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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의 수녀님들. 청산도로 향하는 여객선 위에서 수녀님들을 만났다.
 선상의 수녀님들. 청산도로 향하는 여객선 위에서 수녀님들을 만났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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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11시 20분 버스는 어둠을 파고들어 헤치며 도로 위를 질주했다. 과도한 소비의 불빛으로 휘황한 서울의 산만한 흥분은 왠지 모르게 피곤했다. 어지럽게 복잡한 소란의 영역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야릇한 어둠의 바다, 어둠의 시공을 뚫고 오로지 앞을 향해 달리는 버스의 전조등 불빛은 마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노란 혈류처럼 고속도로를 따라 흘렀다.

새벽 5시,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이 낯설게 느껴졌다. 가로등도 졸고 있는 고요한 바다의 항구, 코끝을 통해 전해오는 갯내음은 어지간히 무뎌진 나의 공감각적 심상을 자극하고 있었다. 마땅히 근원을 알 수 없는 '한스러움'과 남녘이 품고 있는 짙은 그리움은 여전히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나는 '완도항'에 내려서 한동안 무심코 바다만 바라보았다.

'남도'에 대한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애상의 정서에 잠시 젖어있을 무렵, 청산도로 향하는 첫 배는 차분히 심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배 위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다. 바다를 엷게 덮은 희미한 안개는 묘하게 운치가 있었다.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하는 여객선 갑판 위에서 하늘과 바다와 섬을 보았다. 그리고 두근거리며 출렁이는 내 마음의 설렘을 보았다.

완도항을 출발한 지 40여 분 쯤, 마치 투명에 가까운 백색 '모시천'으로 살짝 덮여있는 듯 신비한 모습으로 청산도가 눈에 들어왔다. 배 위에서 보는 청산도의 모습은 온통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바다 위에 떠있는 산맥, 운무로 휩싸인 미지의 섬, 천상의 낙원… 뭐, 그런 느낌이었다.

청산도를 감상하고 있는 배 위에서 우연히 몇 분의 수녀님들을 만났다. 머리에 하얀 두건을 두르신 수녀님들의 맑고 깨끗한 자태와 꾸밈없는 순수함은 그냥 바라만 보아도 몹시 아름다웠다. 하얀 백색의 운무로 엷게 덮인 청산도와 백색의 두건을 머리에 쓰신 수녀님들의 모습에서 희한한 동질성이 느껴졌다. 가만히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시는 수녀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상의 마리아'님들이 아닐까 상상을 했다. 상상 속의 짧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그리고 얼마 후 희미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드러나는 청산도의 도청항,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그 곳에 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느려서 행복한 섬,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청산도'

청산도 다랭이 논. 청산도에는 곳곳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다랭이 논이 상당히 많다.
 청산도 다랭이 논. 청산도에는 곳곳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다랭이 논이 상당히 많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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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군 청산면, 전라남도 완도에서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 해역의 섬, 청산도. 5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청산도는 남쪽에 최고봉인 매봉산(385m)과 보적산(321m), 북쪽에 대봉산(334m)이 솟아 있으며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이다. 이 아름다운 청산도의 '느림'이 국제적으로 인증을 받으며 슬로시티로 지정된 이유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바로 섬에서 내리면서 부터였다.

도청항에 내려 신흥리 해변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끈적끈적 걸쭉한 버스 기사님의 남도 사투리는 무척 맛있고 친근했다. 메마르고 건조한 깍쟁이 도시인들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신흥리 해변에 내려 걸음을 본격 시작했다. 동촌리를 지나 상서리 마을의 돌담길을 걸었다.

특히 상서리는 마을 전체가 구불구불한 돌담으로 이어져 걸음을 걷는 내내 향토적 곡선이 주는 부드러운 편안함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층층이 쌓아올린 돌담은 소박하게 지어진 농가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포근하게 조화로웠다. 다랭이논(청산도 말로는 '다랑치논'이라고 한다.)이 계단식으로 비교적 넓게 조성된 청계리를 느릿느릿 걸었다. 나는 마치 매혹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상을 감상하듯, 거대한 야외 미술관의 파노라마 '대지미술'을 감상하듯 연신 터져 나오는 감탄을 자제할 수 없었다.

청산도 범바위. 청산도의 남쪽 해안에 있는 최고의 조망소인 범바위와 전망대
 청산도 범바위. 청산도의 남쪽 해안에 있는 최고의 조망소인 범바위와 전망대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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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리를 지나 청산도의 제1경이라는 범바위길로 향했다. 청아한 산새 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리는 길속으로 걸어갔다. 걸으며 숲을 보았고, 걸으며 군데군데 펼쳐진 빼곡한 마늘밭을 보았고, 누렇게 익어 바람에 출렁이는 맥주보리의 군무와 뙤약볕에 밭을 메는 섬마을 '어머니'를 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한 편의 그림이었다. 한 편의 시였다. 청산도가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순박하고 솔직한 모습은 자극적이지 않은 자연주의의 그것 그 자체였다.

오른쪽에 솟은 보적산 자락을 스쳐 지나 범바위에 도착했다. 과연 청산도 제1경이란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남도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반갑게 맞아주는 범바위에 올랐다. 순간 바다는 어머니였고, 사랑하는 애인의 편안한 품이었다. 범바위 정상에 올라 맛보는 솟구치는 일탈의 해방감과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범바위 전망대에서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다도해… 바로 가까이 작은 무인도 '상도'가 보였고, 멀리 희미하게 '여서도'가 보였다. 맑은 날이면 더 멀리 거문도,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하니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명소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한동안 전망대에 홀로 서서 푸른 바다와 섬을 마음에 고스란히 담으며 바람을 맞았다.

