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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숙(가명·39·미혼)씨는 8년 정도 사용한 전기압력밥솥이 과열로 인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서비스직원을 불러야 했다. 비용이 좀 들더라도 꼭 고쳐서 쓰고 싶었던 것은 엄마의 손길이 묻어있는 밥솥이기 때문이었다. 2년 전에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인숙씨는 엄마의 손때가 묻은 밥솥으로 밥을 해먹을 때마다 마치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고 한다.

밥솥을 뜯어 이리저리 둘러보던 직원은 웃으며 이야기했다.

"어휴, 밥솥 굉장히 오래 쓰셨네요. 이 모델은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서요, 여기 보이시는 전자기기판을 통째로 갈아야 하는데 비용이 7만 원 정도 소요될 거예요. 고쳐 쓰시지 말고 그냥 새 거 하나 사서 쓰시는 게 나아요. 어떻게 하실래요?"

어떻게든 고쳐 쓰고 싶었던 인숙씨도 수리비용이 7만 원이라는 말에 순간 멈칫했다. 전기압력밥솥보다 그냥 가열해서 밥 짓는 압력밥솥 밥맛이 더 좋고 가격도 싸다며 그냥 고장난 김에 고치지 말고 새로 하나 사라던 동생의 충고도 떠올랐다. 선뜻 결정짓지 못하자 수리직원은 친절하게 명함을 건네며 "오늘 출장비는 따로 안 받을테니, 수리하시려거든 연락주세요"하고는 나갔다.

결국 더 싼 가열형 압력밥솥으로 새로 구매하고, 옛 전기압력밥솥은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 베란다에 보관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졸지에 압력밥솥이 두 개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까짓 우산 얼마나 한다고... 차비가 더 들었겠다"

송은자(가명·43·기혼)씨는 어느 날 어지러운 신발장을 정리하던 중 우산이 무더기로 나오는 걸 보고는, 작정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우산들을 끌어 모았다. 모아놓고 보니 무려 15개나 돼 깜짝 놀랐는데 문제는 그 중 몇 개만 쓸 만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어디 하나씩 고장 나서 당장 쓰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겉모양으로는 멀쩡한 것들이라 모두 담아서 수리해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들고 나갔다. 구두 고치는 곳에 들고 갔더니 "저희 우산은 못 고쳐요"라고 손사래를 치고, 대형마트에 혹 수리점이 있으려나 돌아봤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과연 어딜 가야 고칠 수 있는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 일단 들고 집으로 들어와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대부분 특정 지역 '종합사회복지관'이나 '재활용센터'에서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열심히 메모해서 전화문의를 거친 후에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타고 가서 말짱하게 고쳐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고친 우산들을 보여주며 이야기하자 "그까짓 우산 얼마나 한다고… 돌아다니느라 시간만 더 들고, 차비가 더 들었겠다"며 핀잔을 주었다. 은자씨도 생각해보니 조금 머쓱하긴 했다. 왜 고쳐서 다시 사용하는 것보다 다시 사는 것이 노력면에서나 비용면에서나 더 경제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일까.

더 많이 생산돼 팔려나가야 이익인 '생산 시스템'

<너무 늦기 전에 알아야 할 물건이야기>(애니 레너드 저, 김영사 펴냄)를 보면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이 '재사용'보다 '재구매'를 요구하는 시스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생산 시스템은 고장 나서, 더 못쓰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재구매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조차 없다.

지속적인 재구매를 일으키려면 유행에 뒤떨어져서, 싫증나서 던져 버리고 새로운 것을 구매하도록 마케팅해야 한다. 재사용은 회사의 이윤 창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생산되고 계속 팔려나가야 유지되는 회사라는 공룡은, 부레가 없기 때문에 헤엄치지 않으면 바다로 가라앉기에 잠잘 때까지도 헤엄쳐 다녀야 한다는 다랑어를 떠오르게 한다. 게다가 생산자는 폐기물을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만들어서 많이 팔수록 이익이며, 우리들의 세금으로 대량 생산돼 버려지는 재고와 각종 포장재들, 쓰레기들은 폐기되고 버려진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취향'과 '나만의 개성'은 진정 나다움일까 그저 주입된 가치일까.

"우리 자녀 세대가 되면 더 심해지겠죠? 고쳐 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회적 시스템이 되지 않을까요? 우산을 고치러 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노인이 되면 내 몸 여기저기 막 아프고 고장나기 시작할텐데 우리 자식 세대들이 '어차피 노인이고 더 건강해질 수 없는데 계속 돈 들여 고치는 것보다 그냥 죽는 게 경제적이잖아'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물건의 생애처럼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좀 황당한 생각이긴 하지만 잠시 몸서리가 쳐졌어요."

새로 사는 걸 권하는 사회, 괜찮을까?

많은 국가들에서는 개인 운전면허증에 사고로 인한 사망시 장기 기증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있다. 2003년 발표된 한 논문을 보면, 호주의 장기 기증률은 100퍼센트에 가깝지만 독일은 12퍼센트, 스웨덴은 86퍼센트, 덴마크는 4퍼센트에 불과하다. 이처럼 국가별로 나타나는 장기 기증률의 엄청난 편차는 중요한 질문 형식 때문에 생기는 프레이밍 효과이다. 장기 기증률이 높은 국가에서 기증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뜻을 직접 표시해야 하는 '옵트아웃 opt-out' (선택적 거부) 양식을 사용한다. 이 단순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부 의사가 있다고 간주된다. 반면 장기 기증률이 낮은 국가는 '옵트인 opt-in' (선택적 동의) 양식을 쓴다. 즉 장기 기증을 하고 싶다면 직접 뜻을 표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전부이다. 따라서 장기 기증률을 끌어올리는 최상의 방법은 귀찮게 굳이 표시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채택되는 '디폴트 옵션 default option'을 정하는 것이다. - <생각에 관한 생각 Thinking Fast and Slow>(대니얼 카너먼 저, 김영사 펴냄)

사실 단순히 개개인의 윤리의식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무엇을 새로 사서 쓰든, 고쳐 쓰든 그거야 소비자 개인의 선택과 판단의 문제다. 단지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 시스템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쳐 쓰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새 것을 사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좋은 사회적 시스템이라면 크게 문제될 이유가 없다. 실제로 마포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리병원처럼 자발적인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필요하다면 우리 스스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작은 실천이 아닐까.

일상의 사물을 치료하는 해결사들의 수리병원. 현재 마포구청 앞에서 운영하고 있는 수리병원은 해결사들도 민간인들이다. 사업주체인 문화로놀이짱은 지속가능한 물건의 쓸모를 도모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일상의 사물을 치료하는 해결사들의 수리병원. 현재 마포구청 앞에서 운영하고 있는 수리병원은 해결사들도 민간인들이다. 사업주체인 문화로놀이짱은 지속가능한 물건의 쓸모를 도모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 문화로놀이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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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박미정 시민기자는 현재 (사)여성의일과미래 생활경제상담센터 ‘푸른살림’에서 참경제교육과 생활경제상담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태그:#고쳐쓰기, #수리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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