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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and Z. 나는 이제 ABC를 알아요. 다음 번엔 같이 노래 부르지 않을래요?"

대한뉴스, 미군선전영화, 공보처 기록영상 등을 재구성해 완성한 다큐멘터리 <미국의 바람과 불> 포스터
 대한뉴스, 미군선전영화, 공보처 기록영상 등을 재구성해 완성한 다큐멘터리 <미국의 바람과 불>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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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이 영어로 부르는 'ABCD송'이 반복해서 스크린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흑백화면 속 한국사회는 미군정의 주도하에 착착 재편됩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던 화면은 제주 4·3항쟁 당시 상의가 벗겨진 채 숨진 여인의 주검과 화염에 휩싸인 산간마을과 군경을 오래도록 포착합니다.

'대한뉴스' 등 기록영상물을 재편집해 완성한 다큐멘터리의 도입부 장면 중 일부입니다. 영화는 1945년 전후부터 영어 광풍이 휩쓸고 있는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얼굴을 조명합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믿음은, 마치 기독교와도 같았다'는 시놉시스처럼, 항상 성조기가 겹쳐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내레이션이나 자막 등 감독의 의도를 배제한 이미지만으로도 영화의 질문은 끊이지 않습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미국과 하나님은 왜 동격이며, 우리는 현재 어디에 있고, 우리의 민낯은 어떤 모습인지…, 한미관계 60년을 되짚어 보게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탐구와 성찰의 텍스트로 손색이 없는 독창적 다큐멘터리 <미국의 바람과 불>(7월 26일 개봉)입니다.

수은불망..."은혜를 입었으면 잊지 말라"

영화는 비탄과 격정의 파노라마인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배경음악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들이 한반도를 폭격하는 기록필름으로 열고, 닫습니다. 헌데, 이 장면 낯설지 않습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걸작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군 헬기부대가 바그너의 '발퀴레 서곡'을 확성기로 틀어놓고 베트남 민간인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장면과 묘하게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6·25 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주관으로 평화염원 범국민한마당이 성대하게 열립니다. 미국 등 참전국에게 감사와 보은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장에서 3군 의장대가 행진을 준비하고, 영화는 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 행렬을 교차해서 보여줍니다.

6·25 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평화염원 범국민한마당에서 의장대 사열을 따라 활빈단 단원이 수은불망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양 손에 들고 있다.
 6·25 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평화염원 범국민한마당에서 의장대 사열을 따라 활빈단 단원이 수은불망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양 손에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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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눈길을 끄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마에 '활빈단'이라고 쓴 머리띠를 동여맨 남자가 행진하는 의장대를 배경으로 '9·15인천상륙작전 성공! 9·28수도탈환! 서울수복!'이라고 쓴 펼침막을 치켜들고 있습니다. 그가 든 펼침막에는 세로로 수은불망(受恩不忘) 4자가 박혀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잊지 말라"는 뜻의 사자성어는 60년의 세월 속에서도 빛이 바라지 않습니다.

그 '수은불망'은 2003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열린 3·1절 84주년기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금식기도회에서 이미 절정을 이룬바 있습니다. 한기총 소속 목사는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구원하소서'라며 20만 성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절규합니다. 

"미군이 떠나가면 나라가 불행하고, 미군이 떠나가면 경제가 흔들리고, 미군이 떠나가면 사회가 혼란이 오고, 국가의 신용과 위신이 추락합니다. 우리는 미군의 철수를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 우리는 우방 미국과 함께 살기를 원하옵니다. 아멘."

신이시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영화의 첫 번째 화두는 '미국'입니다. 다소 모호한 제목 <미국의 바람과 불>은 영어 제목 'An Escalator in World Order(세계 질서의 에스컬레이터)'를 보면 뜻이 명확해집니다.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 걸린다'는 말처럼, 초국적 지배자인 미국이 어떻게 한국을 '관리'해 왔고, 한국 정부들은 어떻게 '눈도장 찍기'에 여념이 없었는지를 영화는 시대를 넘나드는 기록필름을 통해 고찰합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취임과 동시에 미국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방미해 정상회담을 갖고, 미 의회에서 연설합니다. 김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영화 속 대통령들의 바람은 하나같이 똑같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버리지 않기를 소망하고, 미국은 허락합니다. 이후 그들은 감사와 보은의 길을 걷고, 미국은 화답합니다.

