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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미국 뉴욕 플러싱의 한 사무실에서 열린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회' 모습.
 지난 19일 미국 뉴욕 플러싱의 한 사무실에서 열린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회' 모습.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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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의 암흑기였던 유신 독재 체제를 종식시키고 조국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의사 김재규 장군의 제32주기 추모제가 오는 5월 19일입니다."

최근 미국 뉴욕 한인 신문에 실린 광고의 한 대목이다. '김재규 의사 추모회 회장 폴 김'이라는 명의로 실린 이 광고에는 군복을 입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진과 '민주, 민권, 자유, 평등'이라는 그의 친필휘호가 실려 있다. 김 전 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 이전에 쓴 것이다. '35-50 157 St, Flushing, NY', 추모제가 열리는 장소다.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 밀집촌이다. 지난 19일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제' 현장을 방문했다.

'의사' 김재규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공통점은?

4~5평 남짓의 작은 사무실 안에 20여 개의 접이식 의자가 꽉 들어차 있다. 정면 벽에는 흰색 천 위에 검은색 글씨로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회'라고 쓰인 현수막이 내걸렸고, 향이 피워진 제단 위로 김재규 전 부장의 액자사진이 놓여 있다.

예정된 행사 시간을 넘겼지만, 의자에는 7~8명 정도만 앉아 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이태민(60) 목사는 "김재규 부장이 젊은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민주화를 이뤘다"며 "오늘 모임은 김재규 부장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빈자리를 둘러보며 "매년 20명 정도는 참석했는데, 오늘은 많이 못 온 것 같다"고 말했다.

폴 김 회장은 "노무현 대통령 3주기 추모식에 많이 가신 것 같다"며 "해마다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과 날짜가 겹쳐서, 여기 오고 싶은 분들이 많이 못 오신다"고 부연했다. 실제 추모제보다 한 시간 앞서 두 블록 떨어진 장소에서 '노무현 대통령 3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 추모식에는 60여 명의 한인들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의 '삶과 투신'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고, 영정에 헌화했다.

김 회장은 참석자들에게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제목의 책자와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를 나눠줬다. 책자는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명의로 발간된 자료모음집이었다. 비디오테이프는 지난 2004년 4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방영됐던 것이다.

지난 19일 미국 뉴욕 플러싱의 한 사무실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32번째 추모식이 열린 가운데, 책상 위에'김재규는 왜 쏘았는가'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가 놓여있다. 이는 지난 2004년 4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방영됐던 것이다.
 지난 19일 미국 뉴욕 플러싱의 한 사무실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32번째 추모식이 열린 가운데, 책상 위에'김재규는 왜 쏘았는가'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가 놓여있다. 이는 지난 2004년 4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방영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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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전 부장을 끝까지 변론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이 책자 발간사에 "김재규 장군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고 우리에게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회복을 시켜주었던 의인이었다"고 적었다. 함세웅 신부도 발간사를 썼다.

"우연한 일치일까? 1909년 10월 26일에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의 평화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이등방문을 사살했다. 그로부터 꼭 70년 뒤 같은 날에 김재규는 박정희를 제거했다. (중간생략) 이에 우리는 안중근 의사와 김재규 부장 두 분이 모두 목숨을 걸고 불의한 자를 제거했다는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고 연계해야 한다."

추모식 현수막에 적힌 '의사 김재규'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책자에는 또 김재규 전 부장의 최후진술과 항소이유서,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공동의장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등 사회 일각에서 일어난 그의 구명 운동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 회장의 제안으로 5분 정도 더 기다렸다가 행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 사이 김 전 부장의 셋째 여동생 단희(69)씨와 남편 오수춘(75)씨 등 가족이 추모식장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새 참석자들의 대화 주제는 선거 얘기로 흐르고 있었다.

이태민 목사는 '박근혜 대세론'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미쳤다"면서 "그러나 결국 (박근혜씨가)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 만큼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고 열변을 토했다. 지난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식에 참석했었다는 김세원(63)씨는 "김재규 부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배짱이 있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고 했다.

"박근혜가 떴는데, 협박 전화가 안 오네?"

'제32주기 김재규 의사 추모제'가 시작됐다. 국기에 대한 경례, 고인에 대한 묵념 등의 순서가 진행된 뒤, 이태선 목사의 추모 기도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이 김재규 장군의 뜻을 돌이켜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독재자의 딸이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머지않은 장래에 장군의 복권을 이뤄주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한국 젊은이들이 장군의 무덤가에 한 송이 아름다운 국화를 바칠 날이 오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어서 오수춘씨가 김 전 부장의 약력과 일화를 소개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김 전 부장의 신념을 설명했다. 추모사는 폴 김 회장이 나섰다. 그는 이날 추모식에 더 많은 참석자가 오지 못한 이유를 '박근혜 대세론'에서 찾았다.

"김재규 의사도 백이숙제처럼 지금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야 할 때이다. 오늘 왜 사람들이 (추모식에) 안 왔겠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박근혜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판국인데, 김재규 의사 추모회에 가면 찍히는 거다. 오늘 안 오신 분들은 그런 염려 때문에 안 오신 것이다. 지금까지는 추모회라고 했는데, 앞으로는 까만 넥타이 매고 오지 말자. 내년부터는 '김재규 의사 기념 사업회'라고 하자."

