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다보니 귀한 작가와 작품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벅찰 때도 있다.

글에 앞서 삶이 우선 감동인 권정생 선생님, 뭐 이렇게 솔직한 선생님이 있나 싶은 임길택 선생님, <엄마 마중>으로 알려진 이태준, 일제 강점기에 이토록 유쾌·상쾌·발랄한 동화를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현덕, 1980년대 말, 비밀스럽게 전해지다가 확 나타난 백석은 나는 시로 먼저 알았지만 요즘 젊은 엄마들은 북쪽 출신의 동화작가로 알고 있을 것 같다. 

감자는 줄기가 시들기를 기다려 캐는데, 마른 줄기마다 줄줄이 딸려 나오는 감자를 캐는 일은 그야말로 감동이고 재미다. 평생 농사꾼인 엄마는 그토록 오래 농사를 지었어도, 감자를 캘 때가 제일 신난나고 했다.

마른 줄기를 걷어내고 주먹 만한 감자를 수확하는 기쁨만큼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고 읽은 동화와 동시, 그림책은 육아의 노동을 수확의 기쁨으로 바꿔줬다.

어린이 문학은 그저 평범한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지난 10년 사이 참 많이 진화한 듯하다.

어린이 문학의 핵심, 바로 이겁니다

<감자를 먹으며> 앞표지
 <감자를 먹으며> 앞표지
ⓒ 낮은산

관련사진보기

이오덕 선생님은 '삶을 가꾸는 문학'을 어린이 문학의 핵심으로 꼽았다. 그의 글쓰기 교육 이론을 담은 책을 읽고, 어린이 문학론을 읽으면서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용어 자체가 유물이 된 것 같은 문학의 리얼리즘은 내가 처음 접한 문학이론이었다. 문학의 리얼리티가 어린이 문학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오덕 선생님의 <감자를 먹으며>는 내가 속한 독서 모임 1학기 마지막 책이었다.

감자는 안데스 산맥에서 출발해 유럽을 거쳐 중국을 지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때가 19세기 초다. 이오덕 선생님이 꿈꾸는 '고흐의 그림속 농사꾼이 사는 마을'은 가장 성실한 농부들이 사는 마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강원도가 감자 주생산지가 돼 '감자바우'라는 별칭을 얻었다. 내 고향이 선생님이 꿈꾼 마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머니가 고흐의 그림속 농사꾼이었음은 분명하다. 내 어머니는 감자를 유난히 아낀다. '6·25 난리통'에 감자는 생명의 끈이었다. 감자를 먹고 살아낼 수 있었다. 쌀을 대신했던 감자였다.

이오덕 선생님은 감자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 아이들 입맛에는 별 맛 없는 감자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뜻은 '할아버지 세계'를 유산처럼 물려주기 위해서다.

감자를 먹고 놀았던 어린시절

그래서 이 책 안에는 감자를 먹고 놀았던 어린시절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감자를 아는 어른들은 추억을 되살리고, 감자를 체험 학습을 통해 알게 된 아이들은 또 다른 놀이체험을 독서를 통해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나는 '나와 감자'를 생각했다. 선생님의 감자 이야기와 나의 감자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선생님이 겪은 감자 이야기는 모르는 일이 아니다. '젖가락에 끼워 먹던 감자'는 감자 속 열기 때문에 뜨거워진 젓가락의 뜨거움까지 되살릴 수 있다. 줄기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감자들처럼 기억의 겉흙을 걷어내자 말간 감자같은 추억들이 딸려 나왔다.     

30년 전 봄,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마당에서 감자 씨눈을 딴다. 감자 중에는 살이 튼 것처럼 온 몸이 갈라진 것들이 있다. 무더기 속에서 찾은 그 감자를 대화에서는 '물감자'라고 불렀다. 깎아서 먹을 수 있는데, 물 많은 생무 맛이 난다. 감자는 아린 맛 때문에 날로 먹을 수 없는데, 일 년에 한 번 이때만 먹을 수 있다. 물감자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감자 씨눈을 따는 엄마한테 나는 50원 만 달라고 했다. 없다고 하는 엄마와 없는 줄 알면서도 조르는 나는 벌써 두어 시간이나 그러고 있다. 해넘어 갈 때쯤 돌아온 아버지는 어린 나를 무릎 사이에 끼고 "왜 아 한테 돈을 안주냐"며 엄마를 혼낸다. "그녀러 지즈바가 돈이 없는데 달라고 한다"는 엄마 대꾸에 아버지가 다짜고짜 감자알만한 돌맹이를 엄마한테 던져버렸다. "아이고!" 엄마는 단 한마디 비명을 지르며 발목을 부여잡고 뜨락을 기어서 올랐다.

