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9년 돌만이와 길동이.
 2009년 돌만이와 길동이.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나: "오늘 강아지 미용 예약하려는 데요."
강아지 미용실 직원: "아 네~ 2시에 시간이 비었네요. 강아지들 이름이 뭐죠?"
나: "돌만이와 길동이요."
강아지 미용실 직원: "아 네~(풋)"

내가 강아지들 이름을 말할 때 웃지 않는 사람이 없다. 강아지들의 이름을 붙일 때 대부분 자기 취향에 따라 만드는데 내 경우 토속적이고 구수한 한국적인 이름이 좋았다. 똘마니를 조금 더 부드럽게 발음할 수 있는 '돌만이'와 길에서 온 유기견 출신이라 이름 붙여진 '길동이'는 개이지만 실질적인 나의 가족 구성원이다.

지난 6월에 돌만이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남은 유일한 가족은 길동이인 셈. 물론 혈연에 기초한 가족도 있다. 그러나 성인이고 이미 독립해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고 내 이름으로 계약한 집에 매일매일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는 생명체는 개이니, 지금 길동이는 내 가족과 다름없다.

내 유일한 가족은 반려동물 '길동이'

인간과 함께 생활하며 인간과 정서적 정을 주고받는 동물이라는 의미의 '반려동물'. 1983년 10월 동물 행동학자로 노벨상 수상자인 K.로렌츠의 80세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가 주최한 자리에서 개·고양이·새 등 애완동물의 가치성을 재인식해 반려동물로 부르도록 제안한 것이 시작이다.

동물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만 본다면 개처럼 비경제적인 동물이 없다. 나를 위해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닐 뿐 더러 개 때문에 초래된 불편으로 치면 그야말로 할 말 많아지기 때문이다. 혼자 살기 때문에 사실상 큰 집이 필요없지만 집을 고를 때 공간이 넓은 곳을 찾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개 때문이다.

개와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하는 주인을 만날까 미리 정보를 알아보게 되고 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집주인과는 계약자체를 꺼리게 된다. 개를 키우지 못할 법적 권리는 집주인에게 없지만, 살면서 이런저런 갈등을 겪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겪는 갈등이나 고통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어떤 일이 발생해 나와 길동이가 헤어지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거다.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길동이가 먼저 세상을 뜰 것이고 내게는 '우리는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혹시라도 길을 잃거나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될 때 길동이가 받을 충격과 낯선 환경에서 겪게 될 공포감이 싫다.

침대를 다 차지하고 누운 개들. 반려동물과의 삶에는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침대를 다 차지하고 누운 개들. 반려동물과의 삶에는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반려동물과 살다 보면 일정한 나만의 스토리가 생긴다. 길동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함께 산책다니는 골목길, 산책 때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 나눈 이야기 등. 길동이의 다양한 표정과 반응이 기억 속에 남게 된다. 아마 반려동물과 살다 헤어지게 되면 그 추억이 내내 마음속에서 일어나 괴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추억이 있는 장소에 지금은 그 동물이 없다는 사실. 나와 비슷한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새로운 대화의 창이 열린다. "이럴 때 이런 행동을 해요"라고 이야기하면 터져  나오는 환성. "아아, 맞아요. 우리 애도 그래요"라는 화답이 이어진다.

만약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서로 자기 자식자랑하느라 여념없는 주책바가지 아줌마로 보일 것이다. 자식자랑하면 팔불출이라던데 누가 팔불출이라고 하든 말든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지는데 어쩌랴.

몇 시간이고 몇 날 며칠이고 우리는 모였다 하면 각자의 개들 이야기로 시간을 온통 다 보내게 된다. 이쯤 되면 일종의 오타쿠인데, 일반적 오타쿠와는 조금 다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은 즐거운 취미생활이 아니라 깊은 책임감과 눈물로 점철된 생활의 연속이니 말이다. 내가 만나고 정을 주고받고 함께 살았던 개를 떠올리면 기쁨보다는 눈물부터 나온다. 추억은 모두 눈물범벅이다.

개 때문에 대출받은 삼천만 원

사실 개와 함께 산 것은 돌만이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0년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있었는데 당시 나는 군관사에 살고 있었다. 내가 개 한 마리 데리고 산책다니는 것을 본 이웃들이 하나 둘 개를 키우기 시작했고 개를 키우는 집들이 늘어나자 어느 날 개를 치우라는 상부 지시가 내려졌다. 나는 상부 지시의 위법성을 따지기 위해 변호사상담도 받았는데,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서로 무릎에 올려달라고 졸라 결국 두 마리를 다 무릎에 올려야 하는 상황.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도 어쩔 수 없다.
 서로 무릎에 올려달라고 졸라 결국 두 마리를 다 무릎에 올려야 하는 상황.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도 어쩔 수 없다.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사실 군은 상명하복의 원칙이 가장 확고한 집단이 아닌가. 결국 개를 어디로 보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그 개와 살기 위해 대출받은 돈은 총 삼천만 원. 결국 관사를 떠나 전세를 얻었다.(2000년 집을 얻어 함께 살게 된 요크셔테리어 달구는 2002년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에게 그 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의미였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자식과 가족 간의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겠는가. 그냥 함께 있고 싶고 정을 나누고 싶은 거다. 극한의 상황에 도달하더라도 사랑하는 내 가족은 버리고 싶지 않은 거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고, 상처주고 싶지 않고 아낌없이 주고 싶은 거다. 사랑에 이유가 있을까.  

