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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모여 리듬과 동작을 정하고, 또 수정하고, 수십 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수업시간에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 난타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함께 모여 리듬과 동작을 정하고, 또 수정하고, 수십 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수업시간에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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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두드리는 소리에 강당이 들썩인다. 난타 공연이 이번 축제의 오프닝으로 정해진 모양이다. 연습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의 표정이 자못 비장하다. 모여서 리듬과 동작을 만들고 수정하기를 수십 번, 힘껏 북 채를 쥐고 연습을 하는 10명의 일사불란한 손놀림은 여느 군무보다 훨씬 더 절도 있게 느껴진다.

쉬는 토요일인데도 강당엔 축제 준비를 하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있다. 무대 위에 올라가는 공연 팀과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음향과 조명, 무대 설치 등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이다. 8월 31일, 학교 축제를 앞두고 이미 만들어진 큐시트에 따라 자신들의 역할을 꼼꼼히 체크하며 호흡을 맞추고 있는 중이다.

주말도 잊은 채 밤낮으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는 이 아이들은 1년 동안 오로지 축제만 기다려왔다. 기실 오로지 입시에 '올인'해야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축제란 친구와 선후배들, 그리고 외부 손님 등 1000여 명의 관객 앞에서 자신이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지난 1년간 갈고 닦은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유일한 자리다.

더욱이 입시 공부에 젬병인 아이들에게 축제는 학교에 다니는 이유이자 낙이기도 하며, 그들이 친구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강당에서 온종일 땀 흘리기를 마다치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아이들은 당일 무대 위에 선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난타 공연 팀의 연습이 끝나자 인근 여학교의 댄스 팀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언제부터인가 남학교는 여학교의 댄스 팀을, 또 여학교는 남학교의 댄스 팀을 찬조 팀으로 섭외하는 게 보편화됐다. 국내외에서 케이팝(K-POP)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데다 그 나이 또래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진 탓일 게다. 그러다 보니 '찬조'가 '메인'보다 더 폭발적인 호응을 얻기도 한다.

조명 신경쓰랴, 동작 신경쓰랴... 바쁘다 바뻐

즉흥적으로 춤동작을 만들어 시연하고, 다른 공연 팀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 무궁무진한 아이들의 '끼' 즉흥적으로 춤동작을 만들어 시연하고, 다른 공연 팀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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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앳된 아이들이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춤동작을 선보이는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웬만한 아이돌 그룹 저리가라다. 같은 인문계 고등학교 아이들인데 언제 짬을 내 연습을 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도 자기들끼리는 불만스러웠는지, 다시 모여 춤동작을 바꾸고, 시연하고, 따라 한다. 모두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이다.

난타 공연이든 댄스든 움직임을 더욱 현란하게 보이게 하는 건 단연 조명이다. 동작 하나하나에 어떤 조명을 가동시켜야 하는지를 미리 큐시트에 초 단위로 꼼꼼히 적고 실제로 적용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음향을 담당하는 아이를 찾아가 시간을 맞춰보고, 인터넷을 통해 실제 텔레비전에서의 모습을 모니터링하는 등 스태프들도 공연 팀 못지않게 분주하다.

담당 분야별로 넋 놓고 땀 흘리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 음료수와 함께 피자 수십 판이 배달됐다. 쉬는 날이라 급식소를 이용할 수는 없어, 피자로 점심을 때울 참이란다. 한창 클 나이에 고작 피자로 끼니를 대신하긴 어려울 텐데 아이들은 연신 괜찮단다. 신나는 일을 하는데 배고픈 게 뭐 대수냐는 표정으로.

따가운 오후 햇볕에 강당 지붕이 익은 모양이다.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지만,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땀이 비 오듯 하지만 그나마 지금은 견딜만하다. 축제 당일 강당 안에 1000여 명이 들어차게 되면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히게 될 것이다. 볼거리, 즐길 거리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런 환경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되레 반가운 이유다.

고3에겐 금기가 된 단어... '축제'

그럼에도 굳이 한여름에 축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학습 분위기를 저해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 때문이다. 평상시 동아리 활동 시간을 활용한다고는 하지만, 무대 공연과 함께 동아리별 전시회 등 테마 부스를 준비하는 데 족히 2~3주는 필요하기 때문에, 학습 효율이 다소 떨어지는 여름방학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오랜 관행이 된 탓에, 아이들은 축제가 끝나면 곧 여름이 다 갔다고 여긴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에는 놀지 말고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학교의 '배려'다. 더욱이 가을의 끝 무렵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으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2학기에 축제나 체육대회처럼 북적대는 학교행사를 치르는 건 퍽 부담스러운 일이다.