복숭아뼈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다. 높지 않은 뜨락을 한번에 못오르는 엄마를 어린 내가 보고 있다.

그 후 내가 엄마한테 다시는 돈 달라고 조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감자를 보거나 아들한테 과자를 사줄때 더러 그 장면이 생각난다.   

엄마가 부쳐주던 '감자적'

삶은 감자와 닮았다
 삶은 감자와 닮았다
ⓒ wikimedia commons

관련사진보기


팔순이 넘은 엄마는 "그게 니였나"라고 하신다. 자식이 팔남매가 되다 보니 더러 엄마의 기억이 바뀌기도 한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본 일이어서 나는 이때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장마철이 시작되면 더러 엄마가 농사일을 쉬는 날이 있다. 그런 날 오후에 엄마는 감자적(부침개라는 말이 있는 줄 안다. 요리 방법이 달라 부침개와 적이 구분되는데, 대화에서는 그냥 적이라고들 했다)을 부쳤다.

수확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하지 즈음에 아직 덜 큰 감자를 캐서 먹었다. 비를 맞고 캐온 감자를 씻어 숟가락으로 벅벅 긁으면 엄마가 분유통을 잘라 못으로 구멍을 내 만든 강판에 간다. 화로에 무쇠 솥뚜껑을 앉히고 들기름을 두르고 적을 부치는 사이, 내가 감자를 간다. 감자 가는 일이 서툰 나는 손가락이 갈리기도 하고 얼굴이나 무릎에는 흰 녹말가루가 말라 하얀 점이 뽀얗게 생기기도 했다.

먼저 부친 적을 엄마가 스테인레스 그릇에 담아주면 나는 우산을 쓰고 논으로 간다. 무릎 아래까지 자란 모가 비를 맞고 있는 논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감자적을 뜯어 논에 던지며 '고시레 고시레'한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속으로 빈다.

'올 농사 풍년되게 해주세요.'

엄마가 시켜서 한 일이지만, 누가 볼까봐 서둘러 고시레를 했다. '대지의 여신' 같이 멋진 신을 알지 못했던 터라 그저 어린 나는 논에다 대고, 비에다 대고 빌었다. 오랫동안 엄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신으로 믿으며 살았던 것 같다. 엄마의 다신이 유일신으로 바뀐 것은 아버지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고시레 의식을 내가 언제까지 했는지는 모르나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그만둔 것 같다.

우산을 써도 비를 맞기 마련이다. 젖은 머리를 대충 닦고 화로 옆에 앉아 고추를 잘게 다져 넣고 조선간장에 들기름과 고춧가루, 들깨가루를 넣고 만든 양념장에 감자적을 찍어먹었다. 배가 아프도록 먹었는데 엄마는 "감자는 아무리 먹어도 탈 안난다"며 자꾸자꾸 감자적을 부쳤다. 엄마는 적 부치던 손으로 젓가락 없이 손으로 뜯어 드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수제비 한그릇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식은 수제비다. 감자가 날 적에는 엄마는 자주 감자 옹시미를 만들었다. 감자를 갈아 베보자기에 힘껏 쥐어짜 건더기를 만든다. 감자 물을 가라앉혀 녹말가루를 건져 낸다. 녹말과 건더기를 섞어 반죽을 하고 한 입 크기로 옹시미(새알심)를 만든다. 끓는 물에 호박을 채썰어 넣고 간장 간을 한 다음 옹시미를 넣고 말갛게 익을 때까지 끓인다.

옹시미가 너무 뜨거워 나는 곧잘 입천장이 데었다. 아버지는 "어허, 어허"하시면서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며 한그릇을 금방 비웠다. 감자 옹시미 반죽을 쪄서 마늘과 고춧가루, 들기름을 듬뿍 넣고 무친 반찬도 아버지가 특별히 즐겼던 음식이다.

