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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올림픽이 바로 저만치 다가왔다. 벌써부터 언론은 올림픽 열기를 전하기에 바쁘다. 올림픽이 다가오니 4년 전 개막식이 있던 바로 그 날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가슴이 아프다. 속전속결로 진행돼 온 '정연주 제거와 방송장악' 작전이 올림픽 개막일에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날 열린 KBS 이사회에서 정연주 해임 제청안이 통과됐고, 사흘 뒤 올림픽 개막식에서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은 해임 제청안에 서명함으로써 해임 작전을 종결시켰다. 그는 해임을 마무리 지으면서 "KBS가 거듭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올림픽 열기에 대한 아픈 추억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열렸던 2008년 8월 8일 저녁. 주경기장인 궈자티위창에서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며 밤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열렸던 2008년 8월 8일 저녁. 주경기장인 궈자티위창에서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며 밤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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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관심이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모였던 2008년 8월 8일, 공영방송 KBS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날 KBS는 본관 건물에 난입해 폭력을 행사한 수백 명의 사복경찰과, 한나라당이 추천한 KBS 이사 6인(유재천·권혁부·방석호·이춘호·박만·강성철)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이날 아침부터 KBS는 수천 명의 경찰과 1백여 대에 이르는 경찰 버스에 완전히 포위됐다. 그리고 나의 해임 제청을 결의할 예정인 KBS 이사회가 열리기 전, 무술로 단련된 300명이 넘는 사복 경찰이 KBS 건물 안으로 난입했다. 임시 이사회가 열리는 본관 3층으로 이르는 길은 차단됐고, 저항하는 KBS 직원들은 폭력에 제압당했다(당시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던 KBS 직원들은 바로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사원행동'을 만들었으며, 이 단체가 최근 95일 동안의 파업을 주도한 KBS 새노조의 바탕이 됐다).

이날의 KBS 임시 이사회는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됐다. 전날(2008년 8월 7일) 저녁, 유재천 이사장을 비롯한 한나라당 추천의 KBS 이사 6인은 호텔에서 따로 하루를 보내면서 나의 해임 제청안 통과 작전을 세웠고, 다음 날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임시 이사회에 함께 이동해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연주 제거를 위한 1박 2일'인 셈이다. 이 작전에는 KBS 이사회 사무국의 전문위원이 동행했다.

호텔서 1박 하며 함께 세운 '정연주 제거 작전'

2008년 8월 8일 오전 정연주 사장 해임을 위한 이사회가 열리는 여의도 KBS본관에 사복경찰 수백명이 노조원들을 밀어내며 투입되고 있다.
 2008년 8월 8일 오전 정연주 사장 해임을 위한 이사회가 열리는 여의도 KBS본관에 사복경찰 수백명이 노조원들을 밀어내며 투입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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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8월 8일 오전 임시 이사회가 열리기 전, KBS 본관에 경찰 병력을 불러들인 인물은 다름 아닌 당시 KBS 이사장이던 유재천 현 상지대 총장이었으며, 그 결정 과정에는 서울 영등포 경찰서 정보과장이 함께해 구체적인 방법까지 일러줬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내용은 내가 해임된 뒤 사흘 뒤인 2008년 8월 11일,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사원행동'이 출범하면서 밝혀졌다. '사원행동'이 당시 밝힌 내용은 2008년 8월 11일 'KBS 사원행동 특보 1호'에 자세히 나와 있다.

8월 8일은 우리 KBS에 최대 치욕일이다. 본관 3층 이사회장 앞으로 개떼처럼 밀고 들어온 사복경찰들의 모습은 90년에도, 독재치하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살풍경이었다. 그들은 공영방송을 지키고자 모인 직원들을 때렸고, 밀어뜨렸고, 갈비뼈에 금가게 만들었고, 짓이겼다. 목놓아 물러가라를 외치고 울부짖었지만 우리들은 밀렸고 패배했다.