기실 수능을 앞둔 3학년 수험생들에게 축제는 '남의 일'이다. 학생회장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공연에 오를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관객이 돼 구경할 수도 없다. 관행적으로 축제는 1, 2학년 학생들만을 위한 학교행사다. 올해 3학년 아이들 몇몇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지난해 축제를 치르고 나니 비로소 수험생이 됐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도 '끼'는 어쩔 수 없는 모양. 점심께 자습을 하다 말고 축제 연습이 한창인 강당 주변을 배회하는 3학년 아이들이 여럿 보인다. 묻지도 않았는데 "잠시 바람 쐬러 나왔다"며 쭈뼛거리다 이내 "무대 올라가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축제 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쉰다. 고개 숙인 채 교실로 뒤돌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데 무슨 공부가 될까 싶었다.

축제의 진짜 재미, 아이들을 웃게 만듭니다

땀이 비 오듯 해도 연습은 쉬지 않는다. 힘들어도 아이들의 표정은 밝다.
▲ 매사에 의욕이 없다고 질책 받는 아이인데... 땀이 비 오듯 해도 연습은 쉬지 않는다. 힘들어도 아이들의 표정은 밝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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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이번 축제를 준비하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어 수업시간 내내 졸거나 선생님들로부터 지적깨나 당하는 '문제아'들이다. 개중에는 얼마 전 학교폭력 문제로 교무실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한 아이도 있다. 수업 중 그들의 희멀건 눈빛이 이렇듯 초롱초롱해진 건 오로지 축제 때문이다.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아이가 이른 아침, 그것도 쉬는 날 학교에 달려나오는 것. 또, 공부하기 싫어 교과서는 물론 볼펜도 가져오지 않는 아이가 제 몸보다 큰 가방에 온갖 소품을 담아 챙겨오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책 읽으라면 채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야자 시간이면 엎드려 잠자기 바쁜 아이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가며 춤에 몰입하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 차라리 낯설다. 축제는 이 아이들의 해방구인 셈이다.

매일 학교에 나오지만 아무런 의지도 욕심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핀잔을 듣는 아이들이지만, 축제를 앞둔 요즘만큼은 전혀 다르다. 입시 공부에만 젬병일 뿐, 톡톡 튀는 아이디어에 순발력과 재치를 두루 갖췄다. 즉흥적으로 춤동작을 고안하는가 하면, 기존 노래를 편곡해서 쓴다. 또, 진행자로서 애드리브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아이들끼리 서로 협의하여 기획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담당 분야만 따로 있을 뿐 위계도 없고, 위계가 없으니 명령과 복종이 있을 리 없다. 아이들끼리 지지고 볶는 셈인데, 그렇다고 중구난방 어수선하지는 않다. 꼭지별 연결 동작을 연습하고 마무리하는 데 시간이 빠듯할 거라 우려했더니, 걱정할 것 없다며 되레 큰소리친다. 주무부서로서 아이들과 함께 축제를 치러야 하는 학생부 교사들이 되레 데면데면할 지경이다.

학교행사도 교육의 일환이고 보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말하자면, 축제 역시 막상 당일 치르는 것보다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이 훨씬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의미다. 고백하건대 지금껏 축제를 '학교와 교사가 장을 마련하고 공부에 찌든 아이들에게 하루쯤 일탈을 허용하는 것' 정도로 여겨왔다.

쉬는 날과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축제 준비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진정한 교육인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된다. 아이들을 놀게 해야 한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어른들이 우려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놀지는 않는다. 뭘 하면 즐거운지, 또 뭘 해야 다른 아이들이 더불어 즐거워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축제의 공연 큐시트도, 주간 테마 프로그램도 모두 아이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것도, 스태프도, 심지어 졸업한 동문 선배들을 찾아가 후원을 부탁하는 일조차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다. 축제를 마무리하고 나서 느끼는 성취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닌 게 아니라 학교생활 중에 언제 또 그런 느낌을 가져볼 수 있을까.

그런데도 고작 학생부장이랍시고 하는 짓이란 거칠게 말해서, 그들이 기획한 축제가 '선량한' 다른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감시하려는 '수작'일 뿐이니. 늘 그렇듯, 교육자인 양 너스레 떨며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무작정 백안시하는 나 같은 기성세대, 곧, '꼰대'들이 문제다.


태그:#학생부장 일기, #학교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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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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