내가 만드는 옹시미는 쥐어짜는 힘이 모자라는지, 옹시미가 자꾸 퍼져서 국물이 걸죽해진다. 동동 뜨는 옹시미를 만들자면 아귀힘이 더 세야 한다.

친정 식구들은 떡을 유난히 좋아한다. 감자떡은 녹말 얻기가 어려워 귀한 떡이다. 캘 때 호미에 찍힌 감자, 작아서 상품 가치가 없는 감자, 썩거나 썩을 기미가 보이는 감자들을 모아 '도라무 통'(드럼통)이나 '고무 다라이'(고무 그릇)에 넣고 입구를 비닐로 꼭 싸맨 후 썩힌다. 그 냄새가 지독하게 나쁜데, 온 동네가 다 하는 거라 흉볼 일이 아니었다. 우리 집 마당 구석 '꼬야 나무'(오얏나무) 밑에도 두어 개씩 통마다 감자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걸 걸러서 녹말을 얻는다. 썩힌 것은 쓴 맛이 강해서 여러번 우려내야 한다. 하루에 두어 번 녹말가루를 씻어내는 일은 더러 학교 갔다 와서 내가 해야 했던 집안 일이다. 아까운 녹말가루 물에 흘려 보내지 말라고 엄마는 걱정을 했다. 그렇게 울궈 낸 녹말가루는 시멘트 종이에 널어 말린다. 햇콩을 넣고 막쪄낸 감자떡은 씨두룩(약간 쓴 맛)하면서도 쫄깃쫄깃하다. 많이 얻을 수 없는 감자 가루여서 떡도 귀했던 모양이다.   

요새 음식점에서 내놓는 감자떡은 투명하고 쫀득쫀득하다. 감자 맛이 전혀 안나서 속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중국산 녹말가루거나 고구마 전분이라는 말도 있다. 그래도 감자떡을 만나면 그저 반갑다.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해서였을까. 한겨울에 질이 좋은 얼음이 얼면 넘어져도 옷이 젖지 않는다. 그 매끈한 감촉이 좋아 일부러 드러누울 때도 있을 만큼 어릴적 겨울은 춥고 단조롭고 재미 있었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서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오면 화로 속에 묻어놓고 간 감자는 이미 오빠가 꺼내 먹었거나 언니가 먹어 치운 다음이다. 감자가 화로 속에서 익을 때면 '푸쉭 푸쉭' 껍질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그 바람에 재가 날리기도 하는데, 재를 뚫고 김이 오르면 먹을 때가 되어간다는 신호다.

달지도 않고 고소하지도 않은 그저 밍밍한 것이 감자 맛이다. 맛보다 냄새가 더 좋은 것이 감자다.

삶을, 감자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서울에서는 내 손으로 길러 먹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을 사먹어야 한다. 10년 살면서 그래도 사먹는 게 조금 쉬워졌는데, 감자를 사먹는 일은 적응이 안 된다. 몇 알씩 사먹는 감자는 도무지 성에 차지도 않거니와 감자를 사먹는 게 나쁜 일을 하는 것만 같다.

독서 모임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감자를 먹으며>를 읽고 난 뒤 우리끼리 뒷풀이 삼아 감자 음식을 하나씩 해오기로 했다. 나는 감자적을 부쳐가기로 했는데, 감자 몇알 든 봉다리를 사고 보니 감자 알은 우리 애 주먹보다도 작은 것 같다. 감자 한 개를 갈면 감자 적 하나를 부칠 만큼 컸던 감자였다. 열댓 개를 갈아 대여섯 장 부쳤는데, 크기는 그 옛날 엄마가 만든 감자적 반도 안된다.

이오덕의 <감자를 먹으며>는 읽고 나면 꼭 감자를 먹어야 할 것 같다. 그게 이 책의 힘이다. 그만큼 감자는 일상의 요리 재료이고 먹기 쉬운 음식이다. 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감자 같은 맛이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맛을 품은 감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삶을, 일상을, 감자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가 문제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서점 알라딘, 나의 서재 마이리뷰에 함께 올려져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책동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