 입고 호기심 가득, 쇼핑 상대를 고르는.. 중1, 수경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그날 방비엥에 도착해서 아이들에게 한턱 쏘았다. 방비엥의 여행자 거리에는 지난 여행에서 만난 친구 '미스터 리'가 그의 계획대로 치킨 하우스를 막 오픈한 상태였다. 친구네 매상도 올려줄 겸, 하루 온종일 산길 버스를 타느라 힘들었을 아이들의 뱃속도 위로할 겸, 삼촌이 계산할 테니 맘껏 먹어보라고 한 것이다.

아이들은 통닭은 기본이고 돈가스, 떡볶이, 라면, 된장찌개, 팥빙수, 주스 등 한 명당 서너 개가 넘는 음식들을 주문했다. 그렇게 배불리 한국 음식을 먹은 날 저녁, 우리들은 여행을 떠나 처음으로 모두가 한 숙소에 묵으며 여행에 대해 중간평가를 했다. 절반의 여행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 스스로 여행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
▲ 방비엥에 도착해 숙소로 이동하는 아이들 ..
ⓒ 양학용

관련사진보기


그날 밤 한 명씩 지금까지 자신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 마음이 이른 봄날 눈 녹듯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 부끄럽기까지 했다. 아이들을 믿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게임만 하고, 수다만 떨고, 잠만 자는 줄 알았는데... 언제 그렇게 볼 것들을 보고 생각할 것들을 생각해두었는지 놀랍기까지 했다.

물론 아이들의 관심은 여행 중간점검이나 소감보다는 내일부터 바뀌게 될 모둠에 누가 함께하게 될 지에 더 가 있고, 그들의 여행 소감이라는 것이 우리 부부의 욕심에는 차지 않는 정도이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볼 것도 할 것도 많은 이 넓은 세상에 나와서 기껏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모둠원인가 싶어 한심한 생각이 들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사실 인생이란 것도 그렇다. 무엇을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보다는 때로는 누구와 함께인가가 더 중요하기도 한 것이다.

다만 어른인 우리는 가끔 아닌 척할 뿐이고, 아이들은 솔직한 것뿐이고.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방비엥, #루앙프라방, #시속4킬로미터의행복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