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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비합리적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목표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그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2007년 대선에서 사람들이 이명박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이유는 하나였다.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 그 후보가 훌륭한 인품이나 도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믿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부도덕하지만 유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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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헛된 희망이었던가. 임기 다 끝난 지금까지도 날 부자로 만들어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7%성장'을 들고 나와, 5년 평균 성장률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최저치인 3.2%를 기록해서도 아니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가 2008년 이래 매년 하락해, 국가청렴도가 계속 뒷걸음질을 쳐서도 아니다.

'부도덕하지만 유능한 정권'에 기대 부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 부질 없는 희망이었다. '부도덕하지만 유능하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유능한 사람은 부도덕할 이유가 없다. 정당하게 승부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술수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헛된 욕망은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길 바랐다는 점이다. '우리' 아닌 '내'가, '행복'이 아닌 '부자'를 원했다는 사실 말이다. 오해 없길 바란다. 여기서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사회를 꿈꿔요' 식의 민망한 캠페인을 펼치려는 게 아니다. 한국사회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에 귀기울일 만큼 순박한 곳도 아니지 않은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듣기 좋은 말일지는 모르나, 객관적 사실로 보긴 어렵다. 아니면 우리가 모두 바보였단 말인가. 대체 왜 부자가 되길 바랐고, 왜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후보에게 표를 던졌던가. 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니었는가.

테드 강연중인 하버드 경영대의 마이클 노튼 교수
 테드 강연중인 하버드 경영대의 마이클 노튼 교수
ⓒ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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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려면 돈이 필요하다. 과학적 사실이 그렇다. 그럼 얼마나 있어야 할까. 프린스턴대학의 2010년 연구에 따르면, 가계 연소득 7만 5천불이 '행복 기준선'이 된다. 물론 이 수치는 상대적이다. 7만 5천불은 일인당 평균 소득이 5만 불에 가까운 미국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하버드 경영대의 마이클 노튼은 '행복 기준소득'을 5만불로 본다.

나라와 거주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 가계소득 5~7만 불은 입고, 먹고, 자는 기본적 삶이 해결되고, 가끔 여행과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이 수준까지는 소득 증가와 행복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발견된다. 5~7만불까지는 소득이 늘 수록 개인이 행복감을 느낄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다. 이해할 만하다. 기초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주리고 헐벗은 상태에서 행복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금액을 넘어서면 돈과 행복 사이의 상관관계는 사라지고 만다. 다시 말해 미 대륙에서 7만 5천불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최대치인 셈이다. 이 연구는 한국사회에 매우 중요한 정책적 시사점을 준다.

한국 가족의 의식주 해결 비용은 7만 5천불보다 낮겠지만, 그냥 미국 기준을 적용해 연가계소득 7500만원을 '행복기준선'으로 삼아 보자. 7500만원을 넘는 초과분 소득은 그 가족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잉여소득'이 된다. 반면에 '행복 기준선'에 미치지 못하는 만큼의 '미달소득'은 개인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잉여소득'의 일부를 세금으로 걷어 '미달소득'을 채워주면 사회전체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다.

'행복세'를 걷자

여기서 7500 만원의 소득은 과세를 위한 과학적인 기준점이 된다. 실제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여론조사에서, 다수의 응답자가 '4인 가족이 중산층으로 살려면 연소득 7000만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미국의 '행복 기준소득'을 한국 평균소득에 대입하면 3000 만원이 조금 넘는다. 이는 2011년 국내 평균 가구의 연평균 소득 4610만원에 못 미치는 금액으로, 이 '최저 행복 기준선' 이하는 보조가 필요한 가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과 한국은 소득, 물가, 소비성향의 차이가 있으므로, 한국적 상황에 맞는 '행복 기준소득'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행복세'를 부과하면 된다. 물론 '잉여소득'의 크기에 따라 차등 부과해야 할 것이다.

'왜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부자가 불행해져야 하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았는가. 부자가 불행하지 않은 한도에서 거둬 불행한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게다가 이 정책은 '부자가 불행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부자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내 개인적 주장이 아니라, 과학 학술지에 실린 연구결과가 그렇다.

