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에서 고등교육은 취직을 위한 실용기술이 된 지 오래다. 사진은 한국 대학 교정에 붙어 있는 현수막.
 한국에서 고등교육은 취직을 위한 실용기술이 된 지 오래다. 사진은 한국 대학 교정에 붙어 있는 현수막.
ⓒ 강인규

관련사진보기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배출하는 대학'

몇년 전, 한 대학 정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쾌적하고 뛰어난 연구시설을 갖춘 국립대학으로, 학생들 수준도 높아 '명문대'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여기서 대개의 한국 언론은 '명문대' 앞에 '지방'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은, 그래야만 마음이 편한 편집증적 강박을 느낄 것이다. (이게 왜 한심한지는 이전 기사 "애플이 부러운가? 지방대란 말부터 없애라"에서 설명했다) 비록 동문은 아니지만, 나는 이 학교를 잘 알고 있었고, 그곳 학생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학술 모임을 위해 학교 진입로에 들어설 때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배출하는 대학'이라는 말이 마음에 가시처럼 걸리곤 했다. 대학의 목적은 기업에 인력을 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은 사적 이윤추구를 위해 존재하기에, 이들의 이해관계는 시민이나 국가의 이해관계와 일치할 수 없다.

하물며 기업에게 대학의 구조조정을 맡기거나 교육과정을 좌우하게 만드는 것은 사자 입에 머리를 넣는 것만큼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대학과 국가는 기업보다 오래 존속해야 하기에, 그들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된다.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기업의 수명은 매우 짧다. 게다가 기업은 한 사회의 교육을 이끌만큼 현명한 조직도 아니다.

취업률로 대학을 평가하는 기이한 나라

몇년 만에 앞의 대학을 찾았다. 정문 구조가 바뀌면서 그곳에 붙어 있던 글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메시지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친기업주의'는 오히려 강화된 형태로 교정 곳곳에 구현되어 있었다. 학생회관 옆에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편의점이 원색 간판을 자랑하고 있고, 교정을 수놓은 현수막과 게시판은 재학생들이 얼마나 쓸만하고 일 잘하는 사람인지를 고용주에게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극적인 사건은 따로 있었다. 이 학교가 정부에 의해 '구조개혁 중점추진 국립대'로 지정된 것이다.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율을 문제 삼아 이 학교를 '부실대'로 낙인 찍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지표를 적용한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기막힌 것은 이 학교가 같은 해 교과부로부터 '잘 가르치는 대학' 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잘 가르쳐도, 취업률이 낮으면 제대로 된 대학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그것도 국립대를, 기업의 '예비사원 연수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멀쩡한 나라 치고, 취업률을 잣대로 대학을 평가하는 나라는 없다. 학생 취업률로 '구조조정'이나 '퇴출'을 결정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유에스뉴스>나 <더 타임스>처럼 국내외 대학을 평가하는 민간기관에서조차 취업률은 아예 고려 대상도 아니다.

<더 타임스> 세계대학 순위 평가 항목. 강의, 연구, 논문 인용도 세 가지가 90%를 결정한다. 취업으로 대학 서열을 매기는 나라는 흔치 않다.
 <더 타임스> 세계대학 순위 평가 항목. 강의, 연구, 논문 인용도 세 가지가 90%를 결정한다. 취업으로 대학 서열을 매기는 나라는 흔치 않다.
ⓒ 더 타임스

관련사진보기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학 평가기관인 <유에스뉴스>는 합격율, 입학성적, 졸업률, 교수 학생 비율 등 오직 학문적 역량과 교육의 질만을 따진다. 매년 세계대학을 평가하는 '더 타임스 고등교육(The Times Higher Education)' 역시 강의, 연구, 논문 인용도를 학교 평가의 90%에 반영하고, 나머지를 10 퍼센트를 세계화 지수(7.5%)와 업계 연구비 지원(2.5%)에 할당한다.