1981년 방미한 전두환이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당시 신군부는 방미를 위해 총력전을 펼쳤으며, 미국은 달랑 편지 한통을 보내 허락한다.
 1981년 방미한 전두환이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당시 신군부는 방미를 위해 총력전을 펼쳤으며, 미국은 달랑 편지 한통을 보내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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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방미를 전후로 대한뉴스 등을 통해 미국의 첨단 미사일 등 무기개발이 쉼 없이 찬양되고, 도덕정치와 인권외교를 주창했던 카터는 긴급조치 9호가 횡행하던 시절 방한해 유신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중앙일보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대회를 미국 CBS 방송이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 한편 '뉴스위크'지가 전두환으로 도배되는 가운데 그는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이밖에도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습니다. 카터 부부 환영 축하무대에서 부채춤을 춘 무용단원과 어린이 합창단이 영어로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부르고,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카터 부부도 함께 따라 부르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는 장면은 지금 봐도 손발이 오글거리며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이렇게 영화는 기존의 기록영상물에 감독이 찍은 영상 등을 재구성하고 재배열해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파운드 푸티지' 방식으로 한미관계를 탐구합니다. 그렇게 탐구한 영화에는 절대적 우방도 절대적 적도 없다는 국제관계의 철칙은 보이질 않습니다. 심지어 국익이 최우선이라는 진리조차도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오직 자유 대한을 지켜준 혈맹이자 경제성장의 디딤돌인 '수호자 미국'만이 존재합니다.

미국·기독교·영어의 삼위일체로 만들어진 한국

6·25 전쟁 60년 평화기도회 준비위원회 주최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분단을 넘어 평화로’에서 부시가 간증하는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보인다. 이 행사는 당시 기독교내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25 전쟁 60년 평화기도회 준비위원회 주최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분단을 넘어 평화로’에서 부시가 간증하는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보인다. 이 행사는 당시 기독교내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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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두는 기독교입니다. 앞서 구국금식기도회에서 보듯 한국사회에서 미국은 종교적 신념과 동일시됩니다. 즉, 미국과 기독교는 동격이 됐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성령을 의미하는 '바람과 불'을 영화 제목으로 붙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김경만 감독은 2010년에 열린 6·25 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 '분단을 넘어 평화로'에 참석한 부시 전 대통령을 통해 '구세주 미국'을 목도합니다.

시종일관 한미우호동맹을 간증한 부시는 "하나님의 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국과 한국을 축복하시기를 항상 기도합니다!"라고 외치고, 10만 성도들은 연신 "아멘!"하며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열광적인 기도로 화답합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한반도 냉전을 조장하며,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평화와 통일의 전령사로 경배받는 순간입니다.

마지막 화두는 '영어'입니다. 2010년 포항공대 입학식에서 이 대학 총장은 '영어공용화'가 이루어진 캠퍼스에서, 영어로 학문에 매진하는 것이 글로벌리더의 자격요건이라며, 영어로 축사를 낭독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부모들을 위해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한글 자막을 올려 편의를 제공해 줍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참석한 영어마을 관악캠퍼스 개관식에서는 "영어마을에서 미국의 문화와 사회 특히 언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기 바란다"는 미국측 인사의 영상 메시지에 이어 유치원 아이들이 영어로 '아이 러브 아메리카' 등을 열창합니다. 그리고 영어마을에서 갖가지 '미국 체험'을 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행복한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채웁니다.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세계적 석학 노암 촘스키는 대담집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미국, 다국적 기업, 종교집단, 금융기관 등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세상을 지배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촘스키의 말을 영화에 대입한다면, 한국의 자화상은 미국과 기독교와 영어가 삼위일체가 되어 만들어진 셈입니다.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리던 영화 속 한국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생얼'이니까요.

한일군사정보협정은 '가치동맹' 구현을 위한 첫 단추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들이 한반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들이 한반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 시네마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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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는 흔히 '피로 맺어진 동맹' 혈맹관계라고 합니다. 영화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전후로 한 '혈맹의 역사'를 다양한 기록필름으로 서술합니다. 이후 한미관계는 안보동맹 즉,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중심축으로 전개됩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 들어 실용적 전략적 동맹으로서의 한미동맹은 사라지고, 만병통치약으로서의 한미동맹만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체결이 보류된 한일군사정보협정이 단적인 예입니다. 사실 이 협정은 완결판이 아닙니다. 대북억제의 한미동맹에서 북·중·러로 포위고립 전선을 확장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적 목표의 일환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에 한일동맹을 신설해 한미일 3각 동맹체제라는 강력하고 단일한 운용체계로 동북아를 설계하려는 미국의 오랜 꿈의 실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이 대통령과 미국의 꿈은 한미일 3각 동맹체제로 상징되는 군사안보에 머물지 않습니다. 양국은 2009년 핵우산의 안보동맹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를 포괄하는 한미동맹 미래비전을 채택한 바 있습니다. '공동의 가치와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한 포괄적 전략동맹', 즉 '가치동맹'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따라서 한일군사정보협정은 한미일 3각 동맹체제를 경유한 후 궁극적으로는 '가치동맹'을 구현하기 위한 첫 단추였던 셈입니다.

뼛속까지 친미·친일인 이 대통령에게 노무현의 동북아 균형론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지 임기 중에 '신냉전'의 화약고인 한미일 3각 동맹체제의 물꼬를 트겠다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미 폭격기의 폭격 장면에 이어 심해에서 발사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어디론가 향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주며, 처음이자 마지막 자막을 올립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였는가?'


태그:#미국의 바람과 불,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한미동맹, #한미일 3각 동맹체제, #가치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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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박호열의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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