청산도 제1경 범바위와 갯돌 해수욕장

느림의 미학. 청산도 범바위 전망대에 있는 우체통. 편지를 써넣으면 1년 후에 배달이 되도록 한단다.
 느림의 미학. 청산도 범바위 전망대에 있는 우체통. 편지를 써넣으면 1년 후에 배달이 되도록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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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반가운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침에 배에서 뵀던 이른바 '선상의 마리아' 바로 그 수녀님들이었다. 인사를 나누었다. 어디서들 오셨는지, 어떻게 오신건지… 왜, 그 분들과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지만, 잠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기념사진도 한 장 덤으로 함께 찍을 수 있었다.

범바위에서 내려와 '말탄바위'를 지났고, 권덕리 작은 포구를 지났다. 해안가 절벽에 난 작은 슬로길은 그야말로 느림의 길이었고, 호젓한 사유의 길이기도 했다. 길을 걸으며 어여쁜 꽃도 많이 만났다. 특히 해안가 절벽길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었던 홍자색 꽃 '자란'은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예뻤다. 남도지방의 양지쪽에서 자라는 난초과의 '자란'은 수줍은 듯 발그레한 꽃잎의 얼굴도 고왔지만, 경쾌하고 날렵하게 피어난 꽃잎의 자태도 일품이었다.

권덕리를 지나 읍리 앞 갯돌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모래사장이 아닌 동글동글한 갯돌로 이루어진 해변은 갯돌을 쓸고 내려가는 파도소리가 잔잔하면서도 색다른 울림을 주었다. 발밑에 밟히는 갯돌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마치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부리듯 몸을 비벼댔다. 생활력 강한 여염집 아줌마들 같았으면 장독 속에 눌러 놓기에 제격이라며 하나 둘 씩 부득불 챙겨갔을지도 모를 읍리 갯돌은 한마디로 앙증맞았다. 눈의 행복, 발의 평화, 소리의 유희를 체험케 하는 청산도 갯돌 해변에서의 느린 걷기는 나의 피곤함과 소심한 욕망을 너그럽게 치유해주는 천연의 마사지 그것이었다. 

눈을 깜짝 놀라게 한 '붉은 양귀비 꽃밭'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장소 옆에 화려한 양귀비 꽃밭이 펼쳐져 있다.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장소 옆에 화려한 양귀비 꽃밭이 펼쳐져 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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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오르막을 넘어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다는 당리마을로 향했다. 가지런하고 정성스런 돌담이 낮게 둘러쳐진 언덕 길가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누렁소 두 마리가 있었고, 파란 화살표로 칠해져 슬로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의 다정한 손짓도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호젓한 돌담길 사이로 찬란한 양귀비 밭이 진홍색 보자기처럼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소름끼치는 놀람과 환희를 느꼈다.

초록의 풀빛과 돌담의 암갈색에 익숙했던 시세포와 시신경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반전의 꽃밭이었다. 양귀비 꽃밭을 가르는 돌담길의 다른 한쪽 편으로는 영화 '서편제'를 촬영했던 그 길이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그 길 위에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너울너울 걸어 내려오던 추억의 명장면이 순간적으로 오버랩되었다. 바라만 봐도 저절로 감동이 느껴지는 참, 아름다운 길이었다.

돌담과 돌담 사이를 유유히 가르는 서편제 황토흙길을 한 바퀴 고스란히 걸어보았다.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한가로이 걷노라니 왠지 나도 모르게 진도 아리랑 콧노래를 흥얼거리고픈 묘한 충동이 발동했다. 그런데 마침, 촬영 세트장 초가집 주변 스피커에서 구성진 소리로 진도 아리랑이 운치 있게 흘러나오니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영화 서편제에서 세 사람의 주인공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길
 영화 서편제에서 세 사람의 주인공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길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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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촬영 세트장으로 쓰였던 초가집은 현재는 청산도 마을 주민들이 주막으로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곳으로 들어가 항아리 하나 가득 출렁이는 전통 막걸리에 해물전 한 장, 감칠맛 나는 김치 한 종지를 모셔놓고 외롭지만, 낭만적인 음주로 청산도 걷기 여정을 마무리했다. 막걸리 한 잔은 입안을 걸쭉하게 휘감으며 맴돌았고, 해물전과 김치는 남도의 향을 진하게 풍기며 입안을 소용돌이 쳐 코끝까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남도의 슬로시티, 청산도. 청산도는 자연에 순응해 살아온 소박한 사람들의 때 묻지 않은 터전이었다. 섬이면서도 어업과 농사를 짓는 집들이 많고, 다랑논과 구들장논을 만들어 지혜롭게 농사를 짓고 사는 유순한 사람들의 고향이었다. 돌담과 해녀, 초분 등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곳, 누구라도 조금만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언제나 다정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착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섬이었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욕심, 스스로의 허영을 이기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는 자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보따리 하나 싸들고 느리게 걷는 삶의 쉼터 청산도로 떠나라. 그 곳에서 슬로길을 걸으며 버리고, 내려놓아 가볍고 겸허한 마음으로 환생하여 돌아오라.

덧붙이는 글 | 지난 5월 18일 무박2일로 도보여행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청산도, #슬로시티 청산도, #완도, #다랭이논,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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