한국 정부는 입만 열면 '글로벌 경쟁력'과 '세계 100대 대학'을 노래한다. 그러면서도 취업률을 이유로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인 '강의 잘 하는 학교'에 '부실' 딱지를 붙이고 있다. 연구중심 대학에 강의와 연구 대신 취업교육이나 시키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경쟁력을 스스로 차 버리는 꼴이다.

'기업 원하는 인재'는 '국가적 인재(人災)'다

대학을 기업의 인력풀로 만드는 건 그저 고등교육의 몰이해나 세금 낭비로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국민과 국가는 물론, 기업 자신까지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기업이 마냥 귀엽겠지만, 기업이 원하는대로 해주는 게 배려일 수는 없다. 고양이가 귀엽다고 음식을 원하는대로 퍼 주는 게 아끼는 게 아니듯 말이다.

고양이가 병든다고 주인의 직장이 날아가거나 국가 경제가 휘청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업은 다르다. 게다가 기업의 평균 수명은 고양이보다도 짧다. LG연구원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5월 말 기준 국내 기업의 평균 수명은 10.4세였다. 1965년 매출 순위 100대 기업 가운데 80%가 10년 내에 순위권 내에서 사라졌다. 이중 현재까지 100대 기업으로 남아 있는 기업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

한국 기업의 평균수명이 6년새 2.3세가 단축된 데서 알 수 있듯, 기업의 수명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다. 케네디와 무어 공저 <100년 기업의 조건>을 보면, 세계 기업의 평균 수명이 13년에 지나지 않으며, 30년 이내에 80%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기업의 수명이 더욱 짧아지는 추세다.

신자유주의와 시장방임주의가 힘을 얻는 가운데 기업이 오히려 단명하게 된 건 아이러니다. 이는 기업이 원하는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기업에게도 최선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란 단기간에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국민 개개인의 보람과 안녕, 그리고 국가의 미래와 무관할 뿐 아니라 도리어 역행하는 경우도 흔하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게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다.

'연구중심대학'과 '취업중심대학'

구글의 대표이사 회장 에릭 슈미트. 어느 나라든 '제2의 실리콘 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분방하고 창의적인 문화, 학구적 연구중심대학, 젊은이들을 유인할 수 있는 매력적인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구글의 대표이사 회장 에릭 슈미트. 어느 나라든 '제2의 실리콘 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분방하고 창의적인 문화, 학구적 연구중심대학, 젊은이들을 유인할 수 있는 매력적인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공개자료

관련사진보기

미국 시사지 <포린폴리시>는 구글의 대표이사 회장 에릭 슈미트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제2의 실리콘 밸리가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기술혁신의 상징이 된 미국 실리콘 밸리와 비숫한 창의적 공간이 다른 나라에도 생겨날 수 있는지 물은 것이다. 슈미트의 대답은 간단했다. 세 가지 조건이 있다면 어느 곳이든 가능하다는 것이다.
슈미트는 첫 번째로 '강한 연구중심 대학'을 꼽았다. 둘째는 해당 지역을 분방하고 창의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어야 하며, 세 번째로 그곳에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만한 다양한 요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첫 번째에서 중요한 것은 '연구중심 대학'이지 '취업중심 대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학이 기업을 이끌어야지, 기업이 대학을 이끌어서는 곤란하다.

한국 대학교육의 문제는 이 관계가 뒤집혀 있다는 점이고, 더 큰 문제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기업은 학교로부터 창의력을 수혈 받는 대상이어야지, 대학을 움직이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구조조정'이라는 기업논리로 학과를 축소하고 통폐합하는 것을 '선진화'라고 부르고 박수치는 나라에서는 희망을 찾기 어렵다.

