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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엄마 하면 '눈물'이 떠오른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엄마의 눈은 언제나 틀어놓은 수도꼭지다. 기쁘다고 우시고, 좋다고 우시고, 고맙다고 우신다. 연속극 보시다 울고,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경례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도 우신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붙여준 엄마의 별명은 '눈물의 여왕'이다.

나는 나무그늘에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청명한 바람, 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이 전해지는 맛있는 공기까지 모든 것이 갖춰진 날, 초등학생이 된 뒤로 다섯 번째 맞는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교정엔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청군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우리 백군 이겨라" 외쳐대는 아이들의 목에는 굵은 핏줄이 두드러졌고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한 얼굴은 낮술로 달아오른 동네 할아버지들의 얼굴 같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햇볕을 피해서 나무 밑을 옮겨 다니며 구경을 했다. 가끔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을 하기도 했다. 남동생이 달리기를 할 때, 우리 반 아이들이 박을 향해서 오제미(콩주머니)를 던질 때였다.

점심시간이 지나 햇살 때문에 아이들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이면 나는 조금씩 지쳤다. 아득해지는 머릿속. 아이들의 웃음도, 함성도 자꾸만 아득해져서 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나는 흰색 티셔츠에 흰색 반바지, 흰색 운동화 차림이다. 달린다. 힘내라는 아이들의 응원소리를 들으며 나는 신이 나서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린다. 한참을 달리다가 다다른 골인지점. 허리를 감는 천의 달콤한 촉감을 느끼는 순간, 아니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심심하지?"

엄마는 삶은 계란과 아이스케이크를 나에게 내민다. 엄마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다.

"가게는?"
"응 아버지 계셔."

나는 애써 엄마 눈길을 피하며 아이스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학교 정문 맞은편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부모님은 운동회 날이 되면 정문 앞에 작은 좌판을 벌여놓고 삶은 계란, 아이스케이크, 과자, 음료수 등을 파셨다. 정신없이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면 엄마는 장사를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내게로 오셨다. 나무 밑에 앉아서 올려다본 검게 그을린 엄마 얼굴에 묻어있는 슬픔을 느꼈다. 나는 여동생이 달리기에서 2등을 해서 받아온 공책을 만지작거리며 아이스케이크와 삶은 계란을 열심히 먹었다.

초등학교 일 학년 처음 운동회가 열리던 날, 그때 나는 별로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픈 줄도 몰랐다. 단지, 왜 나는 달리기를 하면 안 되고 구경만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달리고 싶은데, 나도 달릴 수 있는데, 그런 심정이었다. 그냥 운동회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섭섭했다. 그날 나는 흰색, 청색 체육복을 입고 신 나게 떠들며 학교로 가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엄마 손을 잡고 학교로 갔었다.

"엄마 선생님이 나는 운동회 안 해도 된대. 그냥 나무그늘 밑에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된대."

나는 볼멘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내 손을 잡은 엄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내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점점 세게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조금씩 축축해지더니, 나중엔 끈적거렸다. 엄마 손에서 땀이 난 것인지 내 손에서 땀이 난 것인지 정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영진아, 여기 앉아서 구경하고 있어. 엄마 집에 갔다 올게. 다른 데 가지 말고."

엄마는 시상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운동장 구석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답 대신 엄마 얼굴을 보았다. 엄마 눈은 충혈되고 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집에서부터, 그리고 내 손을 잡고 학교로 오는 내내 조금씩 울었던 것 같았다.

"엄마 왜 울어?"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닦으며 집에서 가져온 돗자리를 깔았다. 난 슬프지 않았고 울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가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때는 그랬다.

삼 학년쯤 되자 나는 슬픔 같은 걸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나를 보며 눈물을 찍어내는 엄마를 보면 더 슬퍼졌던 거 같다. 운동회 날만 되면 엄마가 더 슬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인 거 같다.

내가 어른이 된 후 어느 날, 엄마는 말씀하셨다. 운동회날 나무 밑에 나를 앉혀놓고 집으로 가면서 돌아가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정말 많이 우셨다고 했다. 아이들과 같이 운동장에서 뛰지 못하는 내가 가엾어서 울고, 힘없이 앉아 있는 내 모습에 가슴이 저렸었다고. 그 얘기를 하면서 엄마는 또 우셨다.

연년생이던 동생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운동회 날, 엄마 손을 잡고 학교 가는 일은 없어졌다. 체육복 입은 동생들과 같이 학교에 갔다. 나는 여전히 나무 밑에 앉아서 구경만 해야 했고 그런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절대로 울지 않았다. 내가 슬퍼하는 것을 엄마가 눈치채실까 봐 슬퍼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화장실 가서 울었고, 수돗가에 가서 세수를 하면서 울었다.

나는 운동회를 못하는 게 슬프기도 했지만 나를 보며 우는 엄마를 보는 게 더 슬펐다. 점심시간 땀으로 범벅이 되어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있는 동생들을 보면서 엄마는 가끔 웃기도 했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엄마는 좌판을 열었고 바쁜 와중에도 나를 보면 항상 우셨다.

초등학교 내내 나는 운동회 때마다 나무그늘에 앉아서 달리는 아이들을 부러워했고, 엄마의 눈물을 보며 계란을 까먹었다. 지금도 운동회를 떠올리면 운동장에 펄럭이던 만국기보다, 나무그늘에 앉아 먹던 아이스케이크보다 엄마 눈에 가득했던 눈물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 엄마에게 보여준 백일장 대회 상장 위에 떨어졌던 엄마의 눈물방울. 그때 엄마의 눈물은 기쁨이었겠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이 들었다. 엄마의 눈물 속에 담긴 여러 의미를 알게 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애를 가진 딸을 보며 아픈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셨던 엄마. 칠순이 넘은 지금도 엄마의 눈물샘은 마르지 않는다. 지금도 엄마의 눈물을 보면 그 속에 담긴 한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프다.

엄마, 이제 활짝 웃으세요. '눈물의 여왕'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엄마 딸 잘살고 있잖아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어머니' 응모글"입니다.



태그:#어머니,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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