그러나 우리는 8월 8일을 이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사복경찰들을 KBS로 밀어 넣은 자, 그리고 이들을 KBS로 불러들인 자는 반드시 KBS와 언론계에서 축출해야 한다.

2008년 8월 8일 오전 정연주 사장 해임을 위한 KBS이사회가 열리는 여의도 KBS본관에 경찰 수백명이 투입된 가운데, 이사회 개최와 공권력투입에 항의하던 직원들이 본관 3층 이사회실앞에서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2008년 8월 8일 오전 정연주 사장 해임을 위한 KBS이사회가 열리는 여의도 KBS본관에 경찰 수백명이 투입된 가운데, 이사회 개최와 공권력투입에 항의하던 직원들이 본관 3층 이사회실앞에서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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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폭거의 중심에는 KBS 이사장 유재천이 있었다. 8월 7일 유재천 이사장과 한나라당 추천 이사 5인은 매리어트 호텔에서 합숙하며 공권력 투입을 비롯한 이사회 폭거를 기획했다. 8월 8일 당일 아침 이사회 회의실에는 처음부터 영등포 경찰서 정보과장 제00이 함께 있었으며, 9시 50분경 유 이사장은 정보과장에게 직접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정보과장이 공식요청을 요구하자, 유 이사장은 잠시 후 영등포 경찰서장과 (KBS) 안전관리 팀장을 직접 회의장에 불러 구두로 경찰 투입을 지시했다.

8월 8일 폭거 과정에서 3층 문을 권력의 개들에게 열어주라고 대놓고 지시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권혁부 이사도 거론되고 있다. 또한 유재천, 권혁부 이외에도 전날 엠티까지 벌이며 이사회 폭거를 기획한 한나라당 추천 이사들 4명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 권력의 주구 6인방에 대해 우리 KBS 사원들은 끝까지 책임을 물 것이다. 우리는 KBS 최대 치욕의 역사를 이대로 놓아둘 수는 없다.

사복 경찰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보호하는 가운데 임시 이사회가 2008년 8월 8일 10시 8분, KBS 본관 3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임시 이사회 회의록을 보면, 당시 한나라당 추천 이사 6명은 먼저 회의실에 와 있었고, 뒤늦게 야당 추천 이사 4인(박동영·이기욱·남윤인순·이지영)이 회의실에 참석했다.

처음 공개되는 8월 8일 이사회 모습

유재천 KBS 전 이사장
 유재천 KBS 전 이사장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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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천 이사장(아래 이사장)이 말문을 열었다.

"네 분 이사님께서 이리 건너오시느라고 땀도 흘리시고, 아마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춘발 이사께서는 해외휴가 중이어서 오늘 이 자리에 불참하셨습니다. 그래서 열 분이 지금 참석하셨기 때문에 성원이 되었으므로 지금부터 제589차 임시 이사회를 개최하겠습니다.

(의사봉 타봉)

지금 우리 이사회를 하는 환경이 대단히 회의 진행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렵게 여기 회의장에 왔기 때문에 이사회를 계속 하겠습니다. 사실 지난 8월 5일 저녁에 감사원 감사처분 결과 통보를 받고 거기에 따라서 그 내용이 매우 중대한 사항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원래 8월 7일에 개최 예정이던 이사회를 부득이 관련 규정 등을 감안해서 오늘로 연기해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사님들의 많은 이해를 바랍니다."

(이후 이사회 사무국장의 경과 보고)

그러고 나서 KBS에 난입한 사복 경찰 문제가 야당 추천 이사들에게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사복 경찰까지 동원... 이런 상황은 치욕"

