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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은 조선 제22대 왕으로 (재위 1776~1800).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수원화성과 정조대왕은 수원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큰 기둥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수원의 자존심'이라고 표현한다. 때문에 수원화성과 정조대왕을 향한 시민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시는 시민들의 이런 마음을 읽어 오랜 세월의 풍파와 전쟁으로 파손됐던 수원화성을 지난 1975년부터 보수, 복원했다. 또한, 수원화성축성 200주년이 되던 지난 1996년, 초대 정조대왕 선발대회를 개최하고 그분을 환생시켜 시민의 곁으로 모셨다.

 

지난 주말,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문을 열고 궁궐 밖으로 위풍당당하게 행차했다. 집사청에서 펼쳐진 '화성행궁, 역사 속 한의약 체험' 행사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수원화성에서 집 주인 격인 정조대왕의 행차는 좋은 볼거리로 여행객들의 추억 보따리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정조대왕역을 맡고 있는 저분은 누굴까?"

 

화성행궁 여행을 다녀왔던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 했을 법한 얘기다. 그 주인공은 현재 수원시한의사회 회장이며 인계동 O한의원 원장을 맡고 있는 윤성찬씨다. 그는 지난 2010년 선발대회를 거쳐 11대 정조대왕역으로 2년간 각종행사에 참여해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주중에는 윤 원장으로, 주말에는 정조대왕으로 불리는 윤성찬씨(이하 윤 원장)를 만났다.

 

- 수원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수원은 제가 28살이던 1994년에 처음 만나 데이트하고 그 이듬해에 결혼한 제 아내의 친정입니다. 아내도 원래부터 수원사람은 아니고 당시에 장모님이 수원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살게 됐습니다"

 

순천이 고향인 윤 원장이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일하면서 지금의 아내와 처음 데이트를 하던 곳이 팔달문 인근 극장과 팔달산 자락의 수원 화성이었다고 한다. 그때 수원이라는 도시가 역사와 전통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남문에 있는 영화관 뒤쪽, 성곽을 따라 걷다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노래를 부르며 프러포즈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불렀던 것 같아요. 아무튼 다행히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팔달구 인계동에 한의원을 개원하고 수원에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벌써 17년이 됐습니다."

 

아내와의 인연이 수원으로 이어지고 결국 수원에 터를 잡게 됐다는 윤 원장, 아직도 프러포즈했던 장소인 팔달산 주변과 성곽 길을 그때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노래보다도 성곽길의 운치에 아내의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 정조대왕 선발대회에 나서게 된 계기(이유)는?

"수원화성문화제에서 '정조대왕 능행차연시' 를 보면서, 정조대왕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모님도 해마다 재현되는 행사를 보시더니, "윤 서방! 자네도 한번 정조대왕 선발대회에 나가볼 생각 없나? 자네가 정조대왕이 되면 참 잘 어울릴 거 같은데"라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가 제 가슴에 목표를 세우게 했습니다."

 

자신도 멋지다고 생각은 했지만 장모님의 강한 권유가 정조대왕 선발대회에 나서게 된 계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장모가 내민 권유의 말이 '접대용'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 자신이 너무 순진했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목표를 세운 후 정조대왕 선발대회에 참가 가능한 나이가 될 때까지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정조대왕의 덕목에 부합하기 위한 봉사활동은 물론 정조대왕의 생애에 대한 공부, 수원 화성의 역사적 의의 등 관련 자료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윤 원장은 선발대회에 나가기 위해 정조대왕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그분에 대해 더욱 큰 존경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특히, '효 사상'에 매료됐고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들에게도 '효 사상'이 전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더욱 정진하게 됐다고 말한다.

 

 

- 정조대왕 역은 어떤 일(행사, 역할)들을 하는가?

"정조대왕은 매년 10월에 열리는 수원화성문화제 기간 내내 정조대왕 역을 수행합니다. 화성문화제 개막식, 폐막식은 물론 정조대왕 능행차연시를 비롯해 혜경궁 홍씨 진찬연,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 장용영 수위의식, 정조대왕 친림 야조(야간군사훈련), 거둥행차 등 화성문화제기간 4일 내내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소화해내야 합니다."

 

윤 원장은 정조대왕으로서 가장 큰 역할로 매년 10월에 열리는 수원화성문화제를 꼽았다. 그때는 4일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분장을 하고 있기에 식사도 거를 때가 많다고 남모르는 어려움도 토로했다.

