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화벨이 울렸을 때 때마침 나는 백화점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곳은 세일 기간을 맞아 찾아온 인파로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옷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빚어낸 소음 탓이었을까. 전화를 걸어온 기자의 '청탁'이란 말을 '청첩'으로 잘못 알아듣고는 결혼 축하인사를 건네는 실수를 범하고 나서야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기자는 한참을 웃고는 7월 1일이 백석(1912~1996(?))의 탄생 100주년이라며 그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 시인의 이름이 또 그토록 낯설게 들릴 수 있을까. 통화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니 '백석'이라는 이름이 더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 도시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근대화의 상징'이라 일컬어지곤 했던 백화점에서 백석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다니! 전화를 받은 장소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김기림이나 이상에 관한 원고청탁이었으면 차라리 나앗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도회지에서 스스로 자꾸만 도망쳤던 백석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하늘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정주성' 부분

 

그러나 잠시 숨을 돌리고 나니 생각은 이내 달라졌다. 내가 백화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전화를 받은 것이 백석 운명과도 닮아 보였던 것이다. 백석은 1930년대 항용 '모더니즘'이라 칭해지는 문예사조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김기림이나 이상, 혹은 김광균과 달리 도시에서 스스로 자꾸만 도망쳐갔던 것이다. 비교 대상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김기림이 경성의 거리를 누비고 있었을 무렵 백석은 저 '정주성'으로 달려갔으리라.

 

백석이 세상에 처음 내놓은 시 '정주성'에는 그가 앞으로 선보일 시적 내용들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그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토의 공간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향했던 공간은 문자 그대로의 향토가 아니라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근대화에 의해 무너져가고 있던 전통사회였다. 그가 저 '정주성'이나 대표작 중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로 표상되는 공간으로 향했던 것은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차라리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

 

정주하지 못했던 '기행'의 삶과 문학

 

나는 백석이 걸어온 문학적 노정을 통틀어 운명이라 믿고 싶다. 운명이 아니라면 이렇게 험한 길을 선택할 이유가 달리 있었을까. 또 운명이 아니라면 분단 공간에서 백석 문학의 처지를 달리 위로하기 힘들어 보인다.

 

삼리(三理) 밖 강(江)쟁변엔 자갯돌에서

비멀이한 옷을 부숭부숭 말려입고 오는 길인데

산(山)모통고지 하나 도는 동안에 옷은 또 함북 젖었다

— '구장로-서행시초1' 부분

 

이는 백석이 언론사를 사직하고 만주의 신경(장춘)으로 홀로 떠났을 때 창작한 시편 중 하나다. 흔히 '북방시편'이라고도 불리는, 정확히는 '서행시초'라는 부제를 붙인 네 편의 연작시를 통해 그는 이방인의 고적감과 고향 상실을 그려냈다. 그가 왜 그곳으로 떠났던 것인지는 이제와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한 곳에 정주하지 못했던 그의 성격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히 삶의 터전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그는 부모의 강권에 의해 두 차례 결혼했지만 신부와는 함께 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내게는 백석의 본명 '기행(夔行)'이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문장이나 책'이란 뜻의 또 다른 '기행(紀行)'으로 읽힌다. 그의 이름이 뒤의 '기행'이란 의미처럼 운명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백석 문학의 처지는 너무 가혹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백석이 북에 남은 탓에 그의 시는 문학사에 등장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그의 시가 알려진 것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1988년 납북·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였다. 사실 우리는 백석의 생사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일찍이 숨진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서야 유족을 통해 그가 1996년 1월 사망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료 발굴은 환영, 그러나 섣부른 해석은 경계해야

 

오늘날에야 백석의 시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탓에 우리는 백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방금 말한 바와 같이 백석의 존재는 분단 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거의 공백으로 존재했었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삶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문학 텍스트의 확정에 관해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를 분단이 만들어낸 문학사적 비극이라 말해야 할까. 최근에는 백석이 북에 머물면서 1950~60년대에 쓴 시 3편과 산문 4편, 번역소설 2편 등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이를 토대로 최동호 이동순 김문수 교수 등은 '백석문학전집 1·2'(서정문학 펴냄) 펴내어 백석 문학의 정본화 작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성과는 크게 환영할 만하지만 그 작품들에 대한 섣부른 해석에는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시 '조국의 바다여'(1962.4.10.)가 발굴됨에 따라 1959년 숙청되었던 백석이 복권을 바라며 '붉은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려 쓴 시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이 전체 백석의 문학 세계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또 그러한 작품들이 실제 그의 사상과 얼마나 합치하는지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꿈꾸었던 공동체적 삶은 무엇이었을까?

 

이처럼 나는 한편으로는 최근 새롭게 발굴된 백석의 작품들을 둘러싼 해석들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공동체적 삶'을 지향했다는 학계의 주장에는 동의를 해두고 싶다.

 

백석이 기법적인 측면에서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향토의 내음을 담뿍 담아냈던 것은 그가 지향했던 '삶'과 무관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백석이 아동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를 해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백석은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여러 편의 시에서도 아동의 시선으로 시를 쓴 바 있다. 이것은 단순히 회고적 성격의 창작이 아니라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1956.5)를 비롯하여 아동문학에 바친 수편의 평론들에 담긴 내용들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평론들의 상당 부분이 북 체제를 옹호하는 데 할애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을 오롯이 '체제의 문학'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백석의 문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계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 머리를 모아야 할 것이다. 과연 백석이 꿈꾸었던 공동체적 삶은 무엇이었을까?


공동체의 삶 - 시대의 여러 문제

이재열 외 지음, 민음사(2016)


태그:#백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