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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가 응급치료를 받고 있는 병실
 윤씨가 응급치료를 받고 있는 병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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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LCD 천안 사업장에서 근무했던 윤아무개씨는 산소호흡기가 들썩일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병상 옆에서 어머니 신정옥(57)씨가 다니는 교회 관계자가 회복 기도문을 낭송했다. 가족들은 주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채 병실 안에 모여든 친지들의 모습을 보던 윤씨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냐"고 의아해 했다. 의사에게는 거듭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병실을 나온 신정옥씨는 "오늘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의 상태를 지켜본 의사 강아무개(가톨릭 성모병원 내과의)씨는 "폐출혈에 방광 내 출혈, 소화기 내 출혈까지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모 신아무개씨가 "폐를 씻어낼 수 없겠느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득보다 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강씨는 "최선을 다해 지혈과 수혈을 해보겠노라"고 말하고 치료실로 다시 들어갔다.

건강하던 딸, 입사 5개월 만에 '재생불량성빈혈' 판정

"어제 무슨 낌새를 차렸는지 카카오톡에 하얀 신발에 검은 옷 사진을 올렸더라고요. 당장 지우라고 했죠."

2일 강남 성모병원에서 만난 신정옥씨가 말했다. 삼성전자 LCD천안 사업장에 근무하던 윤씨는 1999년 11월 근무도중 급작스럽게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윤씨의 병에 대해 '재생불량성 빈혈 판정'을 내렸다. 질병과 함께 결국 그해 12월 윤씨는 삼성전자를 그만뒀다.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근무하던 중 윤씨와 같은 질병인 '재생불량성 빈혈'이 발병한 김지숙씨의 산재신청 최종의견 진술서에 따르면 윤씨가 앓고 있었던 '재생불량성 빈혈'은 인구 100만 명당 2~14명이 걸리는 희귀 질병이다. 가족력이나 직업력이 없는 이상 대부분이 후천적 요인에 발병하며 벤젠 등이 포함된 유기용제에 노출될 경우 발병가능성이 높다.

윤씨는 이후 13년간 수혈을 받으며 생활했다. 가정 사정으로 어머니 대신 이모가 윤씨를 챙겨 한 달에 한번 수혈을 받게 했다. 군산의료원과 서울 성모병원을 오가며 수혈치료를 받던 중 올해  5월들어 급작스레 상태가 악화되었다. 5월 10일경 강남성모병원에 급히 입원했지만 이미 양쪽 대퇴부의 고관절 괴사가 70%나 진행되었다. 신정옥씨는 "몸에 검붉은 반점이 생기고 눈가에 심한 멍이 들고, 하혈도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씨와 가족은 "(윤씨의) 질병이 삼성전자 LCD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신정옥씨는 딸의 질병에 대해 "삼성전자 입사당시만 해도 신체 건강하던 아이가 왜 그렇게 되었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반올림에 따르면 빈혈수치가 조금만 나와도 채용에 문제가 되는 곳이 삼성전자 LCD공장이었다. 신씨는 "힘겹게 병마와 싸우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골수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기초수급 생활자로 한 달에 50만 원이 채 안 되는 보조금이 유일한 수입인 신씨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0년 7월, 삼성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거나 투병중인 가족들과 노동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삼성LCD 탕정공장 앞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라며 시위하고 있다.
 2010년 7월, 삼성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거나 투병중인 가족들과 노동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삼성LCD 탕정공장 앞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라며 시위하고 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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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 가족과 반올림, '질병과 삼성전자 LCD 직무연관성' 의심

윤씨가 평소 삼성전자 LCD공장 근무경력과 자신의 병과의 상관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신정옥씨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삼성이라는 큰 회사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씨는 2년 전 주변 지인의 제보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무관련 질병에 대해 산재소송 등을 대리해온 '반올림'을 알게 되었다.