 

또한, 매주 일요일 오후2시 화성행궁 신풍루에서 재현되는 '장용영수위의식' 등 수원시의 각종 문화행사에서 정조대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2년의 임기 동안 수원시의 홍보대사로서 수원시를 알리는 역할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윤 원장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효 정신을 심어주고 기여했을 때가 가장 보람됐다"고 말한다. 또한, "정조대왕 역할을 하고 있을때나 분장을 지운 상태에서도 현직 정조대왕 역이라는 사실을 아는 분들이 많은 사랑과 성원을 보내줬다"면서 그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행사때 마다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잡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사진 촬영에 임하려 노력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의 방법이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강조했다. 왜냐면 어른도 그렇지만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정조대왕과 악수하고 사진 찍었던 추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일임을 경험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다.

 

- 정조대왕 역을 맡기 전과 맡은 후의 변화는?

"정조대왕이 워낙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훌륭한 임금이었기에 그분의 역을 대신 하는 것이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원래 소탈하고 옷도 편하게 입고 반바지 운동복 차림을 즐겨하는데 정조대왕 역을 맡은 후로는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윤 원장은 한 순간에 공인이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생활 방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행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고 실토한다.

 

하지만 피상적으로 알던 정조대왕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되고 수원시 각종 문화행사에 정조대왕 역이나 내빈으로 참석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시정에 대해서 많이 알게 돼 수원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진 것은 좋은 변화였다고 한다. 

 

윤 원장은 "정조대왕 역을 맡으면서 시민들이 정조대왕에 대해 제게 물어왔을 때 부끄럽지 않게 대답할 수준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관련 자료도 공부하고, 화성운영재단에서 주관하는 정조아카데미에도 등록해 역사학자 이이화선생님 강의도 들었다"면서 일반인 보다는 조금 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문가 수준은 아니라고 자신을 낮췄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독특한 집안 내력을 얘기해줬다.

 

윤 원장의 아버지는 역사를 가르치는 중등교사였다고 한다. 때문에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정조대왕에 대해 공부를 할 때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수월함이란 더 거슬러 올라가 증조부와 부친이 향교 도유사를 지낸 파평 윤씨 종가집으로 그가 유교적 전통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정조대왕과 수원에 대해 꼭 집어서 얘기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조대왕은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2명의 임금 중 한 분입니다.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이 악역을 자임하며 정적을 제거해줘 평화의 시기를 열어갈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이후 어렵게 왕위에 올라 늘 정적들로부터 시해의 위협 속에서도 탁월한 영민함과 개혁적 성향으로 조선후기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임금입니다. 또한 정조대왕은 이곳 수원을 동양 최초의 계획 신도시로 건설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수원과 정조대왕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수원 시민들에게 정조대왕이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입니다."

 

정조대왕과 자신의 공통점을 발견했냐는 질문에 웃으며 거의 없다고 답한다. 자신은 평범한 교육자 집안에서 양친의 사랑을 받으며 순탄하게 자랐지만 정조대왕은 세손으로 태어났으나 늘 정적들의 견제와 위협 속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난의 삶을 살았다고 대비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데, 정조대왕은 술도 잘 마셨고, 담배도 좋아한 것으로 알고 있고 정조대왕은 주도적이고 진취적이며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자신은 개혁적인 걸 좋아는 하지만 결단력이 부족해서 주도적으로 하지는 못한다고 공통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토로했다.

 

단, 정조대왕이 한의학에 밝은 한의학군주였는데 자신도 한의학을 전공해 한의학박사가 되었으니 그 점은 공통점이라고 일치점 하나를 건넸다.

 

윤 원장이 유일하게(?) 발견한 정조대왕과의 공통점인 한의학에 대한 질문에 그의 목소리 톤은 조금 높아졌다. 특히 모 일간지에 '정조대왕과 한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었기에 자신감은 더욱 넘쳐났다.

 

"정조대왕은 세손시절부터 한의학에 관심이 많아 10여년을 한의서를 공부했고, '수민묘전'이라는 한의서를 직접 저술한 세계 유일의 군주였습니다. 또한 그 스스로 처방한 '제중단','척서단' 이라는 약을 만들어 수원 화성 건설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한의학에 대한 수준과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명의 강명길에게 직접 명을 내리고 그 스스로 교정과 검토를 하여 마침내 자신의 재위기간에 '제중신편'이라는 동의보감 이후 최고의 한의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윤 원장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의학학자로서의 정조대왕 면모를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선발대회에 참가한 또 다른 이유가 '한의학군주 정조대왕'의 생애를 널리 알리고 조명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속마음도 털어놓았다.

