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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사)생명의숲국민운동>은 7월부터 12월까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수상한 '한국의 아름다운 숲' 50곳 탐방에 나섭니다. 풍요로운 자연이 샘솟는 천년의 숲(오대산 국립공원), 한 여인의 마음이 담긴 여인의 숲(경북 포항), 조선시대 풍류가 담긴 명옥헌원림(전남 담양) 등 이름 또한 아름다운 숲들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우리가 지키고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의 가치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땅 곳곳에 살아 숨쉬는 생명의 숲이 지금, 당신 곁으로 갑니다. [편집자말]
초입에 있는 '여인의 숲' 기념비를 마주치고서야 알게 된 하송리 마을 속의 작은 숲
 초입에 있는 '여인의 숲' 기념비를 마주치고서야 알게 된 하송리 마을 속의 작은 숲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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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는 짧디 짧은 단어는 입으로 발음할 때부터 왠지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좋은 우리말 중 하나다. 글자의 모양새도 나무 지붕아래 그늘 시원한 우리 선조들의 쉼터 정자를 연상하게 한다. 게다가 숲이라는 한 글자 속엔 수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으니 자연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숲도 여러 종류가 있다. 바닷가의 해송숲, 건강에도 좋다는 삼림욕 숲, 산속의 원시림 같은 숲. 이번에 알게 돼 찾아간 '여인의 숲'은 이를테면 마을 숲이다. 무슨 연유로 '여인의 숲'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꼭 한번 가보고 싶게 한다. 게다가 2011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상까지 받은 숲이라니 더더욱 궁금하다.

'여인의 숲'이 있는 경북 포항시 송라면 하송리라는 작은 마을은 찾아가는 여정도 마음에 든다. 버스를 타고 앞발을 세운 큰 대게가 곳곳에 서 있는 동네 영덕 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포항을 향해 가는 송라면행 시외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버스는 풋풋한 영덕 동네의 풍경과 동네 하천을 보여주며 강구항을 지나 창 밖으로 펼쳐지는 푸르른 동해바다와 몇 개의 작은 모래해변을 지나 마침내 여인의 숲이 있는 마을로 데려다 준다.

주민들의 향수가 어려있는 마을 숲

고요한 여름 한 낮, 여행자를 아는 체 해주는 건 역시 동네 강아지다.
 고요한 여름 한 낮, 여행자를 아는 체 해주는 건 역시 동네 강아지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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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라면을 지나 하송리를 향해 가는 길은 다른 작은 마을과 다를 게 없다. 시골 여느 마을들처럼 논 위의 초록 벼들이 뜨거운 여름 햇살을 자양분 삼아 쑥쑥 자라고 있고, 동네 집집마다 걸려 있는 이불과 빨래들은 햇볕을 한껏 쬐고 있다. 문 열린 마당에 있던 귀여운 개들이 여행자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마음에 꼬리를 치면서도 외지인을 경계해야 할 임무도 있는탓에 짖어 대기도 하면서 아주 바쁘다.

하송리에서도 따로 '여인의 숲' 표지판이 있는 게 아니어서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른다. 그러다 질문을 바꿔 이 동네에 오래된 마을 숲이 어디있느냐 여쭤보니 그제서야 "아~ 거기!" 하시며 다들 잘 알려주신다. 45세 이상의 동네 주민들이라면 지금도 이 숲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단오절날 그네타기 대회가 열렸고, 소풍을 간다 하면 주로 이 숲을 찾아갔었다고.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여인의 숲' 들머리길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여인의 숲' 들머리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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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사람과 가축과 마을을 살리다

주민들이 알려준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이렇다 할 숲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띈 것이 '여인의 숲'이라고 새겨져 있는 기념비석.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숲에 들어선 것이다. '여인의 숲'이라 해서 뭔가 시각적으로 거창하고 이름처럼 색다른 숲을 상상했는데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굳이 이름에서 연상한다면 조용하고 참한 여인 같다고나 할까.

이 숲은 이곳에서 큰 주막을 경영해 자수성가한 김설보 여사(1841~1900)가 마을을 위해 거금을 희사해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조선조 중기 대홍수가 났을 때는 볏단이며 가구며 가축들은 물론 사람까지 급류에 떠내려가다가 이 숲에 걸려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된 후로 식생이수(食生而籔)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들만 있을 줄 알았던 '여인의숲'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들만 있을 줄 알았던 '여인의숲'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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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숲'이 자리가 좋긴 좋은지 별장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다.
 '여인의 숲'이 자리가 좋긴 좋은지 별장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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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단오 때 이 숲에서 그네뛰기와 씨름대회가 열렸으며 어른들을 따라나온 아이들이 길을 잃을 정도로 숲의 규모도 거대했으나 지금은 주택과 별장, 논이 숲 가운데를 파고들어 많이 줄어들었다. 숲도 국운을 따라가는지 일제 강점기에는 총대와 총의 개머리판을 만들기 위해 느티나무 대부분을 베어 버려 당시 마을 사람들이 상수리나무를 심어 숲을 다시 살렸다고 한다. 