사람에게나 쓰는 아이라는 표현을 쓰고 나를 스스로 길동이 엄마라고 칭하고 '개효도' 한다는 핀잔에 부모님에게 한없는 미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길동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우리 부모님과 가족들을 덜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종류가 다른 것이고 오히려 우리 부모님이 내게 주신 무한한 사랑이 다시 길동이를 향해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항상 약자를 먼저 생각하고 배우고 공부한 것을 사회를 위해 쓰라는 가르침은 우리 부모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개 한 마리를 호사시키며 내 사랑이 낭비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나눈다고 몫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확장되고 커지는 것이 아닐까. 부모님이 주신 사랑이 길동이에게로, 그리고 세상의 많은 약자와 동물들에게로 확장되고 퍼져나가는 가슴 뛰는 경험.

내가 이런 길을 가게 된 데에는 사람에게 받은 사랑이 큰 몫을 했다. 인간보다 동물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와 아무런 연고도 없고 유전자가 같은 것도 아닌 동물에게 보내는 우리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한가.

마지막 가는 길, 내 품에서 지켜주고 싶다

혼자 남은 길동이.
 혼자 남은 길동이.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사람들은 내가 개를 너무 좋아해서 많은 개들과 함께 살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해이다. 늘 생각한다. 나에게 개는 길동이가 마지막이고 다시는 개와 정을 주고받지 않겠다고.

사랑에는 너무 많은 책임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개는 인간보다 수명이 짧다. 그래도 개들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니 내가 가져야 할 마지막 책임감은 마지막을 편안하게 지켜주겠다는 약속이다. 절대로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고 마지막 가는 길은 내 품안에서 지켜주겠다는 결심이다. 그러나 누군들 십여 년을 함께 산 존재를 보내는 일을 달갑게 할 수 있을까. 지속적으로 그런 일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거다.

간혹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혼자 살고 있다가 집에서 갑자기 죽게 되면 개가 굶어 죽게 될지 모르니 우리 집 키를 따고 들어와 문을 열고 내가 죽었는지 확인한 후 가족에게 연락해줘. 그리고 우리 개들이 낯선 주인에게 넘겨져 고생하고 공포에 떨며 살아갈 수 있으니 안락사해줘."

내 후배에겐 이미 우리집 키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혹 불의의 사고가 나서 내가 세상을 갑자기 뜨게 된다면 우리 길동이를 어떻게 할지도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 후배들에게 길동이라는 무거운 짐을 주고 싶지 않다. 내 개를 책임지라고 등 떠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길동이 안락사비용과 장례비용은 미리 통장에 넣어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책임감 그리고 미래의 준비,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을 위해 준비해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길동이가 개라서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때, 바로 그 장소에서 나타났고 내 곁에 와 함께 살게 됐기 때문에 같이 하는 것이다. 5년 전 큰 대로변을 질주하며 교통사고를 당할뻔한 녀석을 구조한 것이 계기가 됐다. 반드시 거대하고 큰 기획에 따라 가족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우연히 함께 살게 되고, 그러다 감정이 깊어지고 사랑하게 되면 더 오래 있고 싶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거 아닌가.

큰 눈망울이 예쁘고, 부드럽고 하얀 털을 만지면 기분이 좋고, 집에 돌아오면 예외 없이 꼬리 치며 안기고, 내가 눕기만 하며 펄쩍 침대 위로 뛰어 올라와 내 등에 자기 등을 대고 자고 싶어 하고. 내가 이 방으로 가면 이 방으로, 저 방으로 가면 저 방으로, 나를 쫓아다니는 길동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고 나만 주목하는 존재. 이건 삶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경이로운 기적이다.

최근 들어 반려동물로 키우는 동물의 종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후 조건에 맞지 않고 사육환경이나 습성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동물을 함부로 가정에서 키웠다가 쉽게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버려진 반려동물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갈 수도 있다.

개를 버리면 눈에 잘 띄지만 뱀을 버리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제안에 주목해보자. 너무 당연한 상식이지만 감당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집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

아픈데도 치료받지 못하고 검은 비닐봉투안에 버려진 고양이. 안에는 신문지와 소세지 하나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아픈데도 치료받지 못하고 검은 비닐봉투안에 버려진 고양이. 안에는 신문지와 소세지 하나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 동물학대방지연합

관련사진보기


주인의 가난함에 건강검진도 못 받지만

길동이가 살아난 게 운이 좋았던 것이라면, 아쉬운 점은 주인이 너무 가난하다는 것. 이미 나이를 먹은 길동이는 아직 종합건강검진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이빨이 너무 좋지 않아 치료도 해야 하지만 사실 나도 건강검진도 못하고 스켈링도 못하고 있으니, 핑계라면 핑계일 거다. 가난하고 바쁜 주제에 개와 산다고 누군가 욕을 할지 모르나 그냥 현재 답이 이것밖에 없으니 그냥 최선을 다해 함께 살아가는 것뿐이다.

간혹 바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개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충고한다.

"그 개의 입장에서는 노숙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할 것이다. 그 개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도 명예도 아니다. 그냥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가족이니까."

마음과 의지와 사랑만 있으면 아무리 난관이 있어도 뚫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가치가 있다. 사랑과 가족 없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 삭막하고 혹독하지 않은가.  


태그:#반려동물, #유기동물, #동물사랑, #동물학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99,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동물을 위한 행동 Action for Animals(http://www.actionforanimals.or.kr)을 설립하였습니다. 동물을 위한 행동은 산업적으로 이용되는 감금된 동물(captive animals)의 복지를 위한 국내 최초의 전문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