 

이어 윤 원장은 "신하들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처방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던 기록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면서 정조대왕은 정치와 의학이 모두 백성들을 편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임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의견까지 덧붙였다

 

한의학에 대한 얘기는 5월, 6월, 9월 10월 4개월 동안 화성행궁에서 진행되는 한의학체험 행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정조대왕이 한의학에 뛰어난 군주였기에 그가 애착을 갖고 건설한 화성행궁에서 한의약체험 행사를 갖는 것이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제가 직접 수원시한의사회장으로서 시장님께 건의를 드려 2011년 5월부터 화성행궁 집사청에서 한의약체험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한의학 체험행사란 매주 일요일, 화성행궁 집사청에서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화성행궁, 역사 속 한의약 체험' 이라는 제목으로 어의 복장을 한 수원시한의사회 소속 한의사들이 침 뜸 한약 등의 한방 진료를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해 주는 행사다.

 

이 행사에는 한류 열풍을 주도했던 대장금처럼 의녀 복장을 한 경기도 간호조무사회 소속 의녀들과 자원봉사자들이 관광객에게 한방차 시음도 하고 한약재 전시도 하며 직접 첩약을 싸게끔 지도하는데 관광객들의 호응과 인기가 높다고 한다.

 

윤 원장은 "한의약 체험은 수원화성에서 정조대왕과 함께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이라 판단된다"면서 "한의학을 다룬 드라마인 대장금이 그 가능성을 이미 확인시켜줬다"고 설명했다.

 

인터뷰가 길어지고 질문이 딱딱해 '분장하는데는 얼마나 걸리는지', '가족들은 좋아하는지', '꿈에서도 정조대왕역을 해봤는지' 등 가벼운 화제로 대화를 돌렸다. 윤 원장의 표정이 정조대왕에서 한의원 원장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정조대왕 분장을 하는데는 30~40분 정도 소요돼 행사 1시간 30분전까지 분장실에 도착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녹화가 아닌 현장에서 진행되기에 집에서 거울보고 연습하고 운전 중에도, 걸어 다니면서도 항상 연습한다. 행사를 앞두고 대사를 외우다가 잠이 들면 꿈속에서도 대사를 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등 단답형이지만 재미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어, "아내와 아이들이 처음 선발됐을 때는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했는데 매주 주말마다 행사에 나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점점 시들해졌고 주일에는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야하는데 매번 행사가 있어 넷이나 되는 어린 아이들을 혼자 돌보느라 고생하는 아내가 정조대왕 임기가 빨리 끝나기를 학수고대했던 것 같다"고 멋쩍게 웃었다.

 

- 정조대왕 역을 마감해야 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소감은?

"정조대왕이 워낙 우리 역사에 훌륭한 군주였기에 그분의 역을 대신하면서 혹여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누가 되지는 않았을 지 늘 걱정이 됩니다."

 

큰 인물을 대역한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허심탄회한 소회를 내비치는 윤 원장, "2010년 7월에 선발돼 처음 치러낸 제47회 화성문화제는 경황없이 지나가고 2011년 제48회 화성문화제는 좀 여유도 생기고 알만하다 싶었는데 벌써 임기가 끝나 간다"면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 동안의 정조대왕 역을 통해 받은 과분한 사랑과 관심을 남은 생애동안 조금씩 봉사하며 갚아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 정조대왕역을 마감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무엇보다도 먼저 2년 동안 주말 행사에 참여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과의 시간을 자주 갖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네 명이기에 네 배는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일요일 행사 탓에 소홀히 했던 교회 일도 다시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수년 동안 해왔던 교회 합창단도 다시 하고, 제 평생의 업인 한의원에도 더 충실할 생각입니다."

 

한 번의 경험을 갖고 있는 정조대왕역, 다시 기회가 온다면 윤 원장은 또 해보고 싶을까? 그는 "임기가 끝나고 나면 한동안 허전해지면서 그런 생각이 날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한 번의 경험으로 족하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정조대왕 역이 선발될 거라 생각한다"고 아쉬움 반, 후련함 반으로 마무리했다.

 

끝으로 윤 원장은 "수원은 역사문화도시로 우리 민족의 훌륭한 전통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온 곳이기에 수원 시민임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면서 "수원화성과 행궁의 가치가 온 국민들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희망을 내비쳤다.

 

매 주말마다 행궁에서 봤던 낯익은 얼굴, 무보수 명예직이지만 보람 하나로 2년 동안 정조대왕역을 성실히 수행했던 윤성찬씨. 이제 한두 달 후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자신의 본분인 한의사로서 새롭게 수원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게 짧지 않은 인터뷰는 끝이 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기자에게 그는 "매주 일요일에 화성행궁앞에서 열리는 상설공연에 많은 분들이 와서 수원화성과 행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우리문화를 배우고 갈 수 있도록 홍보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거듭 당부했다. 11대 정조대왕의 마지막 남은 열정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수원시인터넷신문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수원시, #행궁, #정조대왕, #윤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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