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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나는 그냥 그런 회사를 다니면서 한문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매번 정치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굉장한 운동권이거나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월급받고 세금내는 그저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일뿐이었다. 2011년 2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어디로 여행을 갈까 생각을 하던 중 트위터상에서 계속 보였던 강정마을을 가기로 결정하고 올레길을 다녀보기로 하고 제주로 떠났다. 그 후 삶이 변하게 되었다.

강정마을에서 전경버스 앞에 앉아있다 연행이 되고 체포시간도 맞지않고 미란다원칙을 고지받지 못했지만 유치장에서 48시간을 보낸 이후 나는 공권력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 미란다원칙을 들은 적 없다는 내게 날인을 요구하며 고지했을거라고 강압적으로 나오던 형사와 내게 미안해하던 날 연행한 순경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체포시간도 안맞는 다며 사건자체가 성립이 되지않는다는 주장을 한 내게 형사는 순진한 얘기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런건 상관없다고 했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강정마을과 연대를 한 쌍용자동차분향소에 자주 들르게 되면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해고는 죽음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 솔직히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에 직장을 그만두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어려움도 없었다. 20년 가까이 근속하셨다는 분들에게도 어떻게 한 직장을 20여년을 다닐 수 있나 의아함도 있었다. 또 잔업, 특근 파업이 어떻게 가능한지와 2교대인 공장라인이 3교대가 되는 것도 어떻게 파업하는 협상조건이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나도 여성이기에 여성의 목소리가 잘 안들리는데에 궁금함을 멈출 수 없었다.

해서 내린 결론이 내가 공장에 취업해서 내 궁금증을 풀어내는 것이었다. 소위 먹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공장노동자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 공장 여성노동자의 삶이 어떤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기 위해 공장에 취업했다.

내가 취업하기 위한 공장의 조건은 세가지였다. 첫째, 여성노동자의 숫자가 전체 공장노동자의 숫자의 과반수가 될 것. 둘째, 2교대로 근무하는 곳일 것, 셋째, 목소리가 잘 들리지않는 식품관련 공장일 것.

그리고 나는 어묵, 맛살 공장에 들어갔다.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낸 곳은 대기업의 아웃소싱업체였다. 이력서와 등본, 보건증을 가지고 오라는 문자를 받고 찾아간 곳은 내가 다닐 공장의 앞 건물에 위치하고 있는 업체였다. 가자마자 근로계약서를 내밀었고 계약서를 읽어보니 집단행동시에 해고할 수 있다는 문구와 함께 형사처벌을 받을 시 해고가 가능하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첫번째로 내가 그동안 받았던 계약서와 다른 계약서였다. 산재관련한 부분 또한 만약 본인의 부주의일 경우 회사가 책임지지않는 다는 부분도 있었다.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것은 시급 5천원의 8시 30분-5시 30분까지 8시간동안 근무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공고에는 8시30분-20시30분 근무, 6일동안 만근 시에 일주일 주급으로 47만원을 수령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는데 계약서와 공고가 달랐다.

나는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공장의 면접을 봤고 7월 9일부터 출근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9일 공장으로 출근했다.


태그:#공장,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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