폴 김 회장은 지난 20년 동안 매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추모식을 개최해왔다.
 폴 김 회장은 지난 20년 동안 매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추모식을 개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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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폴 김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의 18년 장기집권보다 2년이나 더 긴 20년 동안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애초 1990년부터 추모회를 만들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아 못하고,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모회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그의 첫 번째 과제는 김 전 부장의 친인척을 찾는 일이었다. 수소문 끝에 김 전 부장과 동서지간인 최세현씨를 만나게 됐다.

김 회장은 이어 지역 한인 신문에 추모회 발기 모임 광고를 게재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문사에서 난색을 표했다. 대부분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한인들로부터의 거센 항의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결국 광고비를 추가로 더 지급하는 조건으로 어렵게 광고를 실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1993년 5월 3일 "역사적인" 추모회 발기 모임을 하게 됐고, 같은 달 24일 첫 추모제를 개최했다.

당시 뉴욕 플러싱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던 김 회장은 김재규 전 부장 추모제를 위해 학원 강의실 벽을 뚫어서 널찍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초창기부터 꾸준히 20명 정도는 오고, 많이 올 때는 한 50명까지 왔다"며 "15년 전에 제가 비행기표를 사서 강신옥 변호사를 모신 적이 있는데, 그때 광고를 많이 해서 60명 정도 왔다"고 말했다.

김 전 부장의 여동생 김단희씨도 20년 전 김 회장이 낸 신문 광고를 보고 추모제를 찾아왔다. 김단희씨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추모제를 한다고 광고를 내니까,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보다 경계심이 들었다"며 "오빠가 중앙정보부장을 했으니까, 돈이나 좀 있는 줄 알고 접근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웃어보였다. 그는 이어 "이제는 추모제에 오시는 분들에게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추모제를 하면서 협박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주로 "김재규가 왜 의사냐", "너 죽고 싶어" 등의 내용에 잔뜩 욕설을 퍼붓는 수준이었다.

"협박 전화도 매년 흐름이 있다. 한국에서 보수 정서가 강해지거나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면 항의 전화, 협박 전화가 더 많이 왔다. 그런데 올해에는 이상하게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박근혜가 뜨는 것으로 봐선 분명히 협박 전화가 와야 하는데, 이상하게 안 왔다."

김 회장은 첫 추모제를 한 그 다음해에 김영삼 전 대통령 앞으로 김 전 부장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다. 4개월 뒤, 김 회장에게 날아온 것은 "사자에 대해서는 명예 회복이 없다"는 법무부장관 명의의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그 당시에는 복권이라는 법률 용어를 몰라서 명예 회복이라는 표현을 썼더니, 그런 멍청한 답변이 온 거다. 그 뒤로는 다시 청구하지 않았다. 언뜻 보니까, 무슨 내용인지 다 알면서도 일부러 안 해주는 것 아닌가. 그래서 더 이상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모든 만물은 시기가 있다. 제 생각에는 분명히 김재규 부장은 명예 복권이 된다. 그러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니까, 아마 내 생애에는 틀린 것 같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셋째 여동생 김단희씨와 남편 오수춘씨가 분향하고 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셋째 여동생 김단희씨와 남편 오수춘씨가 분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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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김재규 부장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분향을 마친 뒤, 참석자들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음식을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주로 김세원씨가 화두를 이끌었다.

"한국의 언론은 김재규 부장을 시해범, 살해범으로 몰아간다. 그런데 김재규 부장은 유신시대를 종식한 것이다. 7년간 유신체제에서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갈 길이 없었다.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 300만 죽여버렸는데, 우리나라에서 200만 우습다. 부산 쓸어버려' 그런 말을 하던 시대였다. 부산·마산에서 거의 민란이 일어나는 수준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정보를 많이 아니까, 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갈 길이 없는 상황에서 '박정희, 너 하나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중앙정보부 얘기가 나오자 오수춘씨가 거들고 나섰다.

"유신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니까, 중앙정보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부장님이 한 건 하셔야 하는데'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당시에는 민주화 바람이 거세면 동백련 사건, 민청학련 사건 같은 것을 만들어 내서 '걔들 알고 보니 전부 빨갱이다'라고 민심을 돌려놓았다. 그게 바로 '한 건'이다. '한 건'을 만들어서 국민의 관심을 돌리는 게 유능한 정보부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김재규 부장을 두고 '무능하다'는 말이 나왔다. 사건을 만들어서 터뜨려야 하는데, 그것을 안 했기 때문이다."

10.26 사건이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사살한 뒤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전 부장은 이전의 중앙정보부장이 했던 '한 건'이 아닌 다른 식의 '한 건'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이를 '민주 혁명'이라고 선언했다. 실제 12.12 군사쿠데타가 있기까지 2개월간 '민주화의 봄'이 왔다. 김세원씨는 "박정희가 국립묘지에 있는 게 지금도 불만"이라며 "박정희는 김재규 부장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박정희가 계속 집권했다면 5.18 광주학살 정도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 등에서 아이고…. 박정희가 김재규 부장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금 국립묘지에 있을 수 있었겠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잊어버린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한다. 당시 그 암울했던 독재 시절을 잊어버리고서 말이다."

김재규 전 부장의 추모제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내년을 기약하며 하나둘 어둠을 등지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제목의 책자와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태그:#김재규, #박정희, #박근혜 , #10.26,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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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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