교육은 창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학생을 길러내고, 이 학생들이 분방한 대학문화를 형성하며, 이런 대학들이 기업에 비판과 아이디어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은 정 반대로, 기업이 돈과 취업을 무기로 학교와 학생을 주무른다. 그래 놓고는 사원들을 모아 놓고 난데 없이 '혁신'을 주문하다가 '창의력 부족'을 이유로 해고통지서를 날린다. 물론 이 모든 절차는 '선진화'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한국처럼 교육이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를 차단하고 기업이 대학을 멋대로 주무르는 상황은 모두에게 재앙이다. 그 기업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식탐 많은 고양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동체 파괴범 양산하는 교육

흥미롭게도, 금융위기 이후 '인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뉴스위크>는 2010년 1월 존 미첨의 칼럼 "인문학을 옹호하며"을 실었다. <뉴스위크> 편집장 출신 존 미첨은 오바마 대통령과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부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혁신과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실리콘 밸리의 혁신과 창의성은 쾌적한 자연환경, 비판적 저항문화, 캘리포니아대학, 산호세주립대학, 스탠포드 등 연구중심 대학이 만들어 냈다. 사진은 60-70년대 학생운동으로 들끓었던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의 종탑. 학교 주변 곳곳에 히피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실리콘 밸리의 혁신과 창의성은 쾌적한 자연환경, 비판적 저항문화, 캘리포니아대학, 산호세주립대학, 스탠포드 등 연구중심 대학이 만들어 냈다. 사진은 60-70년대 학생운동으로 들끓었던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의 종탑. 학교 주변 곳곳에 히피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 강인규

관련사진보기


올 2월, <뉴욕타임스>는 프린스턴대에서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는 베디카 케마니의 글을 실었다. 자신이 학부를 마친 곳은 과학·공학을 특화한 학교였으나, 전교생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수업을 동시에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케마니는 자신이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며 역사, 경제학, 언어학, 철학, 작문 수업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는 이 특별한 경험이 자신의 삶을 바꿔 놓았다고 이야기하면서, '실용교육'에 매달리는 개발도상국들의 근시안적 사고를 지적한다.

'지식 노동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건 어느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편적 교양, 소통능력, 비판적 사고, 윤리적 판단을 가르치는 인문 교육과 기초 과학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응용지식과 기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보편적 교양을 쌓은 사람은 응용 지식과 기술도 쉽고 배울 수 있고, 그것을 바르고 효과적으로 쓸 수 있다.

손쉽게 배울 수 있는 실용기술로 대학 4년을 보내게 만드는 것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커다란 낭비다. 그건 필자가 교육자로서 절감한 사실이기도 하다. 지난달 공개된 미국 '밀레니얼 브랜딩' 보고서 역시 고용주들이 인문교육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25개 회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고용주의 30%가 말과 글쓰기에 능한 인문학과 기초분야 전공자를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공학·컴퓨터 전공자를 뽑겠다는 응답(34%)과 비슷한 수치였다. 금융·회계 전공자를 뽑겠다고 응답한 회사는 18%에 지나지 않았다.

소통능력, 비판적 사고, 윤리적 판단은 어떤 지식이나 기술보다 중요하다. 소통능력이 있어야 남과 공동체를 배려할 수 있고, 비판적이고 윤리적으로 사고해야 익힌 지식과 기술을 바르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통 능력 결여와 윤리적 사고의 부재가 한 사회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는 현 정부가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한국 교육은 공동체 파괴범을 양산하고 있다. 영리한 두뇌를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쓰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의대' 성추행 사건에서 보듯, 가해자들은 그 좋은 머리를 자신들의 죄를 무마하는 알리바이의 도구로 썼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 지식과 기술은 타인의 목에 들이대는 흉기일 뿐이다.

하버드 대학교 학부 웹사이트. '하버드대학 교육은 인문학 교육'이라는 글귀가 보이고, '직업적 유용성과 상관 없이 행하는 자유로운 지적 탐구'를 인문학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 학부 웹사이트. '하버드대학 교육은 인문학 교육'이라는 글귀가 보이고, '직업적 유용성과 상관 없이 행하는 자유로운 지적 탐구'를 인문학으로 규정하고 있다.
ⓒ 하버드대학교 홈페이지 캡처

관련사진보기



태그:#대학교육, #인문학, #세계대학, #글로벌인재, #경쟁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