노튼의 강연 '돈으로 행복을 사는 비결'의 토대가 된 2008년 <사이언스>논문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쓰면 행복해진다'
 노튼의 강연 '돈으로 행복을 사는 비결'의 토대가 된 2008년 <사이언스>논문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쓰면 행복해진다'
ⓒ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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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하버드 경영대 노튼 교수가 최근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지난 5월 '돈으로 행복을 사는 법'이라는 짧은 강연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것이다. 이 강연은 노튼이 공동저자로 참여했던 2008년 <사이언스> 논문을 토대로 한 것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니, 부자와 부자가 되길 소망하는 사람들은 귀가 솔깃해질 만 하다.

이 글은 돈을 갖고도 행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럼 과학의 힘을 빌어, 행복을 사는 비결을 알아보자. 돈 있고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개인적 소비'와 '사회적 소비'

먼저 연구자들은 다양한 소득수준과 소비성향을 지닌 632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얼마나 벌고 어떻게 쓰는지, 그리고 이런 소비행태가 개인의 행복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보기 위해서다. 여기서 연구자들은 소비를 두 가지로 나눴다. 첫 번째는 '개인적 소비'로, 청구서 비용을 내거나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회적 소비'로 남에게 줄 물건을 사거나 기부하는 것이다.

조사 결과는 아주 흥미로웠다. 타인을 위해 돈을 쓰는 '사회적 소비' 지출이 많은 사람들일 수록 행복감이 높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개인 소비'와 행복지수 사이에는 유의미한 상관 관계가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이 예비조사를 토대로 두 가지 실험을 한다. 하나는 보너스를 받은 직장인들이 어떻게 돈을 쓸 때 더 행복해지는지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짜돈이 생겼을 때 이것을 어떻게 쓰는 게 더 큰 행복해지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보너스의 경우도 '사회적 소비'에 지출한 사람들일 수록 행복감이 높았다. 보너스가 지급된 후 6-8주 후 지출 용도와 행복감을 측정한 결과, 남을 위해 돈을 쓴 사람일수록 행복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얼마나 받았는지' 보다 '어떻게 썼는지'가 행복감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돈의 소비와 행복감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도 살폈다. 사람들을 아침에 불러 행복지수를 측정한 뒤 돈을 나눠 주어 쓰게 한 후, 저녁에 다시 행복감을 측정한 것이다. 참여자들은 각각 20불 또는 50불이 든 돈봉투를 받았다. 그중 절반은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도록 했고, 나머지 절반은 남을 위해 쓰라는 지시가 주어졌다. 이 연구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돈의 액수와 상관 없이, 남을 위해 쓴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해 진 것이다.

이 연구는 한국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소득은 과거와 비할 수 없을만큼 늘었으나, 국민은 오히려 더 불행해진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갤럽은 1992년과 2010년 사이의 소득과 행복지수 변화 관계를 조사했다. 이 시기에 1인당 국민소득은 3배나 커졌으나,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오히려 10%나 줄었다. 같은 시기에 하루 평균 자살자는 9.9 명에서 42.6명으로 무려 4배 이상 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리석게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지도자를 고른 탓이다. 물론 대통령 한 명이 사회를 이 꼴로 만든 건 아니다. 그런 지도자를 스스로 택할 만큼 어리석은 탐욕이 낳은 총체적 결과다.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지도자를 원할 만큼 말이다. 우린 그러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집권 여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국민에게 자랑스레 내놓은 표어를 보라.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7월 10일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선출마 선언을 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7월 10일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선출마 선언을 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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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내내 추구해 온 '내 꿈'.

'부자'도 어리석은 마당에, 유권자들은 '우리' 대신 '나'를 부자로 만들어줄 지도자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원하고 있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어떨지 알기 위해 표어의 주인을 뽑을 필요는 없다. 지난 5년간 쭉 보아 온 나라니까.

우리는 이 사회에서 '우리 꿈'을 짓밟으며 '내 꿈'만을 꾸어 온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 자신만을 챙기고 자신만을 위해 돈을 쓰라고, 그게 정상이라고 믿어 온 결과 말이다. 한국사회는 '우리 꿈'을 말하는 건 '포퓰리즘'이고 '좌파'며, 무엇보다 정상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다. 정부가, 기업이, 학교가, 그리고 가정이 말이다.

그러나 앞의 연구가 보여주었듯, 한국은 남의 행복에서 행복을 얻는 존재다. 이 <사이언스> 연구의 '과학성'이 의심된다면, 아인슈타인에게도 물어보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은 다른 이의 미소와 안녕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타인이 지을 미소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본연의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래야만 나도 행복할 수 있다.


태그:#박근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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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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