그 후 한국전쟁과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숲의 수난이 심화되었고 결국 지금의 허리가 잘린 두 동강 난 숲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자연보호단체인 노거수회에서 숲을 살리고자 2003년 '여인의 숲'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보존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현재 3만 평방미터(9천 평)의 숲 면적에 상수리 나무 등 14종, 400여 그루의 나무가 어우러져 아담한 숲을 이루게 됐다. 지역 사회의 이런 노력으로 결국 2011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상까지 받게 됐다고.

시원하게 개량 한복을 입고 나타나신 기청산 식물원 강기호 소장님께 들은 여인의 숲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들이다. 포항 지역은 포스코를 위시한 기타 산업시설들이 대부분인 줄 알았는데 숲과 자연을 사랑하는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포항의 많은 숲들들이 복원되고 발굴되어 다시 살아나고 있다니 반갑다. '여인의 숲' 이외에도 덕동 숲, 청하중학교 옆 관덕관송정, 동해안 최남단의 해당화 군락지 등이 그런 곳들이다.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동네 아저씨들 모습이 정겹다.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동네 아저씨들 모습이 정겹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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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에 매일 나와 운동을 하신다는 동네 할아버지가 힘자랑을 하신다.
 이 숲에 매일 나와 운동을 하신다는 동네 할아버지가 힘자랑을 하신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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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숨겨진 역사를 알게 되니 식물원 소장님 말씀대로 정말 숲이 달리 보인다. 드넓었던 숲의 허리를 끊은 논과 가축우리, 주택들. 특히 몇몇 별장들의 마당 안에 사는 크고 오래된 나무들은 위치와 모양새로 보아 집이 있기 전부터 자라던 것이란 게 생생하게 드러난다. 집을 지을 때 먼저 살고 있던 오래된 나무들을 베어 버리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할 정도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주민들, 막걸리와 안줏거리를 들고 나와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한담을 나누다 내게도 과일을 쥐여주는 아저씨들, 동네 골목에서 만났던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나와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들. 마을 숲다운 정다운 풍경들이다.     

고마운 숲, 더 고마운 주막집 아줌마

후손들이 김설보 여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워놓은 비석이 한 쪽에 보인다.
 후손들이 김설보 여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워놓은 비석이 한 쪽에 보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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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상수리나무를 쳐다보고 있자니, 동네 할아버지가 알려준 상수리나무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수라상에 올라간 나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떠나 어느 마을에 머무른 임금에게 올린 도토리 열매가 이 상수리나무에서 나와 그렇게 이름을 지었단다. 같은 참나무과의 가족으로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이 있는데 상수리나무에서 나는 도토리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늘을 따라 여인의 숲을 천천히 걷다가 수풀이 무성한 곳에 문득 눈길이 머물렀다. 나무들 밑에 철제 펜스에 둘러쳐진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다. 주변에 무덤도 없는데 웬 비석일까 궁금해 다가가 보니 기청산 식물원 소장님이 말해준 여인을 기리는 송덕비가 아닌가.

광무년 (대한제국 시대)에 만든 비석으로 아쉽게도 여인의 이름이 아닌 윤씨 남자의 처라고 나온다.
 광무년 (대한제국 시대)에 만든 비석으로 아쉽게도 여인의 이름이 아닌 윤씨 남자의 처라고 나온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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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광무 (1890년대 대한제국 시대)'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에는 아쉽게도 '김설보'라는 여인의 이름은 안 나온다. 대신 남편인 '윤기석 공의 처'라고 한자로 써 있다. 펜스는 비석을 보호하고자 포항시에서 만들어 놓았다는데 이런 의미있는 비석을 너무 허술하게 방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좀 무거웠다.
 
장 지오노 (Jean Giono)의 단편소설 <나무를 심는 사람>엔 주인공 혼자 평생 노력하여 황무지를 숲으로 바꾼 기적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를 심는 사람 그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데 작가의 소설이 아닌 실제 주막 아줌마가 이루어낸 실화가 우리 옆에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초라하고 작은 비석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있자니 잔잔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은 채 순수하게 자연을 아끼고 공공의 선을 실천한 사람의 착한 마음씨와 뜻이 숲에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는 전국의 아름다운 숲을 찾아내고 그 숲의 가치를 시민들과 공유하여 숲과 자연, 생명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한 대회로 (사)생명의숲국민운동, 유한킴벌리(주), 산림청이 함께 주최한다. 생명의숲 홈페이지 : beautiful.forest.or.kr | 블로그 : forestforlife.tistory.com



태그:#여인의 숲, #마을숲, #포항시 송라면 하송리, #노거수회 , #기청산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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