윤씨는 2010년 4월 진료를 받던 강남성모병원에서 반올림 활동가 이종란 노무사를 만났다. 그러나 이후 윤씨의 개인적 사정으로 만남은 끊겼다. 이종란 노무사는 당시 발랄해 보이던 그녀에게 "그렇게 아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윤씨 가족이 다시금 반올림에 연락을 해온 것은 올해 4월이었다. 신정옥씨는 4월 10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근무하던 김지숙씨가 삼성반도체를 상대로 제기했던 '산업재해 인정신청'을 고용노동부가 인정한 사건을 뉴스를 통해 접했다. 김지숙씨의 질병 역시 윤씨와 같은 '재생성불량 빈혈'이었다. 신씨에게 "우리도 산재신청을 하면 가능성이 있으려나"하고 윤씨가 물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왜 나를 삼성에 보냈냐"던 윤씨의 말이 못내 가슴에 걸렸던 신씨는 다시금 반올림 활동가 이종란 노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씨의 재해경위를 상담한 반올림 따르면 윤씨는 삼성전자 LCD반도체 천안공장에서 검은색 유리재질의 LCD 판넬을 자르는 일을 담당했다. 윤씨는 자신의 담당업무에 대해 "잘려진 판넬에 크랙(균열)이 있는지 육안검사를 하거나 완전히 잘리지 않은 판넬은 손으로 직접 조각내어 잘랐다"고 설명했다.

윤씨는 바로 앞 공정에서 LCD에 바르는 화학약품에서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앞공정과 윤씨가 담당한 스크럽 공정 사이에 칸막이는 되어 있지만 수시로 사람들이 들락거려 출입문은 열려 있었다. 면장갑을 낀 채 앞 공정에서 잘리지 않은 유리판넬을 자를 때면 "미세한 유리가루가 날렸다"고 윤씨는 말했다.  

반올림은 '윤씨에 대한 발병경위'라는 보도 자료에서 "LCD도 감광제 및 유기용제와 여러 화학물질을 사용하여 유리 기판을 가공하는 만큼 제작공정이 반도체 제작공정과 거의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반도체보다 제품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제품 1개당 화학물질 사용량은 더 많다"고 위험성을 지적했다.

반올림 활동가이자 의사(산업의학 전문의)인 공유정옥씨는 "재생불량성 빈혈은 전암성 질환(precancer)으로서 강도에 따라 (감광제 등에 포함된 포름알데히드 등) 위험물질에 짧은 노출에도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혈액암이다"라며 윤씨의 질병과 윤씨가 근무하던 삼성전자 LCD공정과의 직무연관성을 의심했다.

삼성전자·반도체 질병피해 제보자 중 56번째 죽음

윤씨의 사망소식에 병실로 들어가는 가족들
 윤씨의 사망소식에 병실로 들어가는 가족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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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밤 9시경 윤씨의 어머니가 병실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친지들에게 "얼마  남지 않았다"며 "(윤씨에게) 한 마디씩 하라"고 울먹였다. 간호사들이 윤씨의 병실을 분주하게 드나들었고 그 때마다 피 묻은 거즈를 한 움큼씩 들고 나왔다. 폐출혈이 멈추지 않아 코로 피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윤씨 옆에서 피를 닦아내던 이모는 간호사들을 향해 "숨을 안 쉬잖아! 내새끼"라고 울부짖었다. "○○야! ○○야! " 곁에서 하염없이 윤씨를 부르던 남자친구의 절규를 뒤로 하고 9시 56분, 윤씨는 결국 만 서른한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폐출혈'이었다.

"죽은 ○○의 한을 풀고 싶다"던 어머니 신정옥씨는 이종란 노무사와 함께 이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할 계획이다. 윤씨는 반올림에 삼성전자·반도체 질병피해를 제보해온 피해자들 중 지난 5월에 사망한 고 이윤정씨에 이어 56번째 사망자다. 올해 들어서만 고 김도은씨, 고 이윤정씨 등이 사망했다.

삼성전자는 "3월 21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국제산업보건위원회(ICOH)에서 인바이런사의 삼성전자 반도체 작업라인에 대한 조사 결과 이상없다고 검증받았다"며 삼성전자·반도체 근무관련 질병피해를 주장하는 피해자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삼성전자·반도체 질병피해를 의심해온 피해자들이 제기한 산재보상 행정소송 과정에 피고 측 보조 참가인으로 참여하여 정부에 "산재보상 불가"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올해 2월 삼성전자 건강연구소 부소장명의로 '반올림'에 "삼성퇴직직원들의 직업성 암에 관해 반올림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대화제의 메일을 보내온 만큼 이후 삼성측의 대응이 주목된다.


태그:#삼성전자,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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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자신을 지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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