KBS본관에 진입해 들어온 사복경찰들이 KBS 본관 로비인 '민주광장'에 모여 앉아 있다.
▲ KBS 본관에 사복형사 투입 KBS본관에 진입해 들어온 사복경찰들이 KBS 본관 로비인 '민주광장'에 모여 앉아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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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인순 이사 : "지금 저희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간신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KBS에 와서 사복경찰까지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KBS 이사회장에 들어온 것을 굉장히 치욕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경위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동안 이사회장 밖에서 KBS 구성원들이 이러저러한 소란행위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복 경찰까지 요청한 것은 과연 어디에서 그런 요청을 한 것인지, 이런 상황에서 밖에서 이러고 우리가 사복경찰 보고 하에 이사회를 하는 것 자체가 정말 치욕스럽기 때문에 이사회를 과연 정상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사장 : "지금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KBS 사원들이 이사회장 진입을 강력하게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이사 개개인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너 밤길 조심하라' 이런 식의 협박 발언도 들렸고, 굉장히 이사들의 신분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청원경찰들이 이런 상황을 진압해주기를 바랐습니다만 인원 수도 부족해서 계속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고 또 이사들은 신변 위협을 받고 그래서 여러 차례 인내 끝에 도리 없이 경찰 병력을, 공권력을 요청했습니다. 경위가 그렇습니다."

이지영 이사 : "경찰 병력을 요청하신 주체가 누구인가요. 회사 측인가요, 아니면 이사장님이 요청하신 건가요?"

이사장 : "신변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지영 이사 : "그러니까 요청하신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지요."

이사장 : "여기 계시던 이사들(한나라당 이사들 지칭)의 동의를 받아서 제가 요청했습니다."

남윤인순 이사 : "그럼 나머지 이사들의 신변은 보호 안 받아도 되는 것인가요. 저희는 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요. 어떻게 하시자는 겁니까. 몇 분만 신변보호를 요청하시면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밖에서, 이러한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과연 이사회가 가능합니까."

이사장 : "그래서 네 분을 여기에 참석하시도록 또 조치하기 위해서..."

남윤인순 이사 : "네 사람(야당 추천 이사 지칭)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인지도 몰랐습니다, 저희는. 신변에 불안을 느끼시는 상황인지도 몰랐습니다, 저희는."

이사장 :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때 이기욱 이사가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해 'KBS 이사회가 사장을 징계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방송법에는 없다'며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사장 해임 제청안이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돼서는 안 될 사항'이라고 밝혔다. 이 발언이 끝나자 남윤인순 이사가 다시 사복 경찰 문제를 제기했다.)

"비정상인 상황... 이사회를 다음에 하면 되죠"

2008년 당시 KBS이사회에서 야당측 인사였던 남윤인순 이사.
 2008년 당시 KBS이사회에서 야당측 인사였던 남윤인순 이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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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인순 이사 : "이사장님. 제가 아까 질문을 하다 말았는데요. 물리력을 동원해서까지 오늘 긴급 이사회를 해야 됩니까. 도대체 그렇게 판단하신 근거가 뭡니까. 이렇게 비정상적인 이사회를 해도 되는 겁니까. KBS에 어떻게 공권력을, 사복경찰을 들어오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사장 :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남윤인순 이사 : "어떤 상황입니까. 지금 상황이요? 그렇게 긴급한 상황입니까.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사장 : "이사들의 신변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남윤인순 이사 : "무슨 신변의 위협을 어떻게 당했으며, 이사회를 안 하면 되죠. 다음으로 연기하면 되죠."

이날 이사회는 이처럼 사복 경찰이 KBS에 난입해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는 KBS 직원들을 폭력으로 제압한 삼엄한 분위기에서 열렸다. 남윤인순 이사는 "사복경찰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열리는 KBS 이사회는 치욕"이라고 했고, "이렇게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이사회를 진행하지 말고 다음으로 연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에 맞춰 진행된 '정연주 제거 뒤 방송 장악'이라는 정권의 주요 목표가 흔들릴 수는 없었다. '1박2일 작전'까지 실행하지 않았던가.

덧붙이는 글 | 최초로 공개하는 2008년 8월 8일 '이사회 회의록'은 다음 회에 계속 이어집니다.



태그:#정연주, #KBS, #올림픽 개막, #유